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으라

어둠의 세상

미국의 기업인이자 이제 트럼프 정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일론 머스크라는 사람이, 자신의 회사가 쏘아올린 인공위성으로 우주에서 찍은 사진 하나를 공개한 적이 있다. 밤에 인공위성서 찍은 한반도 사진을 보면 북쪽은 검은색인데 비해 남쪽은 대부분 환한 빛으로 밝혀져 있다. 이 사진은 남과 북의 경제 차이를 상징할뿐더러, 제도의 차이를 명확히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인다.

그러나 2024년을 지내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과연 우리가 밝은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땅에 있는 어둠은 다 물러갔는가? 우리는 어둠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지 거의 150년이 되었고, 이제 서울의 밤을 더 이상 어둡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 조명 이야기일 뿐, 세상이 밝은가 어두운가를 묻는다면 전혀 다르다. 특히 2024년이 그랬다.

새해 벽두부터 정치인에 대한 테러가 있었고, 한해의 마지막에는 최악의 항공사고가 났다. 계엄을 비롯하여 한해 내내 평안하지 않았던 한해다.

우리 아이들을 뛰어놀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인들은 나름대로의 삶과 가정과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그저 평범한 한해였을지라도, 한쪽에서는 그런 세상을 뒤집어 어둡게, 혼란하게, 무질서하게 만들려는 악의 세력이 꾸준히 자기의 할 일을 하던 시간들이었다. 악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빛은 그냥 빛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이길 때라야 빛이 된다.

어둠의 세력은 끊임없이 세상을 집어삼키려고 활동해왔다. 단지 지금의 상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자체가 빛과 어둠의 투쟁기와도 같다.

70년 전에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에 휩싸였었다. 그러나 그 기쁨의 시간에도 친일파들을 비롯한 악과 어둠에 속한 자들은 세상을 속이고 자기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았었고, 실제로 그들의 세상이 한동안 지속되었었다.

500년 전 루터가 중세의 위압적인 예배당 건물들과 그물처럼 촘촘하게 얽혀있는 종교 세력들이 감춰두고 가려놓은 성경의 빛을 발견하였을 때도, 그의 목숨을 위협하고 어둠을 내주려 하지 않던 세력들은 결코 만만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어둠은 그런 적이 없다. 어둠은 끈질기다.

2000년 전 광야에서 외친 세례 요한의 외침은, 어두운 세상에 빛이 오신다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1장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정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빛을 기뻐하지 않는다. 헤롯은 왕으로 나신 이를 죽이려 했고, 지식인들은 예수의 말에 귀를 닫았고, 민중들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민중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편일까? 그런 적은 없다. 사람은 항상 자신들의 편일 뿐이다.

4000년 전 하나님께서 바벨론 지역 출신 아브라함을 불러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삼으시고 열방의 복을 선언하셨다. 그들을 애굽에서 양육하시고, 홍해를 통해 구원하시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선전할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기대를 배신하였다. 세상은커녕 유대인들만 구원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빛과 어둠의 갈등은 단순히 어느 민족이나 어느 시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싸움이요, 심지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 갈등의 현장에 계셨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이다. 창세기는 첫 부분부터 빛과 어둠의 세례를 조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토록 오래된 빛과 어둠의 갈등, 싸움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빛이 있으라

성경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해석하기 쉽지 않다. 땅이 혼돈하다는 것고 단순히 땅과 바다에 관한 서술은 아닐텐데, 땅이 공허하다고 묘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뿐 아니라,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의문에 빠질 여지 없이 하늘의 소리가 들린다. ‘빛이 있으라!‘ 그렇게 빛과 어둠이 나뉘어졌다. 어둠을 향한 빛의 도전과 빛을 향한 어둠의 항전의 기원은 태초부터다.

