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7일 주일예배설교
제목: 빛이 있으라
성경: 창세기 1장 1-5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첫 음성은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다. 첫째 날의 창조는 빛이다. 빛이 있음으로 어둠이 구별되게 되었다. 빛을 낮이라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셨다. 처음 만드신 이 빛은 우리가 비추는 빛들, 켜 놓은 불과 같은 가시광선이 아니다. 그건 권능이라고 해도 좋고 사랑이라고 해도, 혹은 질서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빛이다. 이로 말미암아 어둠이 물러가게 되는 하나님의 힘이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만, 이 구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이전의 세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였다.
돌이켜보면 처음에 어둠이 있었다. 빛 이전에 어둠 뿐이었는데, 그 혼돈과 공허와 깊은 어둠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 ‘빛이 있으라!’ 그 빛이 있어지자 어둠이 물러갔다. 그러니 그 어둠과 혼돈과 공허는 하나님의 창조의 이유가 된다. 빛은 그것들을 물리치는 힘이며 질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다. 그리하여 빛과 어둠은 나뉘어졌고, 낮과 밤이 구별되었다.
여기서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그 언어의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낮이라고 하면 해가 떠 있는 동안, 밤이라고 할 때는 해가 져서 어두운 때를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가 말하는 창조의 순서를 따른다면 아직 해와 달은 창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넷째 날의 일이다. 즉 해가 떴기에 낮이 아닌, 해가 져서 밤인 아닌, 빛과 어두움에 따른 낮과 밤이다.
저는 창세기에서 창조 날자의 구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년을 365일로 나누고 혹은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 것은 우리 사람의 기준일 뿐이다. 심지어 일년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365.24일 정도 되고, 하루도 24시간이 정확한 것만은 아니다. 태양을 기준으로 한 24시간은 지구가 한 바퀴 돌아서 태양히 정확히 같은 자리에 오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확히 같은 자리에 오는 기준을 훨씬 멀리 있는 별을 기준으로 한다면, 23시간 56분 4초 정도 된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태양을 같은 위치로 보려 한다면 약 1도 정도 더 돌아야 한다. 그래서 태양을 기준으로 한 하루와, 별을 기준으로 한 하루가 조금 다르다. 이런 인간의 시간을 가지고 24시간 하루씩 나누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시간에 하나님의 시간을 억지로 맞추는 것이 될 수 있다.
창세기의 하루는 해와 달과 별을 기준으로 한 우리의 24시간이 아니라, 시간마저 창조하신 하나님의 하루다.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우리의 하루가 다르고, 빛이 있으라는 명령의 그 빛이 우리가 보고 우리가 느끼는 빛과 다른 것이라면, 이 하나님의 말씀, ‘빛이 있으라’는 그 빛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찾아가야 할 것이다.
창세기 첫 부분 말씀 속에서 빛의 의미를 찾는다면, 빛은 어둠을 물리치는 것, 구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빛이 비추자 어둠이 물러갔다. 빛이 비추자 혼돈과 공허가 사라졌다. 하나님의 빛은 어둠을 물리치는 힘이며, 엉클어진 혼돈의 상태를 정리하는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빛은 구별하는 것이다. 혼돈이 물러가고 질서가 찾아온다. 낮과 밤이 구별되고, 혹은 어둠이 밝음을 피하여 숨는다. 빛이 비추고 있다면 어둠이 침범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비추는 세상과 그 빛을 피하여 숨는 세상이 구별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빛은 구별하는 빛이다.
성경은 이런 모습으로 빛이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가득히 담고 있다. 빛은 하나님 자신을 상징한다.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빛을 처음 만드셨고, 그 빛을 빛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래서 그 빛은 상징한다. 빛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내고 빛은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있다. 그래서 요한1서는 빛을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요한1서: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의 빛은 등롱 안에 갇힌 빛이 아니다. 좁은 방안만 비추는 작은 불빛도 아니다. 빅뱅의 씨앗, 공간과 중력에 갇힌 빛이 아니라, 살아있는 빛,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비춰서 그 힘을 드러내신다. 비춰서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태초에 어둠을 다스리신 방법은 그 어둠 자체에 손을 댄 것이 아니라, 빛을 창조하신 것이었다. 빛을 창조하시어 비추시자 어둠이 물러갔다. 태초의 어둠 뿐 아니라 혼돈과 공허에도 빛이 비추었고, 그 혼돈과 공허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에 들어왔다.
