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설교말씀
에벤에셀
말씀: 사무엘상 7장 3-12절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설교영상: https://youtu.be/JSsQlE3fdB4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도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말씀을 선포하고 나가서도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 두 개의 전쟁 이야기를 말씀드리려 한다. 첫째 전쟁은 BC.1050년경 가나안 땅의 패권을 다투는 큰 전쟁이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전쟁으로부터 20년 전의 이야기다.
제사장 엘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 이스라엘이 군사를 일으켜 블레렛을 치러 나갔다. 전쟁터는 에벤에셀이라는 곳이었고, 첫 싸움에서 이스라엘 군사 사천명 가량이 죽었다. 지휘관들은 당황하였고, 대책회의 끝에 실로의 장막에 있던 여호와의 궤를 가져오기로 결정하였다. 전쟁터에 궤가 도착하였고, 이스라엘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군사들은 소리는 높였고,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가 적진에 도착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블레셋 군사들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용기를 냈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날에 이스라엘 보병 삼만명이 죽었고, 여호와의 궤는 빼앗겼고, 궤 옆에서 수종 들던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다. 이 소식을 듣고 엘리 제사장마저 죽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접경지역의 땅을 빼앗겼고, 열두 지파 동맹의 종교적 구심점인 실로까지 약탈을 당하여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 성읍은 다시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다. 빼앗긴 여호와의 궤는 블레셋 지역에 재앙을 일으켰고, 훗날 다시 이스라엘에 돌아와 기앗여아림 마을의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었다.
하나님의 궤, 이른바 언약궤까지 가지고 참전한 전쟁에서 왜 이스라엘은 이렇게 패배하였는가? 왜 하나님은 저들을 돕지 않으셨는가?
이 해답을 듣기 전에 두 번째 전쟁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오늘 본문말씀에 기록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사이의 또 다른 전쟁이다. 이 전쟁은 앞서 이야기 한 전쟁으로부터 20년 쯤 지난 후의 이야기다.
백성들은 사무엘의 외침에 따라 미스바로 모였다. 금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블레셋이 듣고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왔다. 아직도 군사력은 블레셋의 힘이 월등한 상태였고, 백성들은 두려움에 빠졌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블레셋 진영에 우레를 내리셨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추격하여 치고 승리하였다.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이름하였다. 그 뜻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었다.
이 전쟁에 의문이 있다.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데, 전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인가? 그 속에 들어있는 모세의 십계명 돌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이기도 하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앞세워 전쟁에서 매번 승리하였고,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에도 군사들보다 하나님의 궤가 앞장섰었다. 그 궤는 전쟁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전쟁에서는 전쟁터에 여호와의 궤를 가져오고서도 처절하게 패배하였고 그 궤마저 빼앗겼다. 두 번째 전쟁에서는 여호와의 궤는 없이, 하나님은 도우셨고 크게 승리하였다.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첫 번째 전쟁 시기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엘리 제사장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영적 감각이 둔하여져서 이스라엘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었다. 그의 두 아들도 제사장이 되어 성전을 출입하였지만,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며, 제사 예물 중에서 원하는 고기를 탈취하는 등 타락한 모습을 보였고, 엘리는 이들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지도자가 타락하였고 당연 이스라엘 백성 자체도 올바른 믿음의 태도를 가질 수 없었다. 이런 영적 어두움은 하나님은 침묵으로 인하여 더욱 어두워졌다.
성경은 엘리의 시대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러한 시대에 오히려 욕심은 앞서는 법이었다. 마음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하였는데 기껏 생각한 것이 여호와의 궤를 가져오면 이기지 않겠느냐는 생각 정도였다.
이건 하나님의 궤를 마치 무슨 부적처럼 생각한 것과 같다. 무슨 신성한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마귀와 적군과 질병은 다 물러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건 미신의 일이고 기독교인들은 다르다고 생각하면 순진한 생각이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이런 함정, 이런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초기부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귀한 물건, 특히 성자들의 유물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었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에서 차로 두시간 쯤에 있는 아말피 해안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50곳 중 1위에 뽑인 곳이다. 그 중심에 아말피라는 도시가 있고, 거기에 성 안드레 예배당이 있다. 안드레의 유골이 모셔져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첫 전도자이고,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며, 어부 출신이기에 뱃사람들의 수호신이며, 동방교회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으며, 그리스에서 죽은 안드레 사도의 유해가 왜 이탈리아 남부 아말피에 있는가?
아말피는 천년 전 쯤에 지중해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라, 제노아, 베네치아와 함께 3대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쳤고, 많은 돈이 모인 곳이다. 그런데 다른 도시보다는 뒤늦게 부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문화재나 역사가 부족하였고, 돈은 많지만 귀하게 취급받지 못하였다. 아말피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의 상징인 예배당에 위대한 성인의 유해를 모셔서 도시의 가치를 높이기 원했고, 많은 돈을 들여서 안드레 사도의 유해를 자신들의 예배당으로 유치했다고 한다.
