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0일 주일예배
나의 분깃
시편 16편 5~6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영상: https://youtu.be/zNujRrHFkGM
깻잎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사람만 먹는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거의 먹지 않아서, 어느 탈북민이 깻잎 반찬을 낯설어했다는 글도 보았다. 깻잎은 그 향의 독특함과 강렬함으로 어느 요리사는 깻잎을 향신료라고 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깻잎은 거의 채소 수준인 것 같다. 외국 사람들은 깻잎의 강한 향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고 한다.
한 사람의 입맛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지역과 사람들의 환경적, 사회적 지분이 있다. 오래전에 어느 식당에 갔을 때에, 오래 묵은 전통 된장을 중심으로 짱아치류가 상에 가득했다. 내 입맛에는 완벽한 한 상이었다. 그런데 같이 먹었던 집사님이 말했다. ‘여기에 생선 하나만 있으면 완벽하겠네요.’ 그 집사님의 고향은 섬이었고, 내 고향은 바다가 없는 충청북도였다. 환경이 입맛에 영향을 준다.
우리 교회 옆집에 지율이라는 아이가 부모를 따라 카페에 자주 온다. 부모는 우리 카페 커피를 매우 즐긴다. 지율이는 갓난아이 때부터 커피를 한모금씩 마시더니, 어린이집에 다니는 지금, 제법 쓴 핸드드립 커피를 맛있다면서 홀짝거린다. 말리지 않으면 한 잔 다 마실 기세다. 한 사람의 입맛에는 부모와 주변 사람들의 지분이 있다.
특히 친구들의 지분이 크다. 배하림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반찬을 가리지 않고 먹었다. 그런데 유치원에 입학해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 시작한 즉시 반찬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잘 먹던 반찬을, 다른 아이들의 편식에 영향을 받고 말았다.
특히 미디어 시대, 외식 산업이 팽창한 이 시대에는 광고와 소문이 개인의 입맛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정보를 빙자한 맛집 탐방 TV 프로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돈으로 산다. 내 입맛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전적으로 나만의 것이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그 사람이 만든 음식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한 사람의 입맛에는 사회적 지분이 있다.
한 사람의 입맛 형성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가치관 형성 이야기로 확장시킬 수 있다.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건강을, 어떤 사람은 가정을, 어떤 사람은 돈을 우선시한다. 이른바 천민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돈이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다. ‘행복하려면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가?’라고 바꿔 질문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시대가 되었다.
화폐란 것이 통용되기 시작한 이래로, 돈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의 영화도 그 시대의 황금으로 계량되고 있으며, 예수도 은 삼십에 팔렸고, 중세 때에는 성직마저 돈으로 거래되었다. 대통령 선거공약에 경제발전은 필수항목이 되었고, 정권을 평가하는 데에는 크게는 경제부흥이, 작게는 민생이 가장 큰 기준이 되었다. 모든 정책은 돈이 얼마나 들며, 성과가 얼마나 있는지를 따지며, 아파트든 빌라든 단독이든 먼저 가격을 궁금해하고, 모든 직업은 시급이나 연봉이 얼마인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혹시 누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을 찾아본다면, ‘그거 얼마야?’가 일등일 것이라는 데에 500원 걸 수 있다.
돈이 중요한데, 그걸 따지지 말라는 말이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아니다. 다만, 지금 이런 사회가 정당하냐고 묻기 원한다. 나라라는 것이 본래부터 그랬더냐고 묻기 원한다. 이런 사회, 이렇게 돈만 따지는나라가 된 것조차도, 마치 입맛의 경우처럼 된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오래 전 정동진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1994년 모래시계라는 드라마 이전까지는 시골 한적한 마을에 불과했다. 그 후 관광지로 급 부상하면서 마을 풍경이 달라졌다. 풍경 뿐 아니라 사람도 달라졌다. 당시 이웃으로 살던 어촌 마을 사람들이, 빚을 내서 집을 짓고 장사에 나섰으며, 외지인의 투기 바람이 불었다. 그동안 이웃은 이제 경쟁상대가 되었고 이권과 상권을 두고 다투며 소송하기도 했다. 한 주민은 ‘정동진이 개발되고 나서는 예전 이웃은 다 없어졌고, 경쟁상대로 변했고, 외지인만 가득하다. 옛날 정겹던 시골 마을은 이제 없다.’