빛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권세의 상징이다. 어둠이 빛을 피하여 숨는 것처럼, 하나님이 빛을 비추실 때에 세상의 혼란이 잠잠해시며, 마귀의 준동이 멈추며, 어둠이 내리면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인간 세상의 온갖 추악한 것들이 설 곳을 잃게 되낟.
사람들은 종종 세상이 더럽다, 정치가 더럽다, 경제가 부패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 자체가 악한 존재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무엇을 고칠 수 있을까. 법을 더 많이 만들고 더 엄하게 처벌할까? 세상에 악인이 존재하는 것은 법이 허술해서가 아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똑같은 헌법과 법률 아래서 우리가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법의 이름으로 공의와 성실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법의 그늘과 허점을 찾아다니며, 탐욕을 불태우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빛은 단순히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만 하는 도구는 아니다. 하나님의 빛은 온 세상의 악과 불평등과 속이는 것들과 탐욕들과 썩어 버려지는 것들을 수술하는 수술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빛을 단순히 내 행복, 나의 구원만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세상에 하나님의 빛이 비춰져야 한다. 이 민족에 하늘의 빛이 비춰져야 한다. 이 시대에 진실의 빛이 비춰져야 한다. 그래서 어둠을 구별하고, 어둠을 몰아내고, 불의와 악을 구별해야 한다. 그 빛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빛이며, 그 빛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야말로 세상을 고치고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 물론 믿음을 자기 성공, 자기 출세의 도구로만 삼은 가짜 예수쟁이들은 말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과 교회의 명패를 팔아먹는 정치 목사들도 말고, 이땅의 순전한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말씀을 심장에 품은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그들로 인하여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그들로 인하여 세상이 치유되도록, 그런 소망과 꿈을 품은, 그런 빛을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빛은 세상을 비출 뿐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을 비추는 빛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흘리는 눈물을, 그 기도들을 보고 들으신다.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며 고난 당하던 히브리 민족, 그들의 부르짖음을 기억하신 하나님이시다.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서 굴 속에서, 광야에서 찬양하며 기도하며 호소하던 다윗을 들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어둠 가운데, 혼돈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빛을 비추신다. 그 빛은 임재와 동행의 상징이다.
믿음의 조상 라반의 행적 가운데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얍복나루의 광경이 우리에게 생생하다. 예전에 야곱을 죽이겠노라고 칼을 갈던 형 에서가 장정 400명을 거느리고 나온다는 전갈을 듣고 야곱의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자신의 가족들마저 강을 건넸는데 야곱은 그 나루터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다. 그밤에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과 씨름하였고, 하나님은 그에게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 밤은 야곱의 생애 가운데 큰 분수령이 된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았고, 자기가 속았더라면 능히 속일 사람으로 살았고, 빼앗긴 것보다 더 훔쳐버리는 사람으로 살아왔지만, 그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만난 그 순간 이후, 그의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 이제까지 튼튼한 육체를 자랑했던 야곱은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근육과 꾀를 이용해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기도와 순종을 삶의 방편으로 삼게 되었다. 그 어두웠던 밤, 그 치열했던 몸부림의 밤이 끝나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그 나루터를 떠나던 야곱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더라
단순히 하룻밤이 지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둠을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는 한 믿음의 조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제 빛이신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빛과 함께 살아갈 야곱의 미래를 선포하는 듯 하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어둠 속에서, 위기 속에서, 고난 당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비추시는 빛이시다. 계시록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비추실 마지막 빛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비추심이라.
이 빛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직장 문제로, 혹은 사업상의 문제로, 개인적인 어떤 문제로 하늘의 빛이 필요하지 않은가? 진로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혹은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는 않은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문제의 실마리는 어둠 깊숙히 숨어있고, 헛된 걸음과 낭비되는 시간들로 인하여 행복해야 할 삶이 원망으로 변해가는 바로 지금 당신의 자리에 하나님의 빛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 비참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시인은 부르짖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 43편의 저자처럼, 그 빛을 요청하라. 하나님의 빛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다. 하나님의 빛은 어둠과 공포와 현실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는 빛이다.
이사야 60장은 말한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빛은 질병을 치유하는 빛이다. 말라기 4장은 말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하나님의 빛은 인생을 고치는 빛이다. 이사야 30장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땅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빛을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땅의 교회들에게 그의 빛과 그의 진리를 보내어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건 단순한 소망, 단순한 바램이 아니다. 공허한 외침도 아니다. 성경 속에만 쓰여진 글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나 존재하는 기대나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인생 가운데, 특별히 인간 세상에 나타날 하나님의 빛이다.
