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 설교말씀

제목: 태초에
성경: 창세기 1장 1-2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오늘부터 창세기 강해를 시작한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해왔고, 언젠가부터 꼭 이 말씀을 같이 나누기 원했다. 알다시피 성경은 일종의 총서다. 66권의 책이 모여서 한 권을 이룬 종합서적이다. 수십명의 저자에 의해, 수천년 동안 기록된 글들이 모여서 이 책을 이루었다.

창세기는 성경의 첫 책이다. 성경으로 묶여진 순서로서도 첫 책이고, 그 안에 기록된 역사들의 시대순으로 보아도 첫 책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천지의 창조부터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가 첫 책이라고 해서 가장 중요한 책인 것은 아니다. 성경에 66권 중에 가장 중요한 책이란 것은 없다. 사람마다 귀히 여기는 책이 있지만, 66권의 가치는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제일 많이 보게 되는 처음 책인 창세기와, 신약의 첫 책인 마태복음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읽다가 그만둔 경험이 제일 많은 책도 아마 창세기와 마태복음일 것이다.

창세기의 강해에는 몇 가지 특별한 의미가 담길 수 있다. 첫째, 창세기가 성경의 첫 책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둘째, 창조와 진화의 첨예한 대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보게 될 것이다. 셋째,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기대하면서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동시에 걱정도 있다. 창세기를 강해하면서 혹시 곁길로 샐 것을 염려한다. 창조와 진화를 말하면서 어설픈 과학지식들을 늘어놓기만 하는 것도 싫고, 믿음이라는 말로 이성과 논리를 무시하는 태도도 원치 않는다. 나는 목회자요, 설교자일 뿐이다. 과학자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 말씀을 나눌 우리 성도들은 창조론 강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니라 예배자들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여 설교자로 삼으신 것은, 내 지식과 성격과 삶과 기타 나의 모든 것을 이용하도록 당신의 일을 맡기신 것이니, 나 자신의 개인적 특성을 억지로 지우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못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성경에 대하여 신비감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성경에 대한 태도마저 온전히 믿든지, 철저히 거절하든지 양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을 느낀다. 사실 현대는 여러 방면에서 양극화의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빈부의 양극화, 기회의 양극화는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상과 취향조차도 극단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려하는 것은 믿음조차도 양극화되는 모습들을 본다.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책임에 대해서도 오늘날의 교회는 극단적으로 다른 입장들을 취하며,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도 서로 다르다. 심지어 성경의 해석에서도 다른데, 창조론과 진화론의 입장에 대해서도 신학자나 목회자들뿐 아니라 평신도들까지도 극단적 입장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물론 입장을 유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어떤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적 지식들로 포위된 우리들의 믿음과 성경에 대해서 조바심을 느끼는 경우를 종종 접한다.

과학은 더 발달할 것이며, 사람은 더 많은 설명과 해석을 요구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침묵으로 대답할 수 없다. 나아가 목회자는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응답의 의무를 갖고 있다. 다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치 특별한 성경공부반이 모인 것 같은, 수업 같은 진행은 지양하게 되길 원한다. 우리의 예배와 지금 이 설교말씀은 이미 믿는 사람들의 고백 위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전체적인 윤곽을 조금 더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창세기를 본격적으로 읽어가기에 앞서, 성경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앞으로 주일예배마다 이어질 창세기 강해의 서론격이 된다.

창세기라는 이름은, 이 책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본래 이 책의 이름은 창세기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이 책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 책은 본래 하나님의 책인데, 제목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제목을 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성격을 제한하거나,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과 일에 쓸데없는 사족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다른 책들에도 마찬가지여서 출애굽기나 레위기, 민수기와 신명기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구별해서 말할 수 없다. 무슨 책을 가져오라는 이야기를 제목 없이 하기 힘들다. 그래서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책에 나오는 첫 번째 단어로 이름 대신 불렀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원문 첫 단어는 ‘브레쉬트’인데, 번역하면 ‘태초에’라는 의미다. 유대인들은 이 첫 단어를 책 이름처럼 사용하였다. 이것이 다른 언어권으로 넘어가고 전해지면서 ‘창세기’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뿐이다.

