어떤 미친 사람 이야기
마가복음 3장 20~30절 (2019년 3월31일)
처남댁이 심리학과 출신이다. 심리학과 출신이라는 말에 낯선 감정의 반응이 살짝 일어났다. 저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행동을 해도 다 꿰뚫어 보는 거 아닌가? 내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려고 입시를 치를 때에, 시험과목 중에 심리학도 있었다. 프로이트니, 칼 융이니 하는 유명한 학자들과, 몇 개의 심리학 용어만 암기해서 시험을 볼 때도 대체 신학에 왜 심리학이 필요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훗날 기회가 있어 배우게 된 심리학은 예상 외로 매우 재미있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최면이나 혈액형 별 성격 분석 같은 것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심리와 판단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또는 어릴 때부터 어떻게 형성되는지 같은 것을 배운다. 나아가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기초와 이론을 익힌다. 심리학의 요즘 연구 경향은 사회적 현상에 많이 집중하고 있다. 세대간의 갈등이나 sns 세대의 새로운 특성도 연구과제고, 특히 중독현상에 대해서 많이 연구한다. 최신 경향으로서는 사회심리학이나 성격심리학이 뜨고 있는데, 이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이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믿게 되는 심리적 요인이나, 반사회적 행동의 이유나 교정법을 다루기도 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이해, 정의에 대한 이해, 돈과 이익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려고 한다.
심리학자는 남의 마음을 조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찰하는 사람이다. 심리학은 학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심리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만의 심리적 태도는 대부분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이웃들과 공유한다. 심리학 이야기 중에서, 사람이 어떤 특정상황이나 사람을 판단하거나 선택할 때에, 가장 우선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본 사람이 있다. 심리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예수의 이야기야말로 무궁무진한 보물창고다. 우선 예수의 캐릭터가 무척 매력적이고, 색깔이 선명하다.
그러나 예수를 심리학적 입장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는 인간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측면, 신적 측면을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성경에는 예수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매우 건조한 어조로, 잠잠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수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조금 파악해볼 수 있다.
향유를 주께 드린 여인의 상황은 어땠을지. 예수를 구경이라도 하려고 애써서 뽕나무에 올라갔는데, 하필이면 예수께서 그 뽕나무 밑에까지 다가와서 내려오라고 하실 때의 삭개오의 입장에도 서 본다. 우물가에서 만난 유대인과 대낮에 홀로 우물가에 나온 여인의 어색하지만 진지한 대화의 당사자가 되어본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책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사람과 어떻게 맺어지는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한 책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예수를 만난 상황, 그들의 반응, 그들이 예수를 만난 이후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예수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반응
본문에 예수를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예수를 붙들러 나온 친족들이 보인다. 예수께서 들어가신 이 집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으로 보인다.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지만, 주요 활동무대는 가버나움이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 중심의 산지에 있는 동네고, 갈릴리 어업을 중심지였던 가버나움까지는 약 50Km정도 떨어진 곳이다. 이곳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여러 도시 중 가장 번화한 곳 중의 하나였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몇 없는 로마 백부장 군대의 주둔지이기도 하였다. 제자들의 몇 사람, 알려진 바로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이곳 출신이고 도마도 그렇게 보인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와 외사촌지간으로 알려져 있다.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셨고, 가버나움에 있는 동안에는 베드로의 집에 기거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예수의 행적이 소문났고, 친족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왔다. 사람들은, 가족들은 왜 예수를 미쳤다고 하는가?
예수가 미쳤다는 이야기는 예수가 미쳐서 난동을 부리거나 자해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뒷 구절에 서기관들이 예수를 귀신 들렸다고 말하는 구절이 혼동을 주는데, 서기관들의 의도 섞인 모함과 달리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를 미쳤다고 여겼다.
