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성탄절 말씀

고요한 날 거룩한 날

성경: 누가복음 2장 8-20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베들레헴은 다윗이 고향이지만, 유대의 역사에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하다. 그날 태어나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예수를 주목하여 본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시던 날은 그저 평범한 날이었고, 평범한 밤이었다. 천사의 찬양소리는 들에서 밤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만 들렸다. 그들은 천사의 지시대로 아기를 찾아가서 부모에게 천사의 소식을 전하였고, 다시 양떼에게로 돌아갔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언제쯤 베들레헴에 도착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아이에 대하여 왕의 군사들이 수소문을 해도 찾을 수 없었으며 그후로 잊혀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성경에도 예수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제자들이 주선해서 예수님 생일잔치를 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성경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모든 이야기속에도 예수님의 출생 자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부활과 승천, 재림의 이야기는 성경에 가득하지만, 초대교회에 주님의 탄생은 상대적으로 주목받는 날이 아니었다.

성탄절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크리스마스 = christ + mass, 영어로 크라이스트는 성경에 쓰여진 그리스도이며,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로서 ‘구원자’의 뜻이다. mass는 예배를 뜻하는데 카토릭에서는 미사라는 말로 사용한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의 단어적 뜻은 ‘그리스도예배일’이다.

엄밀하게 성경에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실제로는 태어나신 날을 모른다. 그러므로 이 날은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기보다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양을 치면서 밖에서 지키는 계절이라면 겨울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12월 25일을 주님 탄생일로 기념하게 되었을까?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4세기 초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이 1월 초에 예수의 탄생을 축하했다는 파피루스의 기록이 있다.

로마의 권력은 예수를 처형하였지만, 훗날 로마제국 자체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로마에는 태양신을 경배하는 이교도들의 축제일이 있었다. 감독 암브로스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로운 태양’이라고 하였는데, 그동안 이교도들의 축제일이었던 12월 25일을, 이제부터는 공식적으로 예수께서 오신 날로 기념하게 되었다.

이 배경은 이 날자에 대한 반감을 가져오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는 이교도의 축제일이었던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을 반대한 사람도 있었고, 영국의 청교도 혁명 때에는 의회를 장악한 청교도들이 성탄절 지키는 것을 폐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1800년대 초반까지도 성탄절은 그렇게 드러내놓고 기념하는 날도 아니었다.

요즘 어떤 이단은 이런 배경이야기를 가지고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교회가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현혹하는데, 이 날이 예전에 이교도의 축일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성탄절을 기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 로마의 많은 시민들이 이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의미있는 날이라는 점도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는데, 사용하는 달력이 달라서 그렇다. 현대에도 일부 국가에서는 12월 25일과 1월 7일을 둘 다 성탄절로 지키는 경우도 있다.

성탄절의 진화

역사적으로 성탄절이 오늘날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축제의 날이 된 것은 1843년에 발표된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이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도시화되면서, 소시민들의 삶은 축제와 놀이를 빼앗기고 항상 일터로 내몰리고 있었으며, 당시 영국 빈민층 아이들은 학교는커녕 공장과 탄광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씩 노동환경에 내몰리도 했다.

찰스 디킨스는 그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사실 소설보다는 그 주인공인 스크루지 영감이 더 유명해진 이 소설을 통해 돈과 일에만 집착하던 세대를 풍자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돈보다 가족, 여유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소설에 사람들은 열광하였고, 가족끼리 모여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에는 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감격하였다. 덕분에 온 가족이 모여 축제처럼 모여 즐겼고, 힘든 노동 속에서 위로를 얻었다. 당시 이 소설과 찰스 디킨스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가 죽었을 때에 어떤 어린이는 ‘이제 크리스마스는 없어진건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의 의미에 굉장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이전까지는 오로지 종교적 의미의 기념일이었지만, 디킨스 이후로 크리스마스는 교회의 영역에서 뛰쳐나가 가족 중심의 휴일이 되고, 아이들을 축복하는 날이 되고, 국가적 가치를 지닌 기념일이 되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의 전통으로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 시대에 이뤄졌다. 크리스마스 캐롤, 크리스마스 카드,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 파티, 크리스마스 트리 등등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조차 이 소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요소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애굽인들의 전통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고, 캐롤은 합창이란 뜻의 코러스에서 비롯된 말로 오래 된 캐롤은 500년 전에 벌써 많이 만들어졌지만 디킨스의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형식으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미국을 중심으로 성탄절을 공휴일로 정해서 점점 퍼져나갔지만, 미국답게 상업적 목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상업화의 중심에서 산타클로스가 부각되었다. 산타클로스의 모델은 본래 1700년 쯤 전에 터키지역에 살던 목회자 니콜라스인데,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모두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하였다. 이분을 기념하여 매년 12월에 성 니콜라스 데이를 지켰는데, 800년 쯤 전에 프랑스의 수녀들이 니콜라스를 본받아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이때부터 산타클로스의 성탄절 선물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성 니콜라스는 성자 니콜라스라는 말인데, 라틴어로 상투스 니콜라우스가 네덜란드에서 산 니콜라우스라고 불렸고 항해의 수호자로 모셨는데, 네덜란드로부터 미국 뉴욕을 건네받은 영국이 영어식으로 산타클로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한 문학가가 뉴욕의 수호신으로 선포했다. 그때부터 백화점 광고, 콜라광고에 등장하게 되었다. 본래 성 니콜라스가 목회자, 3세기의 주교였고, 주교의 옷 색깔이 빨간 것이었기에 산타클로스의 옷도 빨간색이 되었는데, 현대에는 콜라 광고의 이미지로 더 유명하게 되어버렸다.