즉 ‘창세기’는 본래 이 책의 이름이 아니었다. 실제로 천지창조의 이야기는 전체 50장 중에서 1장과 2장에만 등장한다. 그럼에도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이 책을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강렬한 대표 인상이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이 창조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또는 창조나 진화에 대한 해답을 줄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름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성경을 보는 태도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사람 이름으로 제목이 붙여진 예언서 같은 경우에는, 처음 읽는 사람이라도 그런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구약성경의 ‘학개서’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선지자 학개는 무슨 말을 했는지 읽어보자’는 태도를 가질 것이다. 이건 열린 태도다. 무엇을 말하든지,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름 자체에 설명이 들어있는 책, 즉 ‘창세기’라는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가지고 읽는 것에 방해를 받게될 수 있다. ‘이게 창조에 대한 책이라구? 맞는가 함 보자’라고 말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들어본 적도 없는 것처럼, 우리의 선입견과 지식을 버리고 순전한 마음으로 읽어갈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 모른 척 읽을 수도 없다. 다만, 그 안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직도 남아있다고 기대하며 읽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성경은 충분히 그렇게 기대할만한 책이다.

어떤 책이든, 책을 읽거나, 읽었던 책을 또 읽게 되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재미다. 재미가 있어야 책을 읽고, 또 읽게 된다. 두 번째는 새로운 발견이다. 귀한 책일수록 처음 읽을 때에는 몰랐던 의미나 교훈을 찾게 될 수 있다. 그것들이 나를 감동하게 하거나 이해하게 함으로 나를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이 책을 두 번, 세 번 읽게 되는 이유가 된다.

성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이, 계획이 담겨있다. 한 번 읽고 그것을 다 깨닫는 사람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혹시 있더라도, 나는 아니며, 우리들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몇 번이고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메시지가 발견되고, 때마다 그 의미가 새로워진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쟁기 끝에 보물단지가 걸렸다. 농부는 그 밭에서 그 전해에도 쟁기질을 했을 것이며, 또 그 전해에도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 보물단지는 오래 전부터 거기 묻혀 있었는데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심지어 그 밭을 농부에게 빌려준 주인도 몰랐던 보물이 그 밭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에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보물단지가 숨겨져있음을 안다. 수십년 동안 이 말씀의 밭을 갈아왔지만, 아직 내가 듣지 못한 하늘의 메시지가 이 책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기대한다. 그렇게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얼마든지 기억한다. 그 보물이 우리에게 어서 쟁기를 들라고 재촉하는 듯 하다.

그래서 다시 순전한 눈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던 아득한 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이 하늘의 메시지를 읽고 듣기 원한다.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기대를 가지고, 순전한 눈과 마음과 귀를 준비하여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이 오래된 말씀으로부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내 형편과 처지와 기대와 기도를 따라 내게 주시는 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창세기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위대한 선언이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아니다.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는다. 성경의 기록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담대히 선언하고,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기록해서 전해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그것도 잘 해석해야만 한다. 내가 찾던 것을 찾으려고 성경을 뒤적이는 것도 성경을 읽는 방식 중의 하나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은,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성경과 나 사이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지 말고, 성경이 주도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그것을 신뢰하는 것이 지혜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앞에 놓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닌데, 성경이 말하는대로 이끄는대로 따라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에 톨스토이나 또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서도 그들의 책이 말하는 것에 일단 의문을 가지고 대하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 기대하고 신뢰하며 책을 읽을 것이다. 그런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이 그들의 책에 권위를 주고 있기에, 우리는 우선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경청하는 태도로 그들의 작품을 읽는 것이다.