달라진 게 정동진 사람들 뿐인가? 사실 이제 전 국민이 이런 상태가 아닌가? 이제 도시생활 접고 귀촌하려는 사람들도 시골 인심 무서워서 꺼리는 세상이 되었다. 돈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감내하고, 돈이라면 사람도 의도 도덕도 버리는 이 시대는 우리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강요된 것인가? 인간이 본래 그런 존재였는가? 혹 누군가의 영향을 받거나, 혹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은 것이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한반도에서 수천년을 살아온 우리 민족은 나라의 모습은 몇 번 바뀌었지만, 고려 이후 천백년, 조선 이후 6백년을 한 나라로 살아왔다. 특히 조선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가장 안정적이고 긴 역사를 가진 나라 중 하나였다.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조선을 우습게 여기지만, 조선은 가장 위대한 나라 중 하나였다.
요즘 학자들이 조선을 주목하는 것 중 하나는, 조선의 ‘의’에 대한 개념이다. 의는 오래 전 중국의 유교에서 제안된 것이지만, 조선은 국가의 기틀을 여기에 놓았다. 왕으로부터 관료들과 평민들, 심지어 노비들까지도 사회를 지탱하는 기준을 ‘의’로 보았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사회를 움직이는 것이 돈 중심이란 것을 부정할 수는 없고, 선비들마저 재테크는 기본으로 배웠다지만, 신분과 부귀의 상관없이 ‘의’라는 것은 이 나라를 관통하는 하나의 규범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의병’이었다. 전 세계역사를 통틀어서도, 백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어선 것은 사례를 찾기 힘들다. 군대가 패배하고 통치자가 바뀌면 바뀐 왕에게 세금을 바치고 충성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조선은 왕이나 군사는 도망가는데 오히려 백성이 일어서서 나라를 구했다. 그리고 스스로 ‘의병’이라고 불렀다. ‘민병’이 아니라 ‘의병’이었다.
우리민족의 ‘의’는 민족의 유전자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의 건국이념조차도 ‘홍익인간’,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의’와 상통하는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외친 것이 의의 개념이었다. 삼일 독립선언서는 의에 바탕을 두었다 할 수 있으며, 현대 대한민국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도 ‘의로움’이었다. 4.19 학생운동도, 광주 민주화운동도, 몇 년 전 추운 겨울의 촛불혁명도 그 기반에 아직도 우리 민족의 ‘의’에 대한 유전자가 작동했다고 본다. 하버드 대학의 오드 웨스타드 교수는 ‘의’를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의’가 흔들리고 있다. 나라를 잃어버렸던 때와 건국과 전쟁의 혼란기를 통해서 약삭빠른 자들이 돈을 모으고 큰소리를 쳤다. 예전에는 배우면 사람 될 것을 기대했다면, 요즘은 배운 놈이 더 한다는 세상이 되었다. 하긴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그 다섯 명 전부가 판사 출신이라는 점은, 격동의 시대에 인간성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얼떨결에 수입한 민주주의와, 공평하지 못하게 시작된 자본주의 시대는, 체면으로라도 ‘의’를 말하던 사람들마저 이제 노골적으로 ‘이익’을 말하게 하였다.
이제는 돈으로 평가한다. 직장도 돈으로 평가하고, 집도 돈으로 평가하고, 차도 돈으로 평가하고, 사람도 돈으로 평가한다. 인생도 돈으로 평가하고, 돈이 있으면 나이와 성별과 지식에 상관없이, 심지어 도덕과 예의와 인간성에도 상관없이 큰소리 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다. 가치의 근거가 돈이 되어버렸다.
자 이제, 질문해본다. 이러한 세상을 지금 살아가면서, 당신에게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가? 톨스토이식으로 바꿔 물어보자. ‘당신에게는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가?’ 그리고 질문이 하나 더 따라붙는다. ‘그게 네가 필요해서 그런거냐, 이 시대가 그렇게 요구한거냐?’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대를 무시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시대 핑계대지 말라는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척 하지 말라는 말이다. 알면서 모르는 척 말라는 말이다. 세상에 보조를 맞추면서,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말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세상은, 당신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 집 평수 넓히기 위해 애쓰는 너의 모습이, 어릴 때부터 꿈꾸던 모습인가? 혹은 더 이상 비참해지기 싫어서 사람마저 피하는 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의 기준인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불편해 한 것 중의 하나는, 내 삶의 기준을 강요받는 주변의 분위기였다. 공동체를 빙자한 은근한 강요는 우리 민족의 독특한 정서이기도 한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동네 형들이 나를 불러내더니, ‘저기 새로 이사 온 아무개가 너 이긴다더라’는 말에 그 이사 온 아이하고 주먹다짐을 해야만 했던 기억은 항상 불쾌했다. “사내는 그런 것으로 울면 안돼”라는 말로부터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라는 말까지의 젠더 압박도 싫었다.