사실 안드레 사도는 그리스 파트리이에서 순교하였는데, 유해는 그가 대주교로 섬겼던 콘스탄티노플에 안장되었다가, 357년에 다시 파트라이로 옮겨졌다가 1208년에 아말피러 옮겨온 것이다. 그리고 15세기에 두개골이 로마 베드로 성당으로 옮겨졌고, 1964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 정교회와 화해하는 의미로 다시 그리스의 파트라이로 보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일들의 배경에는 ‘성물’에 대한 위험한 태도가 깃들어 있다. 이는 자칫 우상숭배와도 이어질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성물과 같은 외적 물건에 의지하는 태도를 교회에서 추방해버렸다. 교회의 전통과 선조들의 피땀어린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 자체와 믿음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물건에 의지하는 것과 행위에 의지하는 것에 유사점이 있다. 내가 열심히 했으니까, 백번 기도했으니까, 한 번도 빠지지 않았으니까 좋은 믿음일까?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고 있으면 하나님이 저절로 도우실까? 물론 그건 귀한 일이고 권장 할 만 하지만, 뒷마당 장독대에 흰 옷 입고 백일 정성을 드리는 일과, 정성껏 주님을 섬기는 일 사이에 혼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첫 번째 전쟁은, 신앙과 신앙적 상징 사이에서 혼란을 겪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사무엘은 젓 뗀 때부터 성전에서 자라면서 엘리에 의해 양육되었다. 아마도 엘리의 아들들의 부패한 신앙생활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성장했겠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었고 사무엘은 악에 물들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의 힘이었을까? 제사장 엘리가 듣지 못하던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린 사무엘은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민족의 소망은 엉망이 되어진 성전 한쪽 구석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첫 번째 전쟁으로부터 20년 쯤 지났다. 백성들이 받은 괴로움이 더해지던 때에 백성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때에 사무엘이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쳤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동안 섬기던 우상들을 버렸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겼다. 그러자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았다.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죄를 고백하였다.
물을 붓는 행위는 마음을 쏟아놓는 상징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시22:15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애2:19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이 민족은 지금 전쟁 때문에 미스바에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워서 미스바에 모였으며,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것을 뉘우치며, 우상 섬기던 것을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오히려 전쟁은 저들이 기도하러 모였는데, 적국 블레셋에는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고, 군대를 동원하여 치러 올라온 것이었다. 기도는 위대하다. 주님이 도우신다. 기도는 위험하다. 사탄이 시기하여 도발한다.
두 번의 전쟁 모두, 시대와 문명의 발달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불리한 지형에 처해있었다. 블레셋 족속들은 지중해 북쪽 지역에서 바다를 통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당시 철기시대의 문명으로 발전한 상태였으나, 가나안 지역은 아직도 청동기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농기구를 수선하려고 하면 쇠와 불을 잘 다루는 블레셋 지역으로 가서 부탁해야 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좋은 강철은 자신들의 무기로 만들고 타 민족에게는 잡철들을 섞어 망가지기 쉬운 연장들을 보급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제대로 된 무기가 귀하였다. 훗날 이스라엘에 사울이 초대 왕으로 등극하고 블레셋과 싸울 때에도, 이스라엘 진영에는 강철 칼이 단 두 자루밖에 없었는데 왕이 한 자루 왕자가 한 자루 가졌을 뿐이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소총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 탱크가 밀고 들어오는 겪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힘의 불균형 속에서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도하니까 사탄이 도발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기도하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은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오화께 부르짖었고, 여호와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 두 번째 전쟁이 첫 번째 전쟁과 다른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첫 전쟁은 이스라엘이 먼저 싸움을 건 것이었다. 자신감 가득히 싸우러 나갔지만, 그 싸움은 어떤 선지자의 외침도, 기도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도 없는 침략전쟁이었을 뿐이다. 싸움에 지니까 다급하게 여호와의 궤를 갖고 나갔다가 그것마저 빼앗긴 것이었다. 자신의 욕심에 하나님을 동원한 것이다.
둘째 전쟁은 기도하러 모인 이스라엘에 블레셋이 쳐들어 온 것이었다. 기도는 사탄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미워하는가 보다. 섬기던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한 것이 오히려 전쟁으로 비화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있었고, 전쟁에 무엇이 우선인지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저들에게 있었다.
전쟁 앞에서 백성은 기도를 요청했고, 사무엘은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옛적 광야를 행진해 올 때 기적과 승리의 상징이었던 여호와의 궤를 굳이 가져오려고 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은 이미 그들 속에, 기도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전쟁은 이미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전쟁이었고, 하늘에서는 벼락이 내렸고 이스라엘은 승리를 수확하였다.
