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 수요예배
살든지 죽든지
말씀: 빌립보서 1장 12-21절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우리가 ‘초대교회’라는 말에 대하여 가지는 이미지는 성령 충만, 말씀 중심, 떡을 떼며 나눔, 서로 필요한 것들을 채움 등등 정말 이상적인 교회공동체의 모습이다. 더구나 전도에 대해서는 그 어느 시대도 견주지 못할 열정과 성과를 가진 교회가 초대교회다.
오늘 빌립보 교회에 쓴 바울의 편지에는 초대교회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뜻밖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바울이 옥에 갇힌 때에, 성도들은 더 힘써 열심히 전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였다. 그런데 그 애쓰는 이유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한쪽 사람들은 평소에 바울을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이 옥에 갇히자 이제 밖에 있는 자신들이 바울의 몫까지 감당하려고 더 열심히 전도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전도하는 것으로 옥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에게 위로와 힘이 되기를 원했다.
다른 쪽 사람들은 평소에 바울의 선교방식을 옳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 바울이라는 사람마저 싫어했던 사람들로 보이는데,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전도하였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전도방식이 정통 유대인들의 보기에는 너무 과격한 것처럼 보이고, 바울이 유대의 전통을 무너트리려 한다는 편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보이는데, 이들이 보기에는 바울이 율법의 파괴자요, 유대의 전통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는 다른 자신들의 방식으로 열심히 전도해서 그 전도의 열매가 크게 맺히는 것이, 자신들의 주장의 옳음을 증거하는 것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힌 것 자체도 바울의 전도방식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증거로 작용하기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란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 내부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을 향한 사랑으로 일치된 교회라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님 이후 초대교회에 자연스럽게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정통 유대인들에게서는 사도 바울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초대교회라 할지라도 이렇게 교계 전체에서뿐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도 갈등이나 분란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의 경우 교회 내에 네 개의 파벌이 있어서 각각 베드로, 아볼로, 바울, 예수파라고 서로 주장하였고 반목하였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완전한 공동체는 아니다. 아니 역사를 통해 다 살펴봐도 완전한 공동체는 없었다. 다만, 교회는 예수의 꿈에, 말씀에 붙잡힐지언정, 교회의 지도자나 사람에, 혹은 세상의 문화나 전통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 된다.
물론 어느 시대, 어떤 이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조차도 교회가 세상에 기반을 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들만이 세상에서 온전한 교회라고 외친다. 이단일수록, 사람 중심일수록, 예수와 성경에서 벗어날수록 오히려 자기들은 성경에 굳게 서있다고, 성경을 완전히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에도 세상에 기반을 둔 교회, 성경적인 것 같지만 실은 세속적인 교회, 거룩한 것 같지만 실은 타락한 교회, 신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안에 성공과 물질과 만족만 가득한 교회가 있다. 그리고 이런 교회들의 특징은 세상을 향해 외치기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 있다.
개혁자 루터의 글 중에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논문이 있다. 중세 교회의 성례식에 대한 교회의 오류를 조목 조목 지적한 글이다. 교회는 그때까지 7가지 성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개혁을 통해서 세례와 성만찬, 두 성례만 남겨놓게 되었다. 없앤 것은 출생례, 견진례, 혼례, 고해, 서품, 종부성사의 다섯 개인데, 남겨둔 것과 없앤 것의 기준은, 그것이 예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인지 아닌지였다.
성만찬의 경우에도 더 깊은 논의가 많이 있는데, 이를테면 단종배수의 전통을 없애버린 것, 화체설의 극복 등이 있다. 단종배수의 법도는 평신도들에게 떡은 주는데 잔은 주지 않던 관습이었다. 잔을 주지 않는다면, 교회가 자의적으로 떡도 주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수많은 오류들을 개혁자들이 수정하고 바로잡았는데, 그렇다면 왜 교회는 그런 수많은 오류를 가지게 되었는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테고, 왜 교회에 그런 잘못된 전통들이 있는가? 왜 교회가 타락하는가? 교회는 타락할 수 있는가?
아까 성례식의 오류를 지적한 루터의 논문 제목을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고 말씀드렸다.
이 제목은 매우 도발적이다. 바벨론은 예부터 세상의 상징이며, 솔로몬의 성전을 약탈, 파괴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던 강대국이었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세상의 힘에 능욕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단절된 아픔을 겪었었다. 루터가 살던 시대의 교회는 겉으로는 유럽을 지배하는 콧대 높은 권력이었지만, 그 속으로는 세상의 탐욕과 암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성직이 돈으로 팔렸으며, 성직은 돈과 권력의 상징이 되어있었다. 당시 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성직자가 되는 것, 주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였다. 왕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은, 왕은 왕가의 핏줄이어야만 하지만, 주교는 아무리 비천한 신분이어도 오를 수 있는 자리였는데, 어떤 때에는 왕보다 더한 권력과 부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귀족들도 자기 아이들이 높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랬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순전한 기대를 갖고 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 부르심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다만, 부르심 받았다고 다 거룩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 부르심은 오히려 죄인들, 부정한 자들, 타락한 자들을 향한 부르심이며, 그렇게 나아온 자들이 씻어 정결하게 되는 곳이 교회이지만 그 과정은 지난하며, 거룩한 자와 속된 자, 정결케 된 자와 아직 부정한 자, 하늘 은총만을 바라는 자와 실제로는 자신의 욕심만을 챙기는 자들이 함께 섞여있는 곳이 교회다.
