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4일 주일예배 설교

제목: 보시기에 좋았더라
성경: 창세기 1장 3~25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2)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인류 최초로 우주를 비행한 소련의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 가 보니 하나님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 후, 미국의 우주비행사 제임스 어윈은 달 표면에 착륙했다가 돌아와서 말했다.‘우주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들을 수 있었다.’ 어윈이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한 청년의 질문을 받았다. ‘가가린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는가?’ 어윈은 대답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창조의 이야기를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건 의미 있는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사실 나 개인적으로도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영적인 책이다. 과학이 발전되니까 핑계대는 말이 아니라, 이 책은 처음부터 영적인 책으로 쓰여졌다. 이런 말을 하면, 과학적 오류들을 영적 교훈이라는 말로 피해나가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만도 하다. 이런 오해를 가지는 데에는 기독교인들의 책임도 있다. 성경에 써있는 고대인들의 세계관, 물리지식을, 단지 그것들이 성경에 써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치 자연법칙과 수학에 대한 계시처럼 믿어버린 오류가 있다.

해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전1:5)
고대의 사람들은 대개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경에 이런 구절들도 있으니, 이것을 자연법칙에 대한 성경의 증언으로 여겼다. 그래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있는 것을 발견한 갈릴레오를 성경에 어긋난다고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전도서의 그 구절은 과학을 말한 것이 아니다. 전도서가 어떤 책인가? 솔로몬 왕이 나이 많이 들어서 인생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는, 후세들에게 인생의 헛됨을 전해주려고 지은 일종의 산문집이다. 그 앞뒤를 읽어보면 이게 태양과 지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전1:1-11)

이게 전도서다. 여기 어디 지구와 태양의 자전과 공전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가? 물론 한때 교회에서 그렇게 받아들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요, 교회의 오류였다. 교회는 그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겸손하게 성경을 연구하였다. 전도서가 태양계에 대한 책이 아니듯, 창세기도 우주에 대한 책이 아니다.

물론 성경에는 온 우주의 창조에 대한 선언이 있고, 일곱날에 대한 묘사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창조에 대한 정확한 기록으로 믿고 있기도 하지만, 나는, 그리고 많은 현대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창세기의 이 기록이 천지창조 7일, 168시간의 사건기록일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건 우주 만물과 현상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믿음의 사람의 고백인 것이다.

우리들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두고 여러 방향에서 접근한다. 자동차로 예를 들자면, 사람마다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 할 것이다. 전문 레이서나 개발자는 기계적 접근이 익숙할 것이다. 어떤 연료를 쓰는지, 공기저항 계수는 얼마인지, 시속 100Km에 도달하기까지 몇초가 걸리는지, 브레이크는 얼마나 확실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중고자동차 판매상이라면 상품으로서 자동차를 보게 될 것이다. 주행거리가 얼마인지, 사고가 났었는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지가 주 관심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보다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자동차 외형이 내 스타일인지, 색깔은 맘에 드는지. 또, 가족이 함께 타야 하는데, 아이가 있고 가끔씩 어른들도 태워야하니까 7인승은 돼야 하는데, 지금 통장 잔고와 비교하게 될 것이다. 이런건 거의 상관없이 자동차를 거의 인문학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운전습관을 연구해서 교통정책에 반영하거나, 밀리는 고속도로에 사고도 없었는데 왜 자동차가 달렸다가 멈췄다는 반복하는지, 자동차를 가지는 것이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점성술사들은 우주 현상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믿고 연구했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과 현상을 추적하고 있다.

성경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은 영적인 책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왜 비가 오는지에 대해서 궁금했지만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비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의 원인과 결과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런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영적 통찰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은 사람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식으로 단순하게 말해버릴 수 있을까? 인류가 가진 가장 큰 유산의 하나이자, 고전 중의 고전이고, 수십명의 저자가 수천년에 걸쳐 지은, 일관성 있는 주제로 가득찬 이 책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말해버리는 것은 지혜로운 생각이 못 된다. 고대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던 호르메스의 글에서 고대의 유적을 발견한 사람들의 교훈이 우리에게 있다. 고대의 글들은 고대의 문화와 글과 지식과 사상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때론 거기에 역사적 사실이 담겼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도 들어있다.