미쳤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실제로 정신적 이상증세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 기록된 지금까지의 예수의 행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할 리는 없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에 권위 있는 새 교훈에 놀랐었다. 귀신을 내쫒으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분을 미쳤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 미쳤다는 말은 어딘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행동에 쓰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 사람이 요새 낚시에 미쳐서 사업도 팽개쳤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 학생 요즘 게임에 미쳐서 공부는 뒷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수께서 미쳤다는 사람들은 어떤 의도로 사용되었을까? 우리 성경에는 모든 버전이 다 ‘미쳤다’고 번역되어 있다. NIV 성경에는 ‘He is out of his mind’라고, 킹 제임스 성경에는 ‘He is beside himself. ‘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말들은 정신적이나 병적으로 미쳤다기보다는 ‘제정신이 아니다’고 말할 때 쓰는 말이다.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다’, ‘슬퍼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좋아서 날뛰었다’ 등의 방식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NASB 성경은 ‘He has lost His senses.’라고 번역했느데 뭔가 감각이나 중심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한 것은 정신이상으로 미쳤다기보다는, 뭔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예수의 행적과 주변 상황으로 볼 때에 더 설득력이 있다. 사실, 청년 예수의 행적은 지금 입장에서든지, 이천 년 전 그때든지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가 미쳤다면
먼저는 잘 나가던 직업을 내던지고 집을 나가서 떠돌이가 된 것이 그렇다. 초대교회 때부터 전해져 오던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는 잘 나가던 목수였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맏형인 예수로서는 적어도 동생 넷과 어머니의 가장인데 그는 가업을 내팽개친 것이다. 떠돌이 설교자가 직업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가장 돈 안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여기에는 결정적 문제가 있다. 지금 예수는 당시의 유대 정통 종교 지도자들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동 지역은 종교 갈등은 곧장 피를 흘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예수는 지금 당국자들의 비위를 심히 건들어 놓았다. 이미 권력을 가진 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잡아 죽일까 의논하고 있었다. 2000년 전의 세계는 민주주의도, 법치주의도 아니어서, 권력자와의 충돌은 너무 위험한 선택이었다. 유대의 누구라도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과 함부로 대적하지 않았다. 저들은 거대한 세력이며, 권력의 핵심이며, 종교의 이름으로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이익집단이었다. 그런데 갈릴리 시골 나사렛 출신의 청년이 그들을 도발해버린 것이다. 이건 미친 짓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예수의 행적에 이상한 점은 그의 제자들과 그들의 모임이다. 예수는 성경에도 해박하고, 기이한 능력을 행하기도 하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따르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그 주변에 예루살렘의 귀인들로부터 지식인 계층의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었는데, 정작 예수가 선택한 제자는 갈릴리 시골 무지랭이들이었다. 어부가 몇 사람, 회개하고 돌아온 세리, 광신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뭔가 속을 알 수 없는 유대 출신의 음흉한 사람. 예수가 뭔가 위대한 일을 하려 한다면, 그 제자들은 결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갈릴리에서는, 저런 사람들이 모이면 주목을 받는다. 예루살렘이 속한 유대는 이스라엘의 남부 산악지대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전통적으로 부유층과 권력자들, 종교 지도자들이 살던 지역이고 왕궁이 여기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북쪽 갈릴리 지역 사람들을 얕보았다. 실제로 갈릴리는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수 백 년 동안 외지인들이 거했었고, 예수님 오시기 1-2백 년 전에야 겨우 회복한 땅이었다. 갈릴리의 농지 대부분은 유대의 부유층들의 소유였고, 많은 수의 갈릴리 사람들은 소작농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도시에 거하면서, 갈릴리 지역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중앙정부 지역의 사람들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평지는 아마겟돈이라고 불리는 지역인데, 현대에 이스라엘의 빵바구니라고 불릴만큼 비옥한 농경지이되, 인류 역사상 한 지역에서 전쟁이 가장 많이 일어난 지역 중의 하나이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을 잇는 길과, 아라비아와 터키 지역을 잇는 길이 만나는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였다. 전 세계의 새로운 문물이 오가는 지역에서 살아가던 갈릴리 사람들의 의식은 일찌기 깨어났고, 이들은 권력자들에 대하여 고분고분하거나 협조적이지 않았다.
