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일 주일말씀

생명의 길

성경: 시편 16편 1-11절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2)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영상: https://youtu.be/bkICrU6Xc2Y

새해가 밝았다. 올 한 해에 주님의 은총이 모든 성도들에게 가득하길 바란다. 지난주에는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생각했다. 송구영신예배에는 ‘돌아오는 길 없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에 대해 말씀드렸다. 이제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이 한 해동안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국가적으로는, 개인적으로는, 육신으로는, 영적으로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탈리아 로마는 분수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제국때부터 분수가 건설되었고, 시내 곳곳의 분수들은 대개 수백 년 역사를 가진다. 거의 모든 분수의 물은 모터가 아니라 자연적인 흐름이어서, 높이 치솟는 분수는 없되 독특한 관광자원이 된다. 그중에 제일 유명한 것 중 하나는 트레비 분수다. 400년 된 이 분수는 물이 흐르는 그 배경이 로마 신화 속의 인물들과 풍경이 조각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트레비 분수 관광에 유명한 것은 동전 던지기다. 오른 손에 동전을 쥐고 어깨 넘어로 던져서 가운데 연못에 넣으면 다시 로마에 돌아올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마다 동전을 던져 넣는다. 하루 평균 450만원 정도의 동전이 떨어지고, 매일 저녁 시에서 수거하여 문화재 복원과 보호에 쓰고 있다고 한다.
관광객들의 여흥이겠지만,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다는 소원팔이치고는 꽤나 흥행하는 셈이다. 소원은 조금씩 더해졌다. 두 번째 동전을 던지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목록이 추가되었다. 세 번째 동전 이야기도 더해졌는데, 헤어져야 할 사람과 헤어질 수 있는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찾다보니 언젠가 또 업데이트 되었다던데 네 번째 소원이 생겼다. 헤어졌던 인연이 다시 연결된다고 한다.

누구나 소원을 가진다. 소원이 있다는 것은 세상 일은 맘대로 되지 않으며, 원한다고 모든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소원을 말하지 않는다. 바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행복하기를 소망하고, 건강하기를 소원한다. 다만 장래 일에 대한 기대를 소원을 말하는 방식, 막연한 희망을 간직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초월적 존재, 비현실적인 믿음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여기지만, 그건 믿음의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데서 오는 착시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현실과 우연과 운명을 이야기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현실과 예정과 섭리를 말한다. 어떤 것이 더 치열한 고민과 탐구의 결과일까?

우리들 중에는그 믿음에 대하여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믿는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이천 년 동안 기독교가 전해오면서, 그것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없이 박해와 죽음을 당하면서도 이 믿음을 보존해 온 것은 그 치열했던 삶의 현장, 박해의 현장에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신앙의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길에 빛이요 방향이신 예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리도인이라고 살아가면서 고난과 역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삶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신세 한탄의 노래를 부르며, 한 번 사는 인생에 대한 비가를 부르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찬송을 부르며 주와 동행하게 된다.

오늘 시편 16편의 다윗의 노래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노래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노래, 삶의 큰 어려움에 직면했으나 그 노래와 기도를 빼앗기지 아니한 성도의 보고서이다. 다윗의 삶은 치열한 인생의 현실 속에서 믿음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다.

그는 소년 영웅이었고, 왕의 사위였었다. 왕이 그를 죽이려고 하여 이십년을 도피하였으며, 수없이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적국에 망명한 상태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분위기가 되자 수염에 침을 흘리면서 미친 행세를 하여 비굴하게 살아남았으며, 자신과 부하들의 가족을 빼앗겨서 부하들에게 맞아 죽을 뻔하였다. 왕이 되어서도 다윗은 그 미약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끝없이 전쟁에 참여하여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으며, 나이 들어서는 간음과 살인의 큰 죄를 범하였다. 맏아들 암논은 이복동생을 강간하였고, 이로 인하여 압살롬은 자기 형을 죽였다. 훗날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의 목숨을 노렸고, 다윗은 먹을 것도 가지지 못한 채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다윗의 조카 요압에게 죽었다. 다윗과 평생 함께했던 요압은 다윗의 조카요, 개국공신이요, 군사장관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정적은 물론 자기 사촌과 다윗의 아들마저 무참히 제거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다윗은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요압을 죽일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이런 삶이 어떤가? 다윗의 믿음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도피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저렇게 파란만장한 삶의 가운데 있었기에 오히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을 도우시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죽음의 수렁에서 벗어나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을까?

다윗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라고 소개하였다. 다윗의 시에는 그의 믿음이 얼마나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인지 잘 나타나 있다. 종종 다윗의 시 중에는 그 표제에 상황의 설명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시편 34편은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이며, 57편은 사울을 피하여 굴에 숨었을 때에 지은 시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시편 16편은 어떤 상황에서 지은 것인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학자들은 다윗의 왕으로서의 통치 후반부의 작품으로 보는 경향이며, 특히 다윗의 실수로 인해 역병이 돌아 수만명이 죽었을 때를 배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찬송시는 특별한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묵상할만 하며, 다윗의 삶과 신앙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오늘은 우리가 맞이한 한 해가, 전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모든 세월들의 가장 처음 시간인 것을 주목하면서, 이렇게 이어질 시간들, 올 한해 우리의 삶에 이 ‘생명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괜찮을까?

