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4일 설교말씀

제목: 태초와 창조
성경: 창세기 1장 1-2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지금 가장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말씀 한 구절을 우리가 보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에서 본격적인 세상의 창조에 대한 기록은 1장 3절부터 시작된다. 1절과 2절은 서론격이다. 지난 주에도 서론격인 말씀들 드렸거니와, 그건 성경과 창세기 전체에 대한 서론격의 말씀이었고, 오늘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기사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1절과 2절을 생각해본다.

1절에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단어 하나는 ‘하나님’이다. 그것은 이 문장에서 설명되지도 않고,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책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한 책일 뿐이다.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하신 말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1절에서 설명이 필요한 단어는 ‘태초’, ‘천지’, ‘창조’의 세 단어다.

태초

태초라는 말은 ‘맨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태초는 세상의 처음인가, 시간의 처음인가? 시간은 어디서 왔나? 아니 시간이란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영원 전부터 있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에 비추어 본다, 시간의 처음이 없어야 하지 않은가?

여기 중요한 문제에 부딛쳤다. 시간이란 것의 정체가 아직도 정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합의한 시각이 있고, 어느 시점부터의 간격을 재는 단위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정한 단위일 뿐, 시간 자체는 아니다.

플라톤에게 시간은 현실의 것이 아니라, 전정한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했다. 중세 철학자요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은 시간을 인간 정신의 산물로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상과 시간 자체가 창조된 것이라고 보았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시간을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이 만들어낸 도구일 뿐, 물리계에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철학자들의 시간만 말하고 과학적인 정의를 말하지 않아서 불편한가? 과학적으로도 시간은 정의되지 않는다. 시간에 대한 과학자의 우스개소리가 있다. 뉴욕에 이민 온 사람이 길거리에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몇시냐고 묻는다는 것이 영어가 서툴러서 이렇게 물었다. ‘시간이 뭐에요?’ 그러자 그 사람이 조금 당황해하면서 대답했다. ‘시간에 대해서 아시려면 철학자에게 물어보셔야 됩니다. 저는 고작 물리학자거든요.’

아직 과학자들도 시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떤 계산이나 법칙에 단위와 요소로는 사용하고 측정하지만, 시간 자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성질들이 선언되거나 관측될 뿐이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은 시간을 사물의 존재나 변화와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 흐르는 변치 않는 실체로 보았다.

또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 없다. 또, 예전에는 시간은 항상 일정하게 흐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간은 상대적이란 것이 밝혀졌다. 시간이란 것이 관측자의 입장에서 빨리 흐르기도 하고, 느리게 흐르기도 한다. 몇 년 전 국내에서만 1000만명이 관람했던 인터스텔라라는 영화에서는 우주에 잠시 동안 갔다 온 아버지가 자기보다 훨씬 늙어서 죽음 직전에 있는 딸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노벨 물리학상을 탄 과학자가 함께 참여해서 이 현상들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는지를 감수했다. 시간의 상대성 성격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이 외에도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이론들이 있지만, 여전히 시간의 속성에 대한 단편적인 연구일 뿐,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는 아직 없다. 그래서 만약 어떤 과학자가 창세기 1장 1절을 반박하려 한다면 적어도 ‘태초에’라는 말에 대해서는 딴지를 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에 대한 과학적 정의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세기의 태초는 언제인가?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의 첫 글자인 ‘브레쉬트’(בראשית)는 우리가 보고 인식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처음을 의미한다. 그건 다른 용도로는 쓰일 수 없는, 창조의 때를 지목하는 특별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언제인가? 몇 년 전이라고 지목해서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말하고, 과학자들은 지구는 24억년 우주는 138억년이라고 하던데.

우선 현대인들은 대부분 순환적인 시간론보다는, 일직선처럼 일정하게 흘러간다는 데 합의하는 것 같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전제로, 태초의 지점을 두 가지로 가정할 수 있다. 여러분은 태초에 대한 어떤 설명이 맞다고 보는지 생각해 보라.

첫째, 시간은 영원 전부터 있었고, 어느 시점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때를 태초라고 말한다.
둘째, 시간조차 없었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즉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시점이 태초다.