교회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세상의 포로가 되었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년 전이나,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회를 포로처럼 잡고 있는 세상, 세상의 힘은 다르지 않다.
가장 큰 바벨론의 영향이라면 건물의 외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은 역사 이래의 가장 큰 건축공사를 시작한 시점이었고, 그건 어마어마한 재정을 필요로 하였으며, 돈을 위해서 신앙과 성경의 적절한 왜곡을 용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극단적인 주장이 테첼의 돈 소리 이야기, 즉, ‘당신이 헌금하는 동전의 소리가 드리는 때에, 지옥에 있던 당신의 부모가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포로로 잡히면 나타나는 외적 모습 몇 가지가 예배당과 그 시대에 드러난다.
첫째, 건물을 신앙과 동일시하게 된다. 가장 큰 예배당을 지었으니 가장 큰 믿음일까? 물론 아니다. 주의할 것은, 그렇다고 작은 예배당이 좋은 믿음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의 이름으로 지어진 집은 소중하게 보존되고 유지되는 것이 맞지만, 혼동하지는 말아야 한다.
둘째, 함부로 참된 신앙을 주장하는 것이다. 코로나시대에, 헛소리하는 목사들이 많다. 자기들의 예배에는 바이러스가 힘을 쓰지 못한다거나, 모인 자리에 성령께서 나쁜 병균을 다 태워주신다거나, 코로나를 빌미로 정치적 주장을 마치 성경말씀처럼 외치거나 하는 자들이 이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고, 그런 주장에 아멘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힌 자들이다.
특히 코로나로 인하여 봉쇄되는 시국에, 그럼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모이는 것이라는 주장은 믿음을 빙자한 헛소리일 뿐이다. 물의를 일으켜서가 아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면 그런 소란이라도 일으킬 가치가 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틀렸고, 사회적으로 틀렸고, 무엇보다 신앙적으로 틀렸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옳은 믿음이라는 주장이야말로 바벨론에 포로가 된 신세인 것을 몰라서 저러는 것이다.
셋째, 교회가 어떻게 되든, 목회자가 뭘 주장하든, 내 믿음만 순수하고 열정을 가지면 된다는 생각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이끌지만, 지도자도 인간이며, 타락하기 쉬우며, 유혹에는 더 많이 노출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주목하고, 그 가르침과 그 행보가 말씀 위에 바로 서 있는지 구별해야 한다. 성경과 신학지식으로 다투라는 말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척도가 가장 정확하다. 예수를 닮아가는지, 예수의 가르침과 같은지만 확인하면 된다. 이건 교회와 목회자뿐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적용된다.
이를테면 국내에 해외 후원 NGO가 최근 많이 생겼는데, 열 곳 중에 여덟곳 비율로 기독교 바탕에 세워진 기관이라고 한다. 한동안 TV만 틀면 빈곤한 나라의 죽어가는 아이 모습을 보여주며 후원을 부탁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문제는 현지에 직접 전달되는 것보다 자기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의 비중이 너무 큰 단체가 여럿 있었다는 점이다. 얼마 전 그 단체의 이사장에 대한 폭로가 있었는데, 아프리카나 해외에 나갈 때마다 항공기 좌석을 1등석으로만 다녔다는 것이다. 후원금의 대부분이 자기네 건물 짓고, 인건비로 나갔다는 것도 역시. 그러니까 좋은 일을 해도 그것을 살펴야 한다. 후원을 해도 잘 하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교회도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시 시대의 목회자로서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렵다. 다른 사람의 믿음과, 다른 교회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단편적인 몇 모습만 보고 판단할 때에 쉬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교회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 외에 없다. 다만 우리는 역사와 말씀이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도 따르지 못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먼저 바로서기를 힘써야 할 뿐이다. 또한 바른 소리를 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지 않아야 하며, 교회라는 이름 자체로 무슨 일이든 면죄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라는 것은, 그런 와중에 주님의 뜻이 깨달아지는 것, 주님의 나라는 세워져 간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뜻밖의 결론으로 이끌어간다. 옥에 갇힌 자신을 위로하려고 열심히 하든, 괴롭게 하려고 열심히 하든,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을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고백하고 있다. 참으로 대인배다운 풍모다. 아니, 인격 이전에 믿음이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전파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만 드러나면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목적이 분명한 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내분에 휩싸이지 않는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적이 아니다. 이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경우, 개인적 욕망과 이익을 위해 교회를 팔아먹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위하여 교회에서 잘라내야 한다.
다만, 목적 자체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 경우, 사도 바울이 자신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위하여 인내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인내하며 힙을 합쳐야 한다.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항상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할 뿐이다. 그 구별의 지혜가 우리 기도의 제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