그 빛이 실제로 이땅에 왔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왔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셨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의 오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께서 빛이시다. 각박한 우리들의 삶에, 잃어버린 인생들에게,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인지, 어디가 진정한 삶의 길인지, 예수께서 빛이 되셔서 비추신다.
예수께서 살아가시던 방식,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태도, 예수님이 결정하시던 기준들, 예수께서 기도하시던 그 모범들, 율법에 대한 예수의 인식들, 세상에 대한 예수의 사랑, 죄인에 대한 예수의 긍휼,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예수의 진지함과 경쾌함, 그리고 예수의 죽음,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삶의 기준이며 모범이며 정답이다. 삶의 모호함과 혼란한 세상의 어지러움, 이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신, 진짜 삶의 모범답안이다.
세상에 가짜 빛이 많이 나타났다. 종교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황금의 빛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쾌락의 늪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인생은 한 번 사는 것에 불과하다고 사람들을 속였다. 다 가짜 빛이다. 잠시 반짝이다 꺼지는 반딧불보다 못한 빛이다. 비춰주는 빛 같지만, 사실은 삼켜버리는 악의 빛이다. 예수만이 참 빛이시다. 예수라는 이름, 그의 삶의 우리의 삶을 비추고, 우리의 마음을 비추고, 우리의 영혼을 비춘다. 뿐만아니라 육신과 가정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걸음을 비추신다.
예수의 삶에는 단순히 우리의 죽음, 우리의 구원만을 위한 십자가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구원만이 필요했더라면 십자가과 사흘의 시간이면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예수의 수많은 말씀들, 삼년동안 키워낸 제자들, 함께 어울리며 음식을 먹었던 세리와 죄인들과의 자리들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합하여 예수의 삶이다. 그 모든 삶이 우리에게 비추는 빛이며, 따라야 할 모범이다. 예수처럼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정답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공중의 새도 머리 둘 곳이 있지만, 주님 머리 두실 곳이 없었다. 요즘 표현으로는 집 한 칸 없는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행복하고 당당하며 아름다웠던 삶이었던 것을 우리는 안다.
예수님처럼 살라고?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다들 외면한다. 우리들 뿐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바로 그 때에도, 어둠에 익숙한 세상 사람들, 세상에 너무 익숙했던 사람들은 그 빛을 외면했다. 너무 눈부셔서 싫다고 했던 것 같다. 너무 깨끗해서 어렵다고 했다. 고개를 저었고 외면하였다.
요한복음은 그 빛을 외면한 사람들의 모습의 고발하고 있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단순히 영접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거절하였다. 우리는 당신처럼 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렇게 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예수처럼 잦나지면서, 섬기면서, 나눠주면서는 결코 행복할 수도 없고, 그렇게 성공할 수 없다고, 그런 삶은 가짜라고 거절하였다. 우리가 낮아지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겠냐고 거절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부자 되게 하고, 우리를 다스리는 자 되게 하고, 남들보다 높은 명성과 지위를 높게 하려니와, 당신처럼 죄인과 세리와 거지들과 어울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느냐며 거절하였다.
2000년 전 그때부터 거절하였고, 교회가 계속해서 큰 건물과, 화려하고 높은 것들만 추구하며 거절하였고, 성직을 매매하며 거절하였고, 성직을 매매하며 거절하였고, 세상 권력과 힘을 다투고 비교하고 그보다 높이 올라서기 원하면서 거절하였고, 자본주의 시대에는 돈과 친구하며 거절하였고, 말로만 낮아짐과 섬김을 말하면서 거절하였고, 심지어 그 섬김과 낮아짐마저 목표와 성공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예수를 거절하였다.
물론 우리가 다 성자가 아니며, 우리 모두가 다 순교자가 아니며,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예수의 이름 뒤에 숨어서 욕심 부리는 것, 자기 이익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파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내게 비추신 그 빛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예수를 통해 내게 비추신 그 하나님의 빛, 그 창조 때부터 있었던 그 빛에 대하여 반응해야만 한다. 이 빛은 창세기 1장의 책갈피 속에 갇혀 있는 빛이 아니다. 고대의 빛, 신화의 빛, 책 속에 기록된 태초의 빛으로 멈추고 박제된 빛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씀 속에서 튀어나와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비추고, 인생들을 비추는 빛이다. 그 빛이 조상들을 비췄고,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췄고, 갈릴리 땅에서 신음하던 자들에게 비췄고, 중세기의 암흑을 비추었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걸음을 비추는 빛이다.