고구려 시대에 그려진 무용총 벽화가 있다. 무용도와 수렵도가 유명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원근법도 맞지 않고, 비율도 엉망이다. 춤추는 남녀의 팔은 어깨 뒤로 어떻게 그렇게 꺾여있으며, 색깔은 왜 그리 촌스러운지. 호랑이가 도망가는데 꼭 고양이같다. 그런데, 그것을 그림이 촌스럽다고 말하면 자기가 바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게 된다. 고구려 시대의 그림을 보려 한다면, 그 시대의 상징들을 분석하고, 그것이 전하는 바를 이해해야 한다. 그림이니까, 눈에 보인다고, 보이는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을 해석하는 방법과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성경을 읽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다.

창세기 1장의 묘사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고백이다. 물을 다스리며, 태양계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선언이다. 그 운행의 법칙과 그 이합집산의 법칙을 정하신 분이라는 선언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며, 모든 번식의 법칙을 그가 만드셨으며, 모든 생물의 종을 기획하시고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걸 고대의 지식과 언어로 묘사한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바꿔 말해본다면, 하나님은 모든 우주의 물리와 화학과 생물의 법칙을 정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력과 전자기력과 강력과 약력을 정하신 분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창세기의 이 기록이 어떻게 처음 알려졌는지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로 알려주셨을까? 그 계시는 어떤 방법이었을까? 우주가 형성된 백억년이 넘은 모습을 짧게 축약해서 보여주면, 고대의 성경 기록자는 그걸 어떤 언어로 기록하며, 어떻게 묘사했을까? 혹시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에,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땅을 보여주셨는데, 왜 그 바다를 유리바다라고 했는지, 적당한 단어가 그것밖에 없었는지와 비교할수 있을까?

우리 성경에는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의 원문에는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사용하는 NIV 성경에도 하나님이 1절의 천지는 heavens and earth라고 되어 있다. 하늘이 복수다.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 말이 참 기이하다. 옛 사람이 하늘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개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요즘 학자들이 말하는 다중우주론을 펼친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게 하늘을 이렇게 묘사했을까? 그냥 시적 표현에 불과한 것일까? 성경은 우리의 호기심에 불을 붙인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의 한글로 읽는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책이다. 성경이 번역되어서 온 세상 사람들의 문자로 읽을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의 내용까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자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와 관습을 알아야 그들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창조에 대한 것을 믿는다. 그것은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눈이 적용될 수 없다. 과학적 시각, 상식의 눈은 얼마든지 추천할 수 있다. 다만, 창조에 대해서 과학적 시각을 적용하려 한다면, 그 행간을 파고들려 한다면 좀 더 솔직해지면 좋겠다. 성경에 대해서, 이 고대의 문서에 대해서, 이러한 글들을 읽고 해석하는 학문적, 과학적 접근법을 제쳐놓은 채, 제발 ‘내 생각에는…’이라고 우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종교에 대한, 종교 서적에 대한 학문적 접근도 유효할 것이다. 그 시대의 언어와 그 시대의 표현을 제쳐놓고, 특별히 믿음의 눈을 제쳐놓고, 일반 상식을 바탕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 서툰 성경지식이나, 서툰 과학상식은 때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건 비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대해 가지는 가장 빈번한 선입견 중의 하나는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 맹목적 믿음이다. 그렇지 않다. 성경책에는 오류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들으면 화를 낼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가? 항의할 수 있다. 그러나 잠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지만, 인간이 오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기록한 성경에, 그것이 기록되고, 전해지고, 번역되고, 출판되는 중에 몇몇 인간적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3년전, 오후 찬양예배 시간을 할애해서 진행했던 수문앞광장 성경공부 시간에 참석하신 분들은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간단한 것 하나만 소개한다면, 이런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출애굽의 사명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리셨다. ‘내 이름은 여호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이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가 출애굽기 6장에 나온다. 그런데, 훨씬 이전의 이야기를 다루는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부를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 구절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많이 있다. 기본적으로 모든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배울 때부터, 이 성경책의 텍스트는 성경의 기록자가 처음 기록했던 원본과 같지 않으며, 지금도 그 원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것을 안다. 그렇다면,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다고 말씀한 것이 거짓말이란 말이냐? 그렇지는 않다. 오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성경이 완전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완전성은 문자나 언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문자나 언어는 틀릴 수도 있다. 베껴 쓰면서 잘못 기록할 수도 있다. 번역하면서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 심지어 일부러 바꾼 경우도 있다. 영어성경에서 하나님은 God이라는 단어로 쓰여있다. 단순번역하면 ‘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용어는 민족과 다른 신에 따라서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도 god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신도 god이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둘이 다르다. 예외는 있지만, 우리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이방들이 섬기는 존재는 ‘신’이라고 번역해놓았다.