이 구절들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밝고 어두운 것들을 표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은 넷째 날에 만드셨다. 창세기의 기록이 시간별 관찰일지는 아닐 것이지만, 적어도 첫째날에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는 것이 태양이 비추고 불꽃이 만들어내는 가시광선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창세기 첫 부분에서 나뉜 빛과 어둠, 낮과 밤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와 그 밖의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베드로서에 선언한 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하신다는 말씀을 통해 나타나며,

예수께서도 가르치시기를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밤과 낮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러 하시는데 제자들이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물을 때 대답하신 말씀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성도들을 권면하기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믿음 뿐 아니라 삶 자체가 빛과 어둠 가운데서의 투쟁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이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영적 싸움과, 공중 권세 잡은 사탄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은 옳음과 그름의 싸움이요,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요, 하늘과 땅의 싸움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아직 그리스도인을 향한 전투 종료의 나팔은 울리지 않았다.

어둠은 물러가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들은 더욱 힘을 내고, 마지막까지 그 준동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나라는 어디에?

여기까지 준비한 설교말씀을 내가 다시 들여다보면서 든 생각은, 사람들은 이런 말씀이 쓸데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삶은 이대로 혼란하며, 세상은 이대로 지속될 것이라는 말이 현실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구나 송구영신 예배 시간에 공연히 힘 빠지는 말 대신에, 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꿈꾸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다. 이건 2002 월드컵 축구 패러디가 아니다. 현실이 그렇다. 세종대왕이 민초들도 글을 아는 나라를 꿈꾸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한글이 없었을 것이며, 스티브 잡스가 모바일 혁명을 꿈꾸지 않았더라면 아이폰 세상은 없었을 것이다.

현실의 대한민국도, 나라다운 나라를 꿈꾸는 이들,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는 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혼란스럽고 가난한 나라들과 별 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라다운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이 나라가 이만큼까지라도 온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꿈꾸는 자들의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 나라를 꿈꾸게 하셨다. 그 나라의 꿈을 함께 꾸고, 만들어 갈 사람들을 제자라 하셨다. 우리를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셨다. 그 나라를 꿈꾸며 십자가의 길을 오르셨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지 않는 자는, 예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할까? 성경이 약속한 그 나라는 세상에서는 이뤄지지 않을 나라일까?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을까? 우리들이 땀 흘려 수고하는 것, 머리를 짜내어 연구하는 것, 차가운 겨울에 촛불을 들고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들이 다 살기 좋은 나라,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라, 평화롭고 부유하며, 도둑과 강도가 없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나라가 존재할까? 그런 나라를 흔히 유토피아라고 부르는데, 어디에 있을까? 꼭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인류가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의 지성으로 불가능할까?

수십년 전에 어느 가전 기업이 발전된 기술에 힘입어 주부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는 이미지와 함께 ‘우리의 기술이 유토피아를 만들어간다’고 선전했는데, 과연 가능할까? 인간은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고, 모든 인류가 과학문명의 혜택을 입어 고루 잘 살게 될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사실 너무 뒤늦은 질문이기도 하다. 인류는 19세기에 벌써 그런 질문과, 그런 기대를 했었다. 현대금의 변화가 급속하다 하지만, 변화의 질이 19세기만 한 세상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캄캄하던 세상에 전구가 발명되었고, 파발마나 봉화로 소통하던 세상이 전신을 통해 눈 깜빡 할 사이에 소통하게 되었고, 소달구지나 마차가 다니던 길에 기차가 달리며, 자동차가 발명되던 시대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비행기가 발명되어 사람이 하늘을 나는 꿈을 신현시켰다. 스마트폰이 대단하다지만 스마트폰은 전화가 진화한 것이다. 전화 자체가 발명되었을 때의 놀라움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지성과 과학문명으로 지구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무참히 깨졌다. 깨질 정도가 아니라, 인간은 그런 유토피아의 세계를 만들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과학기술을 동원한 최신 발명품은 항상 무기로 사용되었다. 다이너마이트는 산업용으로 개발되었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가 되었고, 비행기는 인류의 꿈을 이루며 신속한 여행의 용도였지만, 곧 전쟁에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이 동원된 핵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발전된 화학지식은 오시비엥침의 가스실에서 더 효과적으로 육백만의 생명을 삼켰다.

