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닛시

출애굽기 17장 8-16절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광야를 지나며

지난 몇 주간의 주일설교는 출애굽기를 강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진행하는 강해설교는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다룬 것이다. 성경책으로 본다면 출애굽기 중반에서부터 여호수아서까지이며, 모든 본문을 다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 메시지가 분명한 것들만 마치 징검다리 건너가듯 짚어가는 중이다.

유월절의 밤, 홍해를 건넌 사건, 홍해가에서의 찬양, 마라의 쓴 물, 만나와 메추라기, 므리바 반석 이야기 등을 지금까지 다루었다. 그 하나 하나가 다 의미가 크고, 배울 점이 많지만, 그 모든 사건들이 모여서 광야의 여정이 된다. 이 큰 흐름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교훈만 얻는다 해도 충분하다. 다 모이면 굉장한 것이 될 것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학교다. (우리가 부른 찬송과 같이) 그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법, 다가오는 환란을 극복하는 법,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출애굽-광야-가나안의 여정과도 같기 때문이다. 애굽이 상징하는 세상에서 시작하여, 광야가 상징하는 신앙생활과 연단을 거쳐, 가나안이 상징하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지금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정 중에 아말렉 전쟁 이야기가 오늘의 주제다. 아말렉 전쟁은 특이한 교훈을 담고 있다. 신비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너무 짧은 기록이어서 전쟁의 상황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을 전해준다.

싸운 장소가 르비딤이다. 르비딤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바로 그 장소, 반석에서 물을 얻은 곳이다. 목이 말라서 원망하고, 사람들은 모세를 죽일 기세였으나,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신 바로 그곳이 르비딤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곳은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어제까지는 은혜를 찬송하는 곳이었는데, 오늘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은혜의 장소가 전쟁터가 되며, 고난을 마주친 곳이 은혜의 장소가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요, 광야의 행진이다. 교회가 은혜 받는 장소만 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 되며, 세상이 생존을 위해 다투는 곳만인 것이 아니라 뜻밖의 은혜를 경험하는 곳이 되는 것과도 같다.

은혜를 교회에서만, 말씀에서만 받으려 하는 사람은 오히려 항상 굶주릴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은혜는 은혜가 필요한 곳에서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삶의 현장에서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땀흘리는 곳에서 오히려 은혜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지치고 곤하여서 예수께로 나온다는 사람도 있거니와, 그 일이 날마다 반복되는 것은 저주에 가깝다. 주님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리스도인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날마자 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광야는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배우고, 스스로를 키워가는 현장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들어서자마자 연이어 일어나는 고난은 무엇을 말하는가? 홍해를 건너자 물이 없고, 물을 해결하자 양식이 떨어지고, 양식을 해결하자 또 물이 없고, 물을 해결하자 이제는 적군이 습격해오는 이 숨 쉴 틈 없는 어려움은 무엇을 교훈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보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를 이용해서 살아남으라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무엇이 쉽겠는가? 물이 없어서 아우성치다가, 원망을 모아서 한 사람에게 덮어씌우고, 다들 돌을 들어 그를 치려고 거의 폭동지경에 이르는 것과,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치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은 어려운 법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장벽일 뿐이다. 자기가 해야 한다고 여긴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우리는 꼼짝없이 망했다고 울부짖는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막연하다. 속담처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으리라 기대한다.

다 하나님을 모를 때 익숙하던 태도요 방법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광야의 길은 내가 계획한 대로 펼쳐지지 않는다.

그들이 왔다.

8절에 보면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라고 한다. 가만히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말렉이 쳐들어왔다.

아말렉 부족은 아말렉이라는 사람을 시조로 한다. 아말렉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손자다. 그들은 시내 반도와 가나안 땅 남부의 네게브 광야 일대에서 살아가는 유목 부족이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아말렉 부족의 첫 등장이다. 물론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영원한 전쟁을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400년 쯤 지나 사무엘 선지자의 시대에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때 사울이 아말렉 왕의 좋은 가축들을 남겨놓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울은 왕에서 퇴출되고, 다윗에게 기름이 부어졌다. 훗날 다윗은 자신의 무리들을 약탈해 간 아말렉 부족을 추격하여 크게 물리치기도 했다.

아말렉 족속이 또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유대 왕국이 멸망한 후, 바벨론에 잡혀간 유배지에서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대적, 그들을 죽이려 한 자는 하만이라는 재상이었다. 우리는 에스더서를 보면서 궁궐 문지기인 모르드개가 지나가는 하만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르드개와 그가 속한 유대민족을 전부 죽이려는 하만의 계획이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하만이 아각 사람, 즉 아말렉의 후예였다. 이 두 민족은 서로의 왕국과 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철천지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었던 오늘 본문의 전쟁은 어찌된 일인가? 왜 갑자기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는가?