갈릴리 지역에서는 수시로 반란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갈릴리의 드다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 일이 언급되어 있다. 헤롯 왕 때에는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서 백성을 꾀어 반정부 활동을 벌이다가 처형되기도 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사의 제물에 섞어서 제사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위험한 땅, 위험한 사람들인 것이다.
큰 도시라고는 할 수 없는 가버나움에 로마 백인대가 거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로마는 당시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을 지배하는 거대한 국가로서, 정치적 소요에는 아주 적극적으로 대처했고, 조금의 소요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예루살렘에서도 주목하는 예수가, 드디어 핵심 제자를 산속에서 비밀리에 임명하고 내려왔으니, 세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을 미친 짓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이 말리러 왔다. 사람들은 수군댈 뿐이지만 가족은 행동한다. 그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를 데리고 나사렛 산지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가족들은 위대한 성취보다는 소박한 행복을 원한다. 어머니와 동생들도 와서 사람을 보내 예수를 불렀다. 온 가족이 총 출동했다. 큰형이 지금 저대로 좌충우돌 하면 로마의 군대와 헤롯의 군대, 제일 무서운 성전 경찰에게 험한 꼴을 면치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말씀하셨다.
33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고 불효하다고 하던데, 글 읽는 법을 좀 배워야 할 것이다. 예수는 벌써 당신의 세계를 땅 끝까지 확장시키셨다.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34-35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 말이 불효의 말인가? 이 말이 미친 사람의 말인가? 가족은 신앙의 적수인가?
예수의 삶에는 원칙이 있다.
예수는 행복한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먼 여행을 다녀와서는, 집에 돌아와서는 말하기를 ‘집이 제일 좋다’고 말한다. 편안함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 집이 주는 평온함과 자기 사람들이 주는 행복함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집을 떠났다. 예수의 주 활동무대는 고향 나사렛으로부터 50Km나 떨어진 가버나움이었다. 오히려 종종 예루살렘에 다녀왔을 뿐, 고향 쪽으로는 출입하지 않으셨다. 예수에게는 성공하는 것보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자신의 삶의 안연함과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는 안전을 선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떤 도덕적 기준, 이익의 크고 작음보다, 안전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도발한 사람들의 적의를 피부 깊숙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돌아서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만 하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도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길 만큼 사랑하였다. 그러나 목숨과 가족을 버리면서까지도 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예수는 다수 의견이라고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소수 의견이라고 무조건 존중한 것도 아니다. 그저 옳은 길만 좇았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리보다 이웃이나 친구의 소리를 더 크게 듣는다. 문제는 예수의 그 길을 우리도 걸을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의 대부분은 시대와 상황과 이웃과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이웃은 나를 조종하는 커다란 힘이다. 너도 보란 듯 성공해야지.. 하는데, 누구 보라는 이야길까?
독불장군으로, 제 잘난 맛에 살라고 강권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삶이란 것도 없이, 시대와 주변에 이끌려, 세상 살아가는 대로 산다는게 무슨 자랑이라도 되겠는가? 자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삶에 무슨 의미가 깃들겠는가?
당신의 삶은 누가 평가하며, 당신의 삶을 인하여서 누가 만족하는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가르치신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학교와 신학교에 다 들어가야 한다. 교회 다니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전혀 다른 일이다. 교회 다닌다는 것은 그저 종교행위일 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살아가신 방식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을 신뢰하고, 그렇게 살아가기로 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과 더불어 이 선택이, 이 행동이, 이 버림이, 우리를 채근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끝없이 무리지어 몰려가는 그 길에서, 어디가 끝인지, 목적인지 모른채 행진해 가는 그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의 시각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