누구도 이 가죽책이, 그 인쇄물이 완전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성서공회에서만 성경을 찍어냈는데, 출판사에 판권을 주어서 각 출판사에서 성경을 찍어내기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는 컴퓨터 문서로 되어있지 않았고, 옛 인쇄방법으로 성경을 찍어냈다. 이 두꺼운 책에 대하여 교정을 보아도 출판사마다 인쇄 과정 중에 오탈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로 나온 성경에서 잘못된 글자를 찾아서 제보하면 보상도 해 주었던 기억도 있다.

성경의 완전성은 문자나 언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구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세례 받을 때에, 다들 세례문답 책자를 통해 이 구절을 읽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는 세례 받는 분에게 요리문답 책자를 드렸고, 읽도록 했었다. 그 책에 기록되어 있듯,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믿음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성경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이것이 성경의 완전성이다. 또 계시된 말씀이나 모순 없는 논리로 추론한 결과,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과 관련되 그분의 뜻이 온전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완전성이다.

창조(바라)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 단어가 성경에 또 쓰인 곳이 있다. 선민을 만들어내신 것이 창조였고, 죄인을 새롭게 하는 것이 창조였고, 구원사역에도 같은 단어가 쓰였다. 다시 말해서 이 창조, 바라는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사역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단어인 것이다. 그것은 곧 다스리심, 섭리로 이어진다.

창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시편 121편에 기록되어 있는 그 구절,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는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가? 해와 달이 우리를 해치다니, 미신이요 비과학적인가?이 구절은 한낮의 태양이 발하는 자외선과 우주를 넘어 날아오는 미립자가이 너를 해치지 않으며, 달의 인력과 그로 말미암은 밀물, 썰물, 조수간만의 차가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라고 바꿔야 할까?

이 시편의 낮의 해와 밤의 달 이야기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며, 창세기도 그의 권능과 다스리심을 말하기 위함이라는 면에서 같은 구절들이다. 이런 성경의 기록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도 중요하다.

고대의 사람들은 수많은 두려움에 둘러쌓여 있었다. 밤을 두려운 것으로 여겼으며, 자연조차도 진노하면 사람을 삼켜버리는 괴물이었다. 특히 사람들은 신들을 두려워하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제멋대로 장난치며,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놀던 존재였다. 신들도 사랑하고 증오하고 싸움하며, 툭하면 분노한다. 근친상간은 기본이다. 그리스 로마뿐 아니라 이른바 중동지역의 신들의 이야기가 거의 그렇다.

가장 오래된 창조이야기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의 에누마 엘리시의 기록은, 신들의 세계에 대한 고대인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바다의 여신 티아맛과 그의 남편 강의 신 압수는 그의 자녀들이 고요함을 방해하자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 사실은 알아낸 현명한 신 이아가 주문을 외워서 강의 신 압수를 죽인다. 티아맛은 새 남편인 킹구과 함게 전쟁에 나섰는데, 이때 이아의 아들인 태풍의 신 마르둑이 나서서 티아맛을 죽인다. 마르둑은 티아맛의 시체를 둘러 갈라 하늘 위의 물과 땅 밑의 물로 갈라놓는다. 또 마르둑이 해, 달, 별 등을 만든다. 그리고 티아맛의 새 남편인 킹구를 죽이고, 그의 피를 진흙과 섞어서 인간을 만든다. 인간은 그의 신전에서 일하는 신들의 노예다. 여러 신들은 마르둑이 인간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쉬게 되었기에 마르둑을 찬양한다. 이게 중동지역의 창조신화 중 하나다. 이 이야기에 나타난 신들의 세계는 아침 TV 막장드라마 이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보다 에누마 엘리시가 먼저 기록되었다고도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과 비교해서 무엇이 우선이며,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어떻게 변형되었는 학자들의 영역이지만, 에누마 엘리시의 이야기 속의 메시지가 있다. 인간은 신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들은 싸우고 바람피다가 서로 죽이고 그 시체로 세상을 만들었고, 인간은 노예로 써먹으려고 만들었는데, 당연히 인간은 귀한 존재가 아니며 악한 본성을 지닌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인간이 서로 정복하고 빼앗으며, 세상이 항상 다투는 것은 본래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경의 선언은 아름답고 명확하다. 하나님만 참 신이시다. 다른 신의 존재는 의미 없다. 하나님이 자기 모습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다. 지극히 사랑하셨고, 돌보신다. 악에 빠져 죽게 되자, 자기 아들을 보내서라도 구원하실만큼 사랑하신다. 그가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가 천지를 지으셨다. 그가 세상을 아름답게 보존하실 것이다. 이것이 고대의 신화에 대응한 성경시대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창조 이야기를 과학시대의 용어로 바꿔보니 재미가 들려서 또 이렇게 생각해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주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으로 백억년 이상의 세월에 걸쳐,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얼마만큼인지 가늠되지 않을 시간, 어쩌면 며칠 되지도 않을만큼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명령하자 빅뱅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별들이 나뉘어지고 뭉치며, 새 별이 폭발하고 헌 별이 블랙홀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에 들었다. 우주와 생물을, 나무와 풀을, 새와 물고기와 짐승과 곤충과 곰팡이와 미생물과 모든 생명을 의도하셨고, 명령하셨고, 그의 뜻대로 되었다. 인간까지도.’