지리적, 경제적 이유: 아멜렉 족속은 시내 반도와 가나안 남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는 유목 부족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반도에 이르서 그 중심부에 있던 시내산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땅 한 가운데를 지나가려 하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자신들의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대규모로 이동하는 것을 위협으로 느꼈을 수 있다. 또 광야에서는 생명과 같은 물과 식량 등의 자원을 소모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생존의 위협으로 느꼈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약자를 노린 무자비한 공격 : 더하여 이들에게는 욕심이 크게 있었다. 자신의 땅을 지나가려는 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말렉은 그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약탈적 동기가 있었다. 전쟁 상대로서 이스라엘의 약점은 많다. 우선은 이들은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아왔던 사람들이란 점이다. 칼을 휘두르거나 활을 쏘는 것은 그냥 마음만 먹어서 되는 일은 아니다.

반면 아말렉은 전쟁에 익숙한 부족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무리들의 가장 약한 지점을 노리고 공격을 개시했다. 훗한 신명기에서 되돌아 본 이날의 전쟁 모습은 이러하였다.

신25:17-18 너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말렉은 이스라엘 무리들 중에서 뒤쳐진 사람들, 가장 약한 지점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더 큰 약점이 있는데, 아말렉은 싸움할 군사들을 일으켜서 쳐들어왔고, 이스라엘 진영에는 노약자들, 여인들, 어린이들, 짐승들까지 가득하다는 점이다. 즉 이들의 공격은 약탈적이다. 적당한 먹잇감이 지나가니, 달려들어 물어뜯는 폭력인 것이다.

영적 적대 관계: 무엇보다 아말렉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길을 가로막고 끊임없이 괴롭히는 영원한 대적의 상징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려는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악의 세력이다. 그래서 이 르비딤 전투는 단순한 부족간의 싸움을 넘어 선과 악의 영적 대결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의 후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세속적 사람의 후예이며 육에 속한 자들의 상징이다. 그들은 날렵하며 강하다. 민수기에는 그들이 민족 중에 으뜸이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듯,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뿐이다. 아말렉이 아무리 열국의 으뜸이라 할지라도 육신이 그런 것처럼 마지막은 멸망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사람들이 당황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또 원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눈에 띠는 성경의 기록은 모세의 행동이다. 모세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여호수아를 불러 싸움에 나갈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산 꼭대기로 올라가겠노라고 한다.

이 순간이 전쟁에서 승리한 순간이다. 물론 전쟁은 다음 날 하루 종일 이어졌고, 밀고 밀리다가 결국 승리했지만, 진짜 승패는 모세가 산 위로 올라가기로 결정한 순간에 끝이 났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손이라도 시급한 시점에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싸워라. 나는 산 위로 올라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모세는 지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있다.

모세는 이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행동하고 있었다. 직전에 물이 없어 백성이 원망할 때, 하나님께 매달려 ‘저 사람들이 제게 돌을 던지겠습니다’라고 애원하며 매달리던 모세가 아니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갈등도 없이 여호수아에게 말한다. ‘너는 싸워라. 나는 할 일이 있다’ 그 일은 산 위에 서는 것이었다.

왜 산 꼭대기일까? 아마도 그곳은 전쟁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을 택한 모세의 생각과 말인데,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고 말한 것이다.

지난 주에 그 지팡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말씀하셨었다. 그 지팡이는 본래 모세의 양을 쫓고 개를 몰던 지팡이였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그가 애굽으로 떠날 때, 출애굽기 3장은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한다. 그 지팡이로 열 재앙을 쏟아내고, 바다를 갈랐다. 그러나 그 지팡이는 항상 하나님의 지팡이가 아니었다. 그것을 든 자의 상태에 따라 그것은 인간의 지팡이가 될 수 있다.

그것을 모세는 므리바에서 똑똑히 배웠다. 똑같은 지팡이가 어느 순간에는 양치는 지팡이과 개를 쫓는 지팡이가 되고, 다른 순간에는 바다를 갈라 물 속에 길을 내고, 반석을 갈라 물을 쏟아내는 능력의 지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배운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그 똑같은 지팡이를 두고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산 꼭대기

모세는 형 아론과 지도자 훌을 데리고 산 꼭대기에 올랐다. 훌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의 매형으로 알려진 사람이며 갈렙의 아들이다.

그날의 전쟁은 기이하다.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아말렉과 싸움할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다.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히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 손을 내려오지 않게 들어올렸고,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사실 이 이야기를 현대인의 관점에서 읽다 보면 이 부분에서 멈칫하게 된다. 왜 또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전개되는지 싶다. 손을 들면 이기고, 내리면 진다니 너무 유치하다. 돌에 앉은 것도 이상하고, 그냥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전쟁 끝내버리면 안 되었을까?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열정이요, 고민이었을 것이다. 영적 세계를 육신의 눈을 가진 자들에게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였을 것이다. 모세의 높이 든 손은 단순히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는 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는 교육의 손이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고대 근동지역에서 손을 드는 행위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와 중보를 상징했다. 그래서 본문에 ‘기도’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는 이것을 기도로 해석하고 있다. 모든 전투의 승패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에 달렸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모세는 이 원리를 이해하고 있고,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모습은 모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특히 전쟁터에 나간 남편, 아들, 아버지를 응원하며 애타게 부르짖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의 승패가 군대의 수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힘, 곧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기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손이다.