어떤 것이 태초라는 말의 정답이라고 생각하는가? 두 번째 이야기를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오늘날 통용되는 과학 이론에 의한다면 첫 번째 대답보다 두 번째 대답이 더 과학적이다. 공간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고 계산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계의 정론은 빅뱅이론이다. 최초의 거대한 폭발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이론이다. 1927년에 벨기에의 조르주 르메트르가 이 이론의 기초를 발표했을 때에, 과학계는 크게 반발하였고, 르메르트의 의도가 의심을 받았다. 르메트르는 벨기에 카톨릭 대학 교수요 신부였기 때문이다. 빅뱅이 맞다면, 창세기의 선언, ‘빛이 있으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모양이 되는데, 기독교인이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라는 반발이었다. 사실 르메트르는 기독교인으로서 천지창조를 밝혀보려는 시도에서 연구하다가 원시원자가설을 주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이론은 과학적 탐구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지만, 심지어 아인슈타인마저 이 이론을 비판하고 나서자 더 이상 이 이론은 관심을 받지 못하였고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훗날 가모프라는 학자에 의해 다시 정리되었는데, 1949년에 어떤 과학자가 BBC 라디오 토론에서 이 이론을 놀리는 어조로 ‘팽창우주론이 맞다면 태초에 빅 뱅이라도 있었다는 말이냐?’고 조롱하였는데, 여기서 빅뱅이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은 더 발달했고, 수십년에 걸쳐 빅뱅이론을 검증한 여러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받았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 박사 등의 활약으로 인해 빅뱅 이론은 아직 보완할 것은 많지만, 이제 과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그리고 빅뱅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아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우리가 아는 시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빅뱅은 시간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만들어진 일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빅뱅이론은 우주의 시작이 있다는 점을 말하는데,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계산도 가능하다. 그동안 전통적인 과학자의 시선에서는 우주가 영원불변하다고 믿었지만, 최신의 과학은 모든 것의 끝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그 붕괴가 멈춰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종말에 관한 여러 이론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묘한 기시감이 든다. 모든 것의 시작이 있고, 모든 것의 끝이 있다는 말은 성경이 오랫동안 가르쳐 왔고, 과학이 오랫동안 부정해 왔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과학이 시작과 끝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참 아이러니하게, 과학이 발달하다보니, 과학이 성경에 힘을 보태는 경우도 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과학의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니며,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그동안 애써 무시하던 것을 오히려 과학이 설명해 준다고 우쭈주 할 것도 아니다. 과학이 나아가는 길과 성경이 가르치는 길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과학은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갈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나 종교나 둘 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최종지점에서 같이 만나는 일도 생기기 않을까 기대도 된다.

정말 궁금한 것이 있다. 태초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고 기록한 사람은 빅뱅의 이론은커녕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여겼던 시대의 사람인데, 시간조차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기록했을까? 자기가 쓴 글의 내용이 이런 엄청난 것이란 것을 알았을까? 잘 몰랐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로 기록한 것일 뿐일까?

창세기 1장이 결국 과학적 합리성을 띤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찬양하고 전해주는 책이다. 창조의 구체적 묘사는 창세기의 목적이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정의하는 책이다. 그리고 1장에서 살펴보는 하나님의 일은 창조다.

창조

창조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은, 특히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한 것 같다. 창조라는 말을 들을 때에, 곧장 진화의 반대말, 진화와 충돌하는 반대개념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리고 곧장 과학적인 증명, 증거의 문제로 몰아가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대 신화와 바벨론의 창조설화들을 말하면서 성경의 기록과 형성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제시하기도 한다. 길가메쉬 서사시에 기록된 홍수 이야기가 창세기에 기록된 때보다 앞선다는 것을 말하면서 창조 이야기는 수많은 신화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창세기는 진화론을 반대하는 책도 아니며, 중동지역에 흩어져 있는 여러 가지 창조설화들의 짜깁기도 아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에 대하여 반박하는 것은 기독교 과학자들과 문헌학자들의 일이지, 예배와 설교의 기능은 아니다. 창세기 1장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인간의 창조를 이야기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진화론 이야기가 등장해야 하겠지만, 오늘은 본문이 말하는 창조 이야기에 더 집중해 보자.