육군에 입대해서는 매일 매를 맞는 것보다, 그 매맞는 이유가 싫었다. 고참들이 공연히 매질을 하면서 한다는 소리가 ‘우리는 더 많이 맞고 지냈지만, 너희는 조금만 때리는 거다’라는 소리가 역겨웠고, 그래서 나는 수없이 맞고 한 대도 때리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독재시절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려면 불 꺼지고 거의 30분이 지나야 했다. 극장광고 5분, 대한뉴스 10분, 문화영화 10분, 공익광고, 그리고 애국가까지 끝나야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애국가는 다 일어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있어야 했다. 1971년에는 극장에서 애국가가 시작되었는데 일어서지 않은 사람이 즉심에 회부되었다. 나는 스스로 애국자로 생각했지만, 애국가가 울릴 때마다 일어서서 꼼짝하지 않는 것이 왜 애국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대부분 앉아있었다. 주변에서는 홀겨보고, 특히 근처에 여학생들이 있는 경우는 수근대면서 손가락질까지 했다. 손가락질을 당할지라도, 나는 내 취미가, 조금 과장해서는 내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느낌이 싫었다. 애국가 상영는 89년도에 중단되었다. 그렇게 될 때까지 투쟁했던 사람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남에 의해 조종되기 싫어하던 나는, 지금 내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을까? 혹시 눈치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삶일까? 그렇기에는 이제 제법 꼰대 티도 나는데, 그렇게 미워하더니 결국 세상에 함락당하고, 혹은 타협하고 말았는가? 내 인생에 내 자신의 몫은 얼마만큼일까? 살고싶은 대로 살았으며, 또한 그 삶은 정당한가?
뭐, 세상에 맞춰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누가 비난할 것도 아니며,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살았다고 해서 누가 칭찬해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 자신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는가? 남과 비교하면서 초라해지거나, 혹은 우쭐대지는 않았던가? 자기 잘난 멋에 사는 것도 원치 않고, 남들 기준에 맞추는 것도 바라지 않는데, 그런 삶이 있기는 한 걸까?
구체적으로, 하기 싫은 것 말고, 강제되는 것 말고, 대체 어떤 삶을 살기 원했는데?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내 삶의 방향은 대학생 때에 읽은 에리히 프롬의 책이 거의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제목으로는 ‘소유냐 삶이냐’, 요즘 출간되는 번역으로는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다. 어제 다시 찾아 읽은 그 책의 서론에 이런 구절이 있다. 현대의 발전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모든 사람이 부와 안락한 삶을 누리면 누구나 무한히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제한의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이라는 삼위일체가 발전이라는 새로운 신앙의 핵심을 이루었고, ‘하나님의 도성’의 자리에는 ‘발전이라는 지상의 새 도시’가 들어섰다. 이 새로운 신앙이 그 신도들의 마음을 에너지와 활력과 희망으로 가득 차게 했다.
프롬의 예상대로 이제 돈이 사람들의 신앙이 되었다. 대한민국 개인소유 토지의 50%를 상위 1%의 부자가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당신의 몫을 얼마만큼인가? 당신은 얼마만큼을 누려 마땅하며, 혹은 국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에 분깃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분깃은 우리말로 ‘몫’이라고 할 수 있다. 분깃은 본래 내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가 주어졌을 때에, ‘내게 돌아올 몫’이고, 또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차지하게 될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4장에 소돔전쟁의 기록이 있다. 아브라함은 잡혀간 소돔성의 주민들과 조카 롯을 구해오고, 물건도 되찾아왔다. 적에게서 빼앗은 물건을 아군들이 나눌 때에 군인들은 각자의 공로대로 분깃을 받게 된다. 사무엘상 30장에는 다윗이 전쟁의 전리품을 분깃대로 나누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분깃은 단순한 수학적 나누기가 아니다. 분깃에도 ‘의’가 적용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예를들어, 두 사람이 같이 바다에 나가서 똑같이 수고하여 고기를 잡아 돌아왔다고 하자. 각자의 집으로 나눠 돌아가면 될텐데, 한 사람은 아내와 함께 둘이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아이들도 셋이 딸려있다고 하자. 둘이 똑같이 나누는 것이 맞는가, 식구가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이 맞는가? 여기에서 ‘의’가 작동할 수 있다. 그렇게 의를 거쳐서 나눠진 것이 ‘목’, 분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분깃은 단순히 수학적인 나눔이 아닌, 공동체적 행동이요, 의에 기반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분깃에 ‘의’라는 개념을 추가했거니와, 더 상위개념도 추가되어야 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자신 몫의 유산을 아버지께 미리 청구한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이 분깃은 둘째 아들로서의 권리다. 문제는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모든 재산을 탕진한 후에 돌아왔을 때다. 그는 아들로서 대접 받았고, 아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때 둘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 중에서 자신의 몫은 이미 받았고, 없어졌다. 이 집에 그의 분깃은 없다. 아니, 진짜 없는가?