사실 유토피아는 없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16세기 작가 토모스 모어의 소설 이름이자,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섬나라의 이름이다. 그 나라의 경제는 공유경제이며 정치는 민주주의이며 교육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이며 하루 6시간의 노동과 공공주택이 보장되는 나라다. 16세기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복지를 향유하며, 이상적인 나라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는 단어가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는 없는 나라다. 소설 속의 나라이기에 없는 나라가 아니라, 그 이름 자체에 그 뜻이 들어있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없다라는 뜻의 우(ou)라는 단어와, 장소라는 뜻의 포토스(pottos)라는 단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다. 유토피아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

왜 없을까? 사람이 꿈꾸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스리기 때문이다. 거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빛의 나라

정말 모순인 것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뿐 아니라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이 모순에 대해서 세상은 세상이 본래 그러니 참고 살며, 서로 돕고 살라는 조언 밖에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빛이 하늘에서 비춰지며,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온 세상에 퍼진 것이다.

사60:1-3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 말씀은 단순히 나 한사람에게 임한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세상, 하나님의 빛이 세상을 비추는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나라에 대한 계시록의 예언은 빛으로 가득하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밤이 없는 나라. 이 말은 계시록에 가득한 상징적 언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도 알아듣기 어렵지 않고 해석하기 껄끄럽지 않다. 더 이상 밤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이 준동치 못하는 나라를 이해하는 것은 쉽다. 서로 해치지 않는 나라, 속이지 않는 나라, 빼앗지 않는 나라, 감추지 않는 나라다. 그런 어둠속의 일들이 없는 나라다. 오히려 서로 돕는 나라, 서로 기뻐하는 나라, 서로 돌봐주는 나라다. 무기를 쳐서 보습을 만들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나라다.

막연히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신기루와 같다. 어딘가 있을 것 같지만, 인류는 한 번도 그것을 실현한 적이 없다. 다만 이 나라는 꿈속의 나라가 아니다. 아니, 이루어져야 한다. 유토피아처럼 없는 나라를 꿈꾸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런 나라였음 좋겠다. 하늘이 파란 나라였음 좋겠다. 어딘가는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갈 수 없는 나라도 아닌, 현실 속의 나라였음 좋겠다.

그 나라는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성경 속에서 튀어나와 나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영향을 주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줄 수 있는가?

답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임했으면 좋겠다. 이 역사 도둑들이 판을 치고, 얼굴 두꺼운 자들이 활개치는 대한민국에 하나님 나라가 들어섰으면 좋겠다. 예수의 재림 후에 이뤄질 영원한 왕국 말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이 세상에 그 나라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어떻게 임하는가

왜 세상에 전쟁의 소식, 약탈의 소식, 사기꾼들의 소식, 국민의 이름을 팔아 홀로 부귀영화 누리려는 자들이 그치지 않는가? 저들을 쫓아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이유 한 가지가 있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니 쥐가 들끓는 것이다. 어둠을 몰아내지 아니하니 어둠 속에 숨은 자들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 밥버러지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그런 자들이 얻을 것이 없는 세상을,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다.

본래 빛이 비치면 어둠이 물러간다. 어둠과 함께, 어둠 속에 거하던 것들, 어둠을 좋아하는 것들이 물러간다. 언젠가 이사간 집에 바퀴벌레가 많았다. 어두운 밤에 밖에서 들어와 거실 불을 켜면, 바퀴벌레들이 마구 흩어지면서 도망을 갔다. 빛 자체가 무섭다기보다, 빛 아래에서는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움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의 천만 그리스도인만이라도 각자의 삶에 깃든 어둠의 힘을 거절하고, 빛을 들고 세상으로 나서야 한다. 여의도에 모여든 수백만의 무리들, 그들 손에 들린 빛이 세상을 밝히듯,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빛을 들고 세상에 나서면, 이땅의 그리스도인 천만 명만 예수 닮은 생각, 예수 닮은 행동, 예수라면 했을 판단과 선택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의 어둠은 예수의 빛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요1:9-1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그렇다. 그 나라는 장차 올 나라이지만, 지금부터 시작된 나라이기도 한 바로 그 나라다.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이다. 우리가 그 나라의 시민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법이 되는 그 나라가 바로 우리들의 나라다.