여기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성경의 세계관이다. 창조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이 모든 것, 천지와 우주와 세상이, 어쩌다가, 우연히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되어졌다는 것이라는 점이다.

히브리어로 무엇을 만든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대표적 단어는 ‘아사’(עָשָׂה)다. 아사는 어떤 재료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쌀을 사용해서 밥을 만들거나, 나무를 재료로 집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대개의 만드는 행위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재료다. 재료가 있어야 결과를 내놓을수 있으며, 좋은 재료라야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

1절에 나오는 창조는 히브리어로 ‘바라’(בָּרָא)라는 단어다. 이 단어에도 만든다는 뜻이 있다. 그런데 창조의 만드는 행위는 즉 ‘바라’는 재료가 없이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을 창조라고 한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 만든 방법과 솜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기자의 고백- 창세기의 사용례- 창세기 1장을 창조를 묘사한 시와 같은 것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거니와, 1장을 읽어보면 이것이 어떤 순서를 말한 것도 아니고, 인과관계를 설명한 것도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창세기 1,2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가득하다.

느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욥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시139: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성경 기자는 하나님의 위엄, 그의 다스리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 고백으로 살아간다. 이 고백은 개인적 신앙의 고백일 뿐 아니라,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사람이 어쩌다가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그 누구도 실수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탄생에 하나님의 크신 계획고 사랑이 있었다는 위대한 선언이 된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창조에 대한 선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그 선언을 오늘 우리가 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지는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풀면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는 것. 조금 더 의미를 덧붙인다면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 사이의 모든 것, 즉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의미다.

창세기는 이 글을 기록하였던 고대인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묘사되었다. 현대인이었다면 다른 용어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주와 생명체를 창조하셨다고 쓴다든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다고 쓴다든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경의 말이 틀린 말이냐? 그건 아니다. 이 구절은 사용된 용어의 과학적 합리성이 중요한 관건이 아니라, 그런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는 바가 무엇이냐가 핵심이다. 그것이 천지든 우주든, 그것이 해와 달이든, 소립자와 블랙홀이든,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그것을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말씀이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반박하면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아무렇게나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창조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증명되는 것만이 존재할 수 있는가? 과학이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 과학이 모든 것을 점검하고 증명하는 도구는 아니다. 과학은 측정하여 정리하는 영역에서 뛰어날 뿐, 증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중력과 전자기력을 측정하기는 해도, 그것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빅뱅의 문제로 우주의 기원을 정리하였지만 아직도 몇 가지 문제를 풀지 못했는데, 그중 하나가 그 빅뱅을 이룬 원시입자가 어디왔는가의 문제다. 아인시타인까지도 정적우주론이라고 해서 우주는 본래 그렇게 있었다고 믿었었지만, 빅뱅이론 이후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게 되었는데, 성경은 예전부터 그 기원에 대해서 말해온 것이다.

이 부분에서, 성경을 과학의 발전에 견강부회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천만에. 기독교는 과학을 독려하며 기대하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서 지성을 주셨으며, 그렇게 발전시킨 모든 과학마저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긴다. 영성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게 하고, 지성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 기독교는 과학을 배척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진화론은 과학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성경과 창조론을 배격하는 근거로 삼는 위대한 과학 중의 하나로서, 정확히는 진화생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진화론의 기초를 놓은 찰스 다윈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윈의 연구는 당시의 신학대학에서 가르쳤던 기독교 이론 중의 하나인 이신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다윈에 관하여 가장 탁월한 연구자 중 한 사람이 데스몬드가 구성한 다윈의 전기에서 다윈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가장 열정적인 유신론자이자 진화론자라고 말하였다. 널리 알려진 다윈의 유언도 성경에 대한 신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었다.