사무엘은 백성을 모으고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웠고 그 돌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다. 에벤에셀의 뜻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 전에 빼앗겼던 땅을 다시 찾아왔고, 사무엘이 사사로 다스리는 동안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였다.
재밌는 것은, 첫 전쟁터의 지역 이름도 에벤에셀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전쟁의 끝난 다음에 멀리 처음 에벤에셀에서 멀리 떨어진 미스바 지역에 세운 돌의 이름도 에벤에셀이다. 사무엘이 이 돌의 이름을 일부러 처음 전쟁의 패배했던 곳의 이름을 빌려왔는지는 성경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20년 전 에벤에셀 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의 처절한 패배, 20년의 압제, 회개와 부르짖음, 두 번째 전쟁의 승리로 이어지는 고난의 세월의 마침표로 세워진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에벤에셀에서 시작된 전쟁이 에벤에셀에서 끝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은 두 번째 전쟁의 바로 그 날, 그 시간이 아니었다. ‘여기까지’라는 고백에 하나님의 도우심에는 그들의 과거, 패배, 고난의 역사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백성들은 고난의 세월을 겪으면서 스스로 뉘우쳐 하나님을 사모하고 부르짖었다. 사실 하나님의 가장 큰 도움은 두 번째 전쟁날에 블레셋 진영에 내리친 벼락이 아니라, 고난의 세월을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기도의 사람 사무엘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우상을 섬길 때에도, 사사요 제사장인 엘리가 무능하여 이스라엘의 예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돕고 계셨다.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전은 타락한 자들과 무능한 자들로 인하여 더러웠지만, 거기에서 자라난 사무엘은 정결했고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할만한 인물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기 원하셨다. 물을 길어 쏟음으로 우상숭배의 죄마저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 에벤에셀에서의 커다란 패배로 인친 치욕과 두려움의 마음마저 씻어주려 하신다. 전쟁으로 인하여 가진 두려움과 아픔을 오히려 전쟁이라는 과정을 통해 치유하셨다.
그래서 에벤에셀은 과거의 돌, 돌아보는 돌이다. 내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사야가 외친 적이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떨어진 자, 넘어진 자, 위기에 처한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과거가 있다. 어찌하여 떨어졌는지, 어찌하여 넘어졌는지에 대한 고백이 없는 기도는 자신을 속이는 일일 뿐이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기도, 회개가 없는 기도는 에벤에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막연히 ‘여기까지’가 아니다. 단순한 오늘 날자, 2019년 12월 마지막 주일까지가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온 나의 시간들과 오만과 게으름과 연약함과 핑계들과 간절함과 회개와 눈물과 금식을 통틀어 ‘여기까지’ 도우신 것이다.
감사한 것은 이스라엘은 죄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셨다는 점이다. 되돌아보면 항상 우리보다 하나님이 더 많이 기다리셨다. 우리보다 하나님이 더 오래 참으셨다. 그 모든 시간들 속에서 ‘여기까지 하나님이 도우셨다’.
코로나로 인하여 어려운 시국에,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한 사람도 이 치명적 질병에 노출되지 않도록 도우셨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지 못하는 중에도, 이미 문명의 발전을 따라 이렇게 온라인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길도 열려있었다. 많은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에,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에벤에셀의 돌은 돌아봄의 돌이다. 낮아짐의 돌이다. 내려놓음의 돌이다. 그런 고백을 진심으로 드리는 사람이 세울 수 있는 돌이 에벤에셀의 돌, 회복의 돌, 도움의 돌이다.
에벤에셀의 돌은 과거의 돌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돌이다. 여기까지 주님을 의지한 자, 여기까지 주께서 도우신 자, 주께서 도우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앞으로도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게 된다. 재수가 좋았다거나, 내가 조심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미래에도 그렇게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이 돌을 세운 후에 사무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벧엘은 과거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으로서 제단을 쌓은 곳이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들어온 첫 지역으로 거기에 열두개의 돌을 세워 기념하였으며 가나안 땅에서의 첫 제단을 쌓았었다.
미스바는 사무엘이 백성들과 함께 모여서 우상숭배를 그치고 회개의 제단을 쌓았던 곳이다.
모든 지점이 에벤에셀의 지점이다. 모든 에벤에셀은 예배의 자리이다. 에벤에셀의 고백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도우신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이제 정말 이런 날이 있을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친 2020년을 보내고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린다. 오늘 드리는 예배, 오늘 우리가 쌓은 예배의 단이 바로 에벤에셀의 고백이 되기 바란다. 주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으니, 이어질 우리들의 모든 걸음과 삶의 여정에도 주의 도우심을 힘입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