하나님 나라만이 답이다. UN같은 무력을 갖춘 정치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 빛의 세계는 어둠이 엿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빛으로 불림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려 하심 이외에, 그런 나라를 세상에 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무질서와 혼돈의 나라에서 질서와 공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며 목적지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이뤄질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빛을 세상으로 비추라. 당신의 빛으로 당신 발만 비추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어릴 때, 주일학교 예배가 있던 어느 늦여름 목요일 저녁에 비가 흩뿌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조금은 무서울 정도였고, 나는 예배에 가기 싫어서 어머니를 졸랐다. 바람도 불고, 구름도 끼고, 캄캄해… 그러나 어머니는 성냥 한 갑과 초를 주시며 간단하게 말씀하셨다. ‘예배 빠지면 안돼.’

예배 끝나고 예배당을 나서니 어둡고,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신작로 건너 좁은 논뚝길로 접어들면서 초와 성냥을 꺼냈다. 몇 번 실패했고, 마치 영화처럼 마지막 한 개피의 성냥이 남았을 때 초에 불을 붙였다. 이거 꺼지면 안 된다는 조바심으로 초를 두손으로 소중히 감싸고 논뚝길을 지났고, 마을로 접어들면서 친구 집 앞을 지나면서, 조금만 더 가면 느티나무, 두집만 더 가면 우리집… 하던 순간, 친구 집 앞에 길을 가로지르는 수채, 하수도에 발이 빠져버렸고, 넘어지면서 초도 꺼졌다.

친구 집 앞은 매일 학교 다니는 길이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니는 익숙한 길이었고, 그 수채는 눈 감고도 건너다니는 곳이었지만, 내 손에 든 촛불에만 온 정신을 쏟던 나는 하필 그 수렁에 빠졌다. 어쩌면 그 촛불이 아니었다면 쉽게 집에까지 갔을 것이다. 내 손에 쥔 촛불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손 안에, 품 안에 두었으니, 소용없는 빛이었다. 꺼내어 밝히는 용도가 아니라면 빛은 의미 없다.

우리에게는 내 안에 있는 빛을, 내 발등만 비추면서 살아왔던 때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시절도 거쳐왔고, 이후로도 어떤 세상이 올지 모른다.

예수께서 주신 그 빛을 꺼내라. 나 한 사람 이런다고 세상이 바뀔까 망설이지 말라. 산상수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안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고 하였다. 당신의 빛을 스스로 감추지 말라.

당신이 빛이다

그리스도인이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각자의 직장에서 어둠과 타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란다. 각자의 가정에서도 말씀이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각자의 삶에서 스스로 빛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의 새 아침이라고 해도 사실 삼백육십오일 중의 하루일 뿐이다. 더구나 1월 1일의 해가 아무리 찬란하게 솟아올라도 겨울해는 짧다.

비록 천천히 간다 해도, 빨리 부자 되는 세상은 좀 천천히 온다 해도, 세상이 좀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세상이 좀 평와로웠으면 좋겠다. 세상에 웃을 일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제발 세상을 좀먹는 바퀴벌레 같은 존재들이 사라지길, 눈에 띠지 않길 바란다.

계엄은 국회에서 풀고, 내란 수괴는 경찰이 잡아넣고, 판결은 법원이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일을 하자. 빛을 들자. 그런 한 해가 되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언젠가 빛이 오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빛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빛은 여러분 안에 있다.

예수 말씀하셨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이번에 탄핵 시위가 전세계에 보도되면서 외국의 어느 언론은 이런 구절을 보도했다. 한국 사람들은 세상이 어두우면 집안에서 가장 밝은 것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가지고 광장으로 나가며, 세상을 행진하려는가? 저 삐뚤어진 태극기부대는 이단과 마찬가지니 제쳐놓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 스스로 빛이 되어 세상을 밝히며, 2025년을 밝혔으면 좋겠다.

여러분을 축복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빛으로 빛나는 여러분의 2025년을 축복한다.

결코 어둠과 타협하지 않을, 양보하지 않을, 오히려 더욱 내 몸이라도 태워 빛을 밝힐 2025년에 주님의 은총이, 주님의 평강이, 주님의 사랑과 기쁨이 모든 많은물 가족 위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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