책방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을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한두 해가 아니라 수십 년을 두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걸작이라고 한다. 수백년 혹은 수천년을 두고 인류에게 영감을 주고, 계속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책들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톨스토이 등의 작품이 이런 고전에 속한다. 성경은 그런 고전마저 뛰어넘어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말씀드린 톨스토이마저도, 성경을 애독하고 특히 신약성경의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말씀을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경을 마치 무슨 베스트셀러 만화책이라도 품평하듯, ‘한번 읽어보자’는 태도로 대하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가 아니다. 신앙적인 면을 제쳐놓고라도, 인류의 문명과 역사에 대한 경외심으로라도 이 책을 읽는 자는 겸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문명시대에, 특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의 훈련을 받은 현대 지식인들에게 성경의 이야기, 특히 창조와 부활의 이야기가 쉬 납들이 가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사실 이성적 눈으로 본다면 성경의 이야기에는 여러 과학적 모순들이 있다. 이를테면 교회는 지구는 돈다고 주장했던 갈릴레오를 성경에 위반된다고 죽이려고 했었다. 성경에는 해가 지구를 돈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던 갈릴레오가 맞았다. 당시 교회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하였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노벨상 받은 윌리엄 대니얼 필립스라는 물리학자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연구하고,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천문학을 가르치는 어느 교수는 미국 나사의 우주미션 시간배정위원회 심사위원으로도 일하는 사람인데, ‘진화론은 무신론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과학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읽을까? 저만큼이나 배워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노벨상 학자중에도 성경을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성경을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학자 이야기를 말씀드린 것은, 과학과 이성이 성경을 판단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성경은, 특히 창세기는 과학책이 아니다.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시행 매뉴얼도 아니고, 실험 보고서도 아니며, 과정 일지도 아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를 기록하고 있지만, 심지어 그걸 본 사람조차 없다. 창조가 다 끝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셨다. 혹시 누군가 창조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전해주시고 보여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창세기는 우주와 지구의 생성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선언이요 고백이다. 특히 이제부터 면면히 펼쳐질 하나님의 활약, 인간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의 서론격으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하여,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하여 고백하며 선언하는 찬양이다. 즉 창세기 1장은 일종의 시다. 그것도 찬송시라고 할 수 있다. 시라고 해서 허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시는 시의 문법을 가진다는 말이다.

명심보감 효행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詩(시) 曰(왈) 父兮生我(부혜생아)하시고 母兮鞠我(모혜국아)하시니 哀哀父母(애애부모)여 生我劬勞(생아구로)삿다. “시경에 이르기를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으니 아, 애달프다 부모님이시여”
이 구절을 가지고, ‘어떻게 아버지가 날 낳으시냐. 어머니가 낳았지’라고 따지고 들 것이 아니며, 비과학적이라고 딴지 걸 것이 아니다. 동양철학의 입장에서 생명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 될 것이다.

서양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 중에 호르메스의 일리아스가 있다. 아킬레스,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팔리스 등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이 등장하고,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 이야기도 들어있다. 오랫동안 이 이야기는 신화로만 여겨졌다. 근대에 이르러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추적한 사람들에 의해 고대의 트로이 성이 발굴되었다. 고대의 시 속에 담긴 역사적 사실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은 고대의 사람이 당시의 언어와 지식의 바탕에서 시적 언어로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한 것이다. 그 속에 담겨있는 것의 사실성에 대해서 우리의 언어와 지식으로 쉬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과학이 진리와 진실을 알아내는 유일한 도구는 아니다. 자기의 지식과 경험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하늘을 재단하는 자는 지금도 있고, 과거에도 있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욥이 자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할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 꾸짖으시며 물으셨다.
욥38:2-3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이라는 믿음의 조상 중 한 사람이 창세기의 이야기를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텐데, 하나님은 ‘니가 창조를 알아?’라고 꾸짖으신다. 욥은 다급히 주님께 대답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지금 읽은 구절의 뒷부분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보면 이렇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본 태도는, 겸손히 듣는 자세다. 지식을 내려놓고, 선입견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 사람이 성경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자세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찾는 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과학자는 데이터 앞에 겸손하고, 연인들은 상대의 말을 존중하며, 개 사육사는 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생물학자는 곰팡이가 하는 말을 들으며, 진리를 찾는 자들은 새로운 것 앞에 걸음을 멈추며,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겸손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신명기는 선포한다.
신32: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창세기든지 신명기든지, 쓰여진 말씀을 읽는 사람이든지 들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든지, 연구하는 사람이든지 묵상하는 사람이든지, 과학자든지 시인이든지, 설교자든지 청중이든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사무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것이다. 은혜는 사모하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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