현대의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누구냐를 묻는 설문에 아인슈타인을 제치고 1위에 오른 사람이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아이큐가 190 정도로 추정되는 뉴턴은 케임브리지대 교수였고, 최초로 반사만원경을 발명했고, 미적분학을 발전시키고, 물체 운동의 3법칙을 확립하고, 중력을 수학으로 설명하고, 고전 물리학의 기초를 놓았다. 누군가는 뉴턴을 마법사의 시대를 끝내고 과학의 시대를 연 위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뉴턴의 남긴 저작이 1000만 단어 분량인데, 그중 400만 단어가 신학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뉴턴은 성경을 연구했고, 성경연대기의 전문가였다. 뉴턴은 성경에 비과학적 기록이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비과학적 오류의 연원을 이해하고, 성경이 전하는 진리를 납득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사람은 갈렐레오였고, 왜 어떻게 도는지 이론으로 설명한 사람은 뉴턴이었다. 뉴턴은 천상 과학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성경을 믿었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다. 뉴턴에게 성경은 자신의 과학과 충돌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현대의 과학자들은 우주의 생성이라는 과제에 도전하면서 신을 배제할 수 있는 이론을 찾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나 아직도 우주의 시작에 관해서는 신의 개입을 거절할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아직도 이 영역은 철학과 종교의 자리이다. 오늘날 천문우주학계의 대세는 우주에 가득한 물질, 에테르를 찾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에테르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했던 것이다. 이 과학시대, 우주의 기원을 찾는 일에 2400년 전 그리스의 철학자가 무슨 지분이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플라톤은 우주가 에테르라는 물질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고,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에테르를 찾아왔다. 지난 세기에 아인시타인이 에테르의 이론을 추방했지만, 빅뱅이론 이후에 과학자들은 다시 에테르 찾기에 나섰다. 그것을 찾아내면 빅뱅이론이 한층 더 정교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플라톤이 말한 에테르와 빅뱅이론의 에테르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철학적 사유가 과학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탐구하는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과학과 관계없이, 그저 사람들의 빈 마음을 채우는 것 뿐인가? 종교는 철학보다 훨씬 먼저부터 자연의 비밀에 도전해 왔다. 성경은 사람의 탐구욕을 부추키며, 읽는 사람들에게 도전을 불러 일으킨다. 지혜를 주어 하나님의 비밀과 우주의 지식을 탐구하도록 격려한다. 성경을 겉으로 읽은 사람들 중에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비과학적 묘사들과 오류들로 인해서 고개를 돌리지만, 제대로 읽고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책이며, 심지어 인간에게 하늘에 이르는 지혜와 통찰을 주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과학의 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해 관심도, 기대도 많다. 하나님은 어느 지점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며 도우실까? 이런 과학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미래과학자 커즈와일은 2050년이면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로 다운받을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는데,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기억으로 감정과 영혼이 복제될까?

이런 과학적으로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성경의 신비는 과학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그 베일을 벗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고대의 문자와, 고대 중동지역의 문화와, 옛 사람들의 미비한 과학지식에 가려져 있던 하늘의 비밀들이, 성경 속의 지식들이, 과학의 힘을 빌려 제 목소리를 들려줄 때가 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마음이 가득하다.

창조론이라는 말은 현대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적어도 창세기의 저자는 창조론을 말하지 않았다. 진화론이야 주장된지 겨우 160년 되었을 뿐이고, 진화론에 비추어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론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오늘날 과학계에서 말하는 진화론의 대척점에 선 창조론과도 전혀 다르다. 2절만 보아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창조가 얼마나 범위 넓은 이야기인지 짐작할 수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엿새 동안 일어난 창조과정에 속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창조 직후, 첫째 날 빛의 창조 이전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 상태는 아직 질서가 부여되지 않았으며,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상태였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말은, 아직 땅으로서의 형체를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는데, 땅과 바다와 하늘과 공간의 구별이 없었고, 다만 물질의 기초를 이루는 것들만이 엉켜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제 본격적인 창조가 시작될 참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혼돈과 공허를 명하여, 질서와 충만으로 바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시편 19편에서 시인은 노래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 바란다. 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기 바란다. 우리의 삶을 지으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