이 창조의 빛은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들에게, 말씀 속에서 튀어나와 우리의 영혼을 지금 비추고 있다. 고전4장은 말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제 창세기 1장의 빛은 곧장 우리 마음에 각자의 영혼을 비추는 빛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옷을 입은 자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빛이다. 우리들 속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게 해야 한다. 우리 속에서 세상 어둠의 힘이, 혼돈의 힘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그 빛이 비춰져야 할 것이다.
세상은 여전이 어둠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그방식이 통용된다. 혼돈을 불러 일으켜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 남을 넘어뜨려 자신의 발판으로 삼는 악인들, 삶은 어차피 경쟁이라고 말하면서 욕심과 탐욕을 합리화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폭력은 여전히 유효하고, 돈은 여전히 세상의 진리다.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들이 땅값, 집값 박에 없고, 뉴스와 포탈은 어둠의 뉴스들로 가득하며, 모여서 의를 말하는 사람들을 낯선 사람들, 순진하여 물정 모르는 사람들로 취급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빛의 자녀들이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에베소서는 말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사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만 바라보면 된다. 그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세상의 비정한 언어로 말하지 말라. 세상에서 배운 언어를 버리라. 그리스도인의 언어를 말하라. 그렇게 빛의 사람이 된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돈으로 평가하지 말고, 지식으로 구별하지 말고, 신분으로 판단하지 말라. 보수인지 진보이지도 중요하지 않고, 내 편 네 편을 말할 것도 없다. 오직 정직과 의로움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것이 빛의 사람들의 기준이다.
함부로 인생의 불행을 말하지 말며, 가볍게 인생을 말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옳다. 그런 잘난체 하던 대화들은 하늘의 빛이 우리에게 비취지 않던 어둠 시대의 일이다. 우리는 빛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예수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이다. 다시는 어둠의 사람들처럼 인생을 평가하거나 말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든 우리를 볼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비추는 빛 때문에 예수가 발견되어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하늘의 빛, 창조의 빛을 비춰주시는 하나님의 소원이며, 그 소원을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바 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빛의 도구로 삼은 존재들이다. 내가 빛을 만든 것은, 너희에게 내 빛을 비추어 그 빛으로 세상에 전달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시대가 험하다. 전염병의 폐혜가 극심하지만, 언젠가는 극복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닫힌 마음, 헝클어진 세상의 혼돈과 공허를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더럽혀진 교회의 이름과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이웃을 돌보지 않던 가짜 믿음들이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무엇이 다를까? 세상이 혼란하다고 그리스도인마저 흔들려서야 되겠는가?
이 가장 어두운 때야말로, 혼란한 때야말로,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이 시대야말로 하나님의 필요한 때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얄팍하게 감추고 있던 속사람이 드러난 이때가 진정 주의 빛이 제 기능을 해야 할 시점이다.
롬13장은 말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하나님의 빛이 세상에 비추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비추시는 빛은 의로운 해, 의로운 빛이다. 그 빛이 세상에 비춰져야만 한다.
가끔씩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어두우니까, 다 이리오라, 너희가 빛 가운데로 나오라고 말하는데, 그건 빛을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다. 빛을 비추는 것은 주님처럼 하면 된다. 예수의 방식이 옳다. 빛을 들고 찾아가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을 보라. 그 시대의 부자, 지식인들이 아니었다. 소외된 자들, 어둠 속에 있었던 사람들,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것이 주님이 빛을 비추시던 방법이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의 집에 가셔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다.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셨다. 그것이 주님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방식이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나누는 삶, 그것이 빛된 삶이다.
창조의 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으며, 아직 멈추지 않았다. 그 말씀을, 예수를 통하여서 지금 우리를 비추는 빛이 바로 처음 하나님이 만드셨던 진실의 빛이다. 그 빛의 사람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어둠이 감히 대들지 못하도록. 모든 혼돈과 공허가 세상에 넘치더라고 그 빛이 드러나는 순간 다 숨게되는 그런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면 좋셌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품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 어둠들이 숨도록, 물러가도록, 빛이 있는 곳에 다시는 깃들지 못하도록 그런 빛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 빛을 위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나의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