다윗의 피난처

속초 쪽에서 설악산을 올라가는 길은 비선대와 천불동계곡을 지나 양폭, 소청, 중청, 대청으로 이어진다. 사철 아름답고 거리도 꽤 되고, 제접 가파르다. 비가 쏟아지면 바위계곡은 물을 머금지 않고 한꺼번에 쏟아내려서 급류를 이루고, 겨울 눈은 아름답지만 치명적이다. 그래서 곳곳마다 대피소가 있다. 양폭, 희운각, 소청, 중청 대피소는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라 아름다운 산 속에 숨은 위험을 피하기 위한 장소다. 우리 동네 7동산을 오르는데 대피소가 필요하지 않다. 산이 깊을수록, 아름다울수록, 그 길이 멀수록, 피난처가 필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위험이 닥칠 때에 빨리 빠져나가려고 서둘기보다, 적절한 피난처를 마련한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본래는 아름다운 것이다. 지으셨을 때에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는 솔로몬의 고백은 자연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 한 것이다. 삶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만큼 거칠었었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말이다. 그럴수록 피난처가 필요하다. 그 급변하는 상황들과 세상을 잠깐 마치 내 일과 내 삶이 아닌 듯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사해바다 서쪽 기슭을 따라 내려가면 사해사본이라는 성경이 발견된 쿰란 지역이 나오고, 거기서 30분 쯤 더 바다를 따라 내려가면 엔게디라는 골짜기가 나온다. 유대의 남쪽 중심도시 헤브론에서아래쪽으로 넓게 펼쳐진 광야가, 갑자기 가파른 경사와 깊은 계곡을 이루면서 드물게도 사철 물이 흐르는 계곡이 되어 사해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골짜기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도망다닐 때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로 많이 도망다녔다. 그리고 이 엔게디 골짜기에 은신하였다. 사울이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잡으러 나왔다가, 굴에 숨어있던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벤 동굴도 이 엔게디에 있다. 지금도 그 계곡에 있는 작은 폭포를 다윗 폭포라고 부른다. 수천명이 포위를 하고 수색을 해도 쉽게 발견되지 않을 험준하고 복잡한 골짜기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런 지형지물을 의지해서 위험을 피한 것만은 아니다. 다윗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생명을 의탁하고 망명 생활을 하였지만, 다른 나라 왕이 그의 목숨을 지켜준 것도 아니었다. 또 다윗은 모압지역으로 자기의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하였는데, 모압은 다윗의 증조모 룻의 고향으로서 혈연관계에 의지해서 도피하기도 하였다. 수없이 떠돌면서 굶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쫒김은 젊을 때,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던 시절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다윗은 전쟁터에서 시간을 보냈고, 자녀들의 상잔 때문에 가슴아픈 시간을 보냈고,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거의 맨 몸으로 급히 왕궁을 탈출하면서 눈물의 피난길에 올랐었다.

골리앗을 죽인 용사라 할지라도 왕의 군사를 대적할 수 없었으며, 목숨까지 내어줄만큼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가 있었어도, 다윗의 망명을 눈물로 배울할 뿐이었다. 왕이라고 해도 자식 문제는 평민과 다를 바 없고, 평민의 자식은 평범한 문제나 일으켰을텐데, 왕의 자식은 왕좌를 노리고 아비를 죽이려한다. 골짜기도, 외국도, 고향도, 심지어 왕궁도 다윗의 피난처는 아니었다.

다윗은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은 피난처를 가진 사람이다. 그곳은 우중충한 지하 방공호가 아니라 sanctuary, 성역이다. 그리스도인은 막연히 허공을 향해 소원을 비는 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는 자다. 그 기도들은 허공을 헛되이 맴돌지 않고, 하나님께 향기처럼 올라간다. 자신의 용맹이나, 하나같이 뛰어난 부하들이나, 세상이 감탄하는 노래의 재주가 아니고, 험한 골짜기나 인적 없는 광야나 아는 사람 없는 외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의 피난처였다.

이 말을 상징적인, 신앙적인 말이 아니라, 현실적 고백으로 보는 것이 옳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을 때에, 왕비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 하자 40주 40야를 달려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외딴 곳이라서 도피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기에 엘리야의 피난처가 되었다.

인생의 피난처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공간도 아니고,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는 것도 아니다. 주님이 우리의 피난처다.

다윗을 지탱하는 힘

다윗의 피난처 외에, 오늘 시편 16편에 보여지는 다윗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함께 나누고 싶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그렇듯이, 오늘 시편 16편에도 수많은 주제들과 신앙적, 신학적 요소들로 풍성하지만 오늘은 우리가 서 있는 한 해의 시작지점에서의 관점으로, 전부는 될 수 없고 조금만 살펴보자.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과 제목은 오늘 하루만 묵상할 몫이 아니다.