하나님께 손을 들면 이기니, 이처럼 신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곧 드러난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더라는 점이다. 하루 종일 손을 들고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영적인 문제는 홀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함께 싸우는 싸움이다.

영적 전투에서 가장 공격이 집중되는 곳이 어디인가? 영적 지도자들에게 화살이 집중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자를 넘어트리면 교회를 일거에 무너트릴 수 있기에 사탄은 목회자를 노린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대부분 어떤 사연을 통해서든 지도자를 공격하는 것이다. 목사도 혼자 설 수 없다. 붙들어 주는 아론이 필요하다. 목사는 기도 많이 하니까, 그는 남을 위해 기도하는 자니까 든든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목회자야말로 가장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담임목사를 위해 기도해 달라.

구역장도 혼자 설 수 없다. 붙들어 주는 훌이 필요하다. 구역장이니까, 책임자니까 알아서 할 것이라고 손을 놓는 순간 구역도 무너지고, 자신도 보호받지 못한다. 교사도 혼자 설 수 없다. 그들의 손에는 어린 영혼들의 생명이 달려있다. 후원해 주는 기도가 필요하고 붙들어주는 팔이 필요하다.

모세의 팔이 무거워졌을 때, 아론과 훌이 그 옆에서 들어올린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중보기도와 상호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서로 돕고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온전히 이뤄진다.

나아가서 이 전쟁에 나선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만이 아니라, 산 꼭대기에서도 엄청난 영적 전쟁이 벌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육체의 전투는 여호수아가, 영적 전투는 모세가 앞장섰으며, 이것이 이스라엘의 승리가 된다. 즉 이스라엘은 이후로 부딪치는 모든 역경, 전투, 환란 가운데 육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어느 쪽도 놓치지 말아야 함을 똑똑히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에 치우친다. 이건 위험하다. 닥친 일을 해결하려고 애쓰고 힘쓰며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기도밖에 없다고 말하거나, 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기도만이 살 길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더 위험해지면 일어서서 허둥댄다.

둘 다 어리석고 어리석다. 그 기도도 놓치지 말아야 하지만, 땀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한다. 둘은 구분되지 않는다. 기도는 일하는 것이고,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싸우는 것이며, 싸우는 것이 기도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우는 자리에서, 육체의 싸움과 영혼의 싸움은 동시에 일어났고, 그렇게 싸워서 승리하였다. 군대만 있다고 승리하지 못하며, 기도만 한다고 이기지 못한다. 그건 항상 같이 가야 한다.

물론 이건 민족의 전쟁이니 여호수아는 싸우고 모세는 기도했다. 개인의 경우에서는 다윗이 잘 보여준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기도했을까, 싸웠을까? 그의 외침이 이걸 잘 보여준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롸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건 기도다. 기도한 자는 달려나간다. 달려나가는 다윗은 주님의 이름을 외친다. 여호수아의 칼과 모세의 지팡이가 다윗의 물맷돌과 외침이 되었다.

가만히 있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다. 기도만 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자다. 그러므로 달려나가며 기도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달려나가고 모세는 부르짖는다. 그렇게 이겼다.

그렇게 배웠다. 그렇게 살아가라고, 광야길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은 백성을 가르치셨다.

여호와 닛시

이렇게 아말렉과 싸워서 이겼고, 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하였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 나의 깃발’이라는 뜻이다. 전쟁에 패배한 자의 깃발은 땅에 떨어져 뒹굴고, 승리한 자의 깃발은 바람에 펄럭이게 된다. 전쟁 후 깃발은 승리한 자만이 들 수 있다. 이 제단을 여호와 닛시라고 이름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이 일은 애굽에서 나온지 두달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아직 길은 먼데, 처음부터 전쟁을 통해 배우다니, 앞날은 얼마다 더 치열할까?

그러나 하나님의 광야가 그들에게 주는 교훈은, 음식이든 물이든 생존이든 전쟁이든, 그 핵심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치명적인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대한 군대도 아니요, 숙련된 궁사도 아니요, 치명적 전차와 말이 아니라 믿음과 기도라는 점이다.

그걸 쉬지 말아야 한다. 그걸 건너뛰지 말아야 한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손이 내려오지 아니한지라(12)’ 그 손이 내려오지 않아야 한다.

16절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이스라엘이 뭐 한 일이 있다고 이렇게 챙기시는지 신기하다.

언약은 귀하다. 하나님은 손을 들어 기도하는 자를 외면치 않으신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집을 완공한 후 제단 앞에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다.

시편 28편은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말씀한다. 시편 141편은 기도는 주 앞에 분향함이 되고, 손 드는 것은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손을 드는 간단한 행위가, 하나님께 나의 전적 신뢰를 보내는 표시가 되는 것이다.

손을 드는 것은 단순한 예식이나 습관적인 행동이 아니다.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주님만 바란다는 온전한 신뢰를 표시하는 행위다. 그를 높이고 나를 낮추는 모습이 손을 드는 것에서 표현된다.

손을 드는 것은 그를 찬송하는 것이다.

손을 드는 것은 그를 인정하는 것이다.

손을 드는 것은 내가 할 수 없으며, 당신만이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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