이렇게 창세기를 읽는다면, 이 얼마나 명쾌하고 아름다운 선언이겠는가? ‘과학적’이라는 말은 자칫 환상을 만들어낸다. 과학적이라는 말은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기보다는, ‘체계적이다’는 말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진짜 과학적이려면,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송두리째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뉴턴이 뒤집어진 것처럼, 아인시타인이 뒤집어진 것처럼 지금 내가 알고 생각하는 태도 자체가 허물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과학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른바 과학철학자들조차도 정의하기 힘들어 한다.

조금 더 따져보고 말씀을 마치려 한다. 창세기 1장이 마쳐질 때까지는, 이런 논의들과 함께 가야 할 것 같다. 물질세계의 이면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과학의 영역 너머에 있다. 거대한 우주론이나, 미세한 입자론이라도 극한에 이르면 거기는 아직도 철학의 영역과 겹친다.

어떤 과학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다중우주론을 말하면서 한 말이다. 다중우주란 것은, 지금 나와 똑같은 존재가 우주 어딘가에, 혹은 수백 수천도 있을 수 있다는 말로 간단하게 설명하하자. 그런 다중우주란 것이 존재할까? 저 우주 시공간의 어느 뒷면이나 반대쪽에 나와 똑같은 존재가 똑같은 사람들과 가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가능할까? 어떤 학자들, 사이비가 아니라 진짜 물리학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그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거는? 공식은? 없다. 그런데 존재한다고 선언하면 아주 간단하게 이 문제가 해결되니, 이 해결방법이 아름답다고 그 과학자가 말했다. 그렇다고 이 방식이 비과학적이라고 아무도 딴지 걸지 못한다. 실제 최고의 과학자들의 탐구 결과니까.

적대적인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증명해봐’라는 말이다. 그런데 증명이란 것이 뭔가? 어떤 식으로 증명할까? 직접 증명할까, 귀납적으로 증명할까? 예제를 통해서 할까? 아니다, 신 존재 증명은 귀류법적 증명이 제일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칸트의 신 존재증명이 일종의 귀류법적 방식이 아닐까?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누군가가 우리에게 신의 존재를 증명해달라고 말하려면, 먼저 칸트가 말한 신 존재증명이 왜 헛된 것인지를 이해하고 나서야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대개의 사람들은 ‘증명’이라는 말의 의미와 결과에 대해서도 진지하지 못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대해서도 진지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대부분이 요구하는 그 증명은, 과학적 증명이 아니라, 자기가 납득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이다. 솔직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것을 납득할 수 없다. 증명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알 수도 없다. ‘나를 납득시켜봐’하는 당신에게 상대성 이론을 증명해 주면 알아들을 수 있는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납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물질의 기원에 대한 것은 아직 과학적 탐구의 영역 그 너머에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지으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지으신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찬양한다. 다윗은 그가 본 세상을 이렇게 찬양하였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며 우리가 깨닫고 느끼는 것이 이것이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을 지으셨으니 영광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이 시편 8편을 다윗의 눈으로 본 창세기 1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의 고백도 이와 같다. 그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자랑이며, 우리의 기쁨인 것을 믿는다.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