여기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분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열두 지파의 대표가 제비를 뽑아서 그 땅을 나눠 가졌다. 그런데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는 데에서 제외되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10: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레위지파의 분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선언이었고, 현실적으로는 레위 지파는 하나님과 성전과 제사를 위해서 봉사하고, 다른 지파들은 땅이나 물건의 일부, 즉 십일조와 헌물을 레위지파에게 주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즉, 돌아온 탕자에게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가 존재하는 한, 그는 그 집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탕자의 남은 분깃이었다. 돈 쓰듯 탕진해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존재가 그의 실패한 인생에 남아있는 가장 큰 분깃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베들레헴 촌부의 막내아들로서 왕에 이르기까지의 다윗의 전설적인 생애에 대하여 그는 어떤 자부심을 가졌을까? 다윗은 용사이며 왕이지만, 내게 시인이요 예언자의 모습이 가장 돋보인다. 다윗은 자기 자랑을 한 적이 없지만, 스스로에 대해서 말할 때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라고 하여 자부심을 드러낸 적은 있다. 다만 그 노래들은 유행가도 아니며, 사랑 노래도 아니고, 모두가 기도였고 찬송이었고, 고백이었다. 그 고백중에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인식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다.
(개역개정)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표준새번역)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나의 운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동한 가나안 지역에서 구박받던 이스라엘을 그 지역의 패권자로 만들었다. 그의 이름은 존경 받게 되었고, 다윗, 데이빗은 가장 인기있는 이름이 되었다. 다윗은 왕자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시골노인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였고, 물려 받을 유산이나 지분도 변변찮은 사람이었다.
다윗은 그가 누리는 삶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분깃이었다. 비록 다윗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땅을 차지하였지만, 다윗의 고백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가 성취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줄로 재어주신 것을 찾아왔을 따름이었다.
다윗의 전쟁은 한 뼘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천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땅, 오백년 전에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제비 뽑아서 나누게 한 땅이었다. 다윗의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소유로서의 땅이 아니라 사명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주변 평판에 휘둘리지 않았다. 주변이 옳다고 하는 일에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다. 굴에 숨었을 때에 입구의 사울이 찼아왔는데, 부하들은 그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다윗을 부추켰지만,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사람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했다.
다윗에게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땅이며, 또한 인생이다.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을 의뢰하기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다윗의 고백이었다.
무엇이 너의 인생인가? 이 시대에 흔들리는 인생들을 흔드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이 흔드는가, 스스로 흔들리는가?
아모르 파티- 니체라는 철학자가 자주 사용한 라틴어 글귀로, 주어진 삶에 대한 사랑, 일종의 ‘운명애’라고 볼 수 있는 말이다. 지게꾼으로 태어났든 왕으로 태어났든 그 삶, 그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지게꾼이라고 해서 왕의 호사를 동경하지 말 것이며, 왕이라고 해서 지게꾼의 자유를 갈망하지 말고, 지금 너의 삶, 너의 운명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다.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과 주어진 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키울 수 있고, 그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다윗에게는 젊은 시절의 고난과 도피의 세월, 왕이 된 이후의 그치지 않는 전쟁이 그의 인생이었고, 아모르 파티의 대상이었다. 다윗의 모든 시들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 증거였다.
굴 속에 숨어 사울의 추격을 피하면서 시를 지었다.
(시 142편)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밧세바와의 치명적인 불륜 이후에 선지자 나단이 그를 찾아왔을 때에 즉각 무릎을 꿇고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침대가 다 젖도록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면서 그 상태를 시로 지어 자신의 잘못을 온 천하에 박제하였다. 시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다윗은 곤핍하여 어려울 때에도 사람에게 호소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의 인생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불륜이 드러났을 때에도 사람에게 부끄러워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자신의 삶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얼마만큼의 지분, 얼마만큼의 분깃이 있는가? 당신의 삶이 흔들리고 있다면, 세상이 흔드는가, 당신이 흔들리는가, 하나님이 흔드시는가?
이 각박한 대한민국에서의 삶에서 어쨌든 땅 몇 평을 소유하고, 아파트 몇 채를 소유하는 것이 나의 분깃이며 사명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분깃이 있는가? 혹 내 삶의 가치관이 어디 있는지 살펴볼 때에, 세상 돈 많은 자들의 자랑거리로부터 왔을까, 하늘에서부터 왔을까. 당신의 가치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자는 없다. 저도 모태신앙이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삶을 자각하고,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에 대한 고백이 된 이후이다.
누구도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런 과정과 기도와 하나님의 이끌림에 대한 응답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어갈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그의 삶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생전 세상에서가 아닌,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으로 아름다워진 삶이 되었으면, 다윗을 닮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 땅에서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모든 청교도들은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이었다. 다만 발은 땅을 디디고 살지만, 우리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짜 땅, 우리의 진정한 분깃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