작년의 우리 교회 표어가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어서 설교의 거의 절반 넘는 분량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미를 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올해 표어인 ‘생명의 길’이라는 주제 역시 한 해 내내 우리의 걷는 길과, 그 길 주변의 일들, 그 길의 목적지, 동행자들, 쉼터들 등등의 이야기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다윗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다윗이 시편 16편으로 대답하도록 해 보자. 우선 새해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이 우리의 인사니까, 복에 대해서 물어보자.

다윗, 당신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다들 말한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당신이 누린 최고의 복은 무엇인가?

어느 복이 최고였을까? 왕의 위엄인가? 용맹과 지혜인가? 수금을 타며 시를 짓는 예술의 감각인가? 지금이라면 불가능하지만, 여덟 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아내였을까? 다윗은 간결하게 정리하고 선언해버린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이것 정말 멋지다. 누군가가 ‘무슨 복이 많아서 왕이 되셨나요?’라고 묻는다면, 다윗은 ‘뭔 소리요. 왕이라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복이요’라고 대답할 사람이다.

살면서 무슨 재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친구와 어울리는 것도 재미요, 먼 곳으로 여행도 즐겁고, 취미 활동이나 땀의 성취도 사는 재미다. 돈이 모이는 것도 재미일 것이요, 게임 삼매경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다윗의 재미, 다윗의 사는 즐거움은 좀 특별하다. 조금 더 원론적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다윗은 ‘땅에 있는 성도들’이 자신의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최고의 피조물이며, 사람이 최고의 즐거움이다. 사람에게서 얻어야 할 기쁨을 물건이나, 취미나, 성취에 얻는 사람들은 이걸 알지 못할 것이다.

다윗을 향한 세 번째 질문은 ‘얼마만큼의 땅이 더 필요한가?’다.

땅이야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아이들 크는 모습을 보고 힘을 낸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손자 손녀로 바뀐다. 어떤 사람은 명예로,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고집으로 지탱한다.

다윗을 지탱하는 힘은, 삶에 대한 성찰이다. 사실 이런 선언은 말로 간단하게 이야기 할 성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이해할 수나 있을까?

먼저 말할 것은, 인생을 우리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살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덩달이 시리즈- 선생님이 인생은 무엇인지, 삶은 무엇인지 알아오라고 숙제를 냈다. 덩달이가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앉아 아무리 생각해도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길에서 음식 파는 사람의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오뎅 있어요. 삶은 계란이요~’. 그래서 숙제를 완성했다. ‘삶은 계란입니다.’

우스개소리가 아니라도, 깊이 성찰한 사람들이 도착하는 곳은 대개 비슷하다. 그리고 대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오래 전에 어떤 가수가 그런 노래를 불렀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 적이 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91년도에 인기 드라마 삽입곡으로 쓰였고, 최고 가요상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빼놓고 인간의 삶을 성찰한다면, 이 노래 정도면 최고의 수준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또 하나의 눈이 있었다. 영혼의 눈이다.

다윗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빼앗길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윗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가진 것을 지키기에 충분한 힘이 있어서도 아니다.

다윗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오른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특별히 다윗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삶과 영혼을 스올에, 음부에, 어두운 곳에, 슬픈 곳에, 절망의 곳에, 잊혀진 곳에 버리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이 구절, 이 고백은 엄청난 믿음의 도약이다. 내가 생각으로는, 다윗처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놀라운 비전을 선언한 사람이 없었다. 믿음의 조상 중 한 사람이 야곱조차도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들었을 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슬피 울며 스올로, 음부로 내려갈거라고 말하며 울었었다.

사실 다윗은 선지자다. 힘 세고 머리 좋은 용사가 다윗의 전부가 아니며, 왕의 영광이 저 사람의 진짜 정체성이 아니라, 정말 우여곡절 많은 인생 살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바라본 선지자가 다윗의 진짜 모습이다.

이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다는 예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고백은 그 영생과 생명의 길을 나도 가도 있다는 위대한 선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가는 길이 영생의 길, 생명의 길이라면, 그 어찌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감출 수 있겠는가?

2021 첫 주일이다. 이 한 해는 또 작년과 똑같겠지, 이렇게 살다 세상 변하고 또 그렇게 죽겠지…하는 해가 아니라 영원으로 나아가는 또 한 해가, 또 한 걸음이 우리 앞에 있다. 이 한 해에도 세상에는 질병의 바람이 불고, 경제 위기설이 떠돌고, 혹은 세상 요동치며 사람들 두려움에 쌓여도, 그래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동행하심과 보호하심 아래에서 열려있는 그 생명의 문을 향해 가는 생명의 걸음의 또 한 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귀한 길을 가는 오늘도 주의 은총을 힘입은 복된 주님의 사람들이라는 점, 이것이 새해 첫 주일에 주께 고백하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찬송이요 우리의 선언이다. 이 한 해 동안 이 생명의 길에서 더 큰 찬송들과, 더 큰 고백들과 더 큰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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