현대에 12월 말에서 1월 초까지의 시간을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난 세기 후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인종적, 종교적 다양성의 주장이 힘을 얻어 홀리데이 시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북미에서는 종교중립적 사회 분위기로 인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가 ‘해피 홀리데이’라는 말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홀리데이’라는 말 자체가 종교적 의미를 포함한다고, 그것마저 빼버리자는 극단적 목소리도 있다.

우리의 성탄절

해방 이후 미 군정에서 성탄절을 휴일로 정했고, 정부가 들어서면서 바로 기독탄신일이라는 공휴일로 정해버렸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3% 내외로 알려져 있었는데, 성탄절이 공휴일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은 지금도 공휴일이 아니라고 한다. 기독교인들의 날이 공휴일이 된 것에 대해서 종교에서 많이 항의하였고, 소송을 통해 1975년에 석가탄신일도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전 세계에서 흔치 않은 두 종교의 기념 휴일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들 중에는 성탄절 포함 이틀 연휴인 국가도 많고 동유럽 쪽에는 사흘 연휴인 나라도 꽤 된다.

이날을 교회만 반긴 것이 아니다. 성탄절을 겨냥한 산업도 커졌고, 그날 밤에는 늦게까지 가게 문이 닫히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에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도 있다. 왜 성탄절에 ‘나만 애인 없다’는 얘기가 왜 나오는건데? 남의 거룩한 날, 남의 생일에, 엉뚱한 이야기가 끼어들었다.

우리나라에서 크리스마스가 모든 휴일중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은, 가족에 얽매이지 않는 휴일임과 동시에, 해방 후 실시되고 있던 야간 통행금지에서 자유한 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방 후 미 군정청이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했는데, 36년동안 시행되다가 1982년에서야 통행금지가 없어졌다. 당시는 밤 열시 넘으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고, 밤 열두시가 넘으면 자진해서 파출소에 찾아가 4시까지 기다리다가 집에 가야 했으며, 통행금지 걸려서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는 핑계도 만들어 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성탄절 전날에는 통행금지를 해제하였고, 그날은 밤새 거리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교회는 성탄절 새벽에 각 가정을 방문하여 찬양하는 ‘새벽송’을 진행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쓴 글에서 자신의 크리스마스 기억은 캐롤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24일 밤에 교회에 찬양하거나 졸다가 새벽이 되면 조를 편성하여 각 지역으로 흩어져가면서 새벽송을 불렀다. 어떤 할아버지 집사님은 쌀 뻥튀기를 한 자루 준비해 주셨고, 어떤 집은 당시에는 귀하던 커피를 대접하였다. 새벽송을 돌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면, 가지고 돌아온 선물이 가득 쌓이고, 일부는 나눠 먹고, 일부는 또 다시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였다.

그것도 지나가는 유행이었을까? 이제는 보기 힘든 모습이 되어버렸다. 하긴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축하 재롱도 언젠가 시작되었듯,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성탄절이면 교회를 잠시 떠났던 사람도 다시 찾아오곤 했는데, 요즘은 교회 열심히 다니던 청년들도 성탄절에는 다른 곳에 약속이 있다고 하는 시절이 되었다.

교회의 행사, 성가대의 칸타타와 축제, 성도들이 서로 나누는 선물과 함께 하는 식사의 광경도 예전과 달리 사람들의 관심이 희미해져가는데, 더구나 올해는 코로나 시국으로 인하여 그마저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올해의 성탄절

올해는 아이들의 재롱도 없고, 성가대의 찬양도 없으며, 예배 후 떡국 잔치도 없고, 반갑게 나누던 성탄 축하 인사도 없다. 오직 예배만 남았다. 그것도 온라인으로. 그때 문득 생각한다. 타의로 떼밀렸지만, 지금 보니 2000년 전 성탄으로 되돌아온 셈이 된다.

다시 크리스마스가 조용해졌다. 떠들썩하던 인파가 없고, 우리끼리 축하하던 인사도 없고, 화려한 장식도 없고, 선물도 없고, 아이의 재롱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함박웃음도 없다. 그 발표회는 축제였고, 그 노래와 춤들은 우리의 기쁨이었고, 이날은 주님의 허락으로 기쁨의 날이었지만, 모든 화려한 것들이 문득 여기에서 멈췄다.

그러나 성탄이 멈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올해에 이러한 상황에서 성탄절의 본래 의미가 더 잘 드러나는 은총을 누리고 있다. 오히려 성탄을 더 주의 깊에 들여다보게 된다. 첫 성탄이 이와 같았을까 생각해 본다.

베들레헴 찾아왔던 목자들이 돌아가고 난 뒤, 그 밤에 그 마굿간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냥 어둠이었을까? 무언가 성스러운 기운이 머물렀을까? 아기 예수는 태어나서 많이 우셨을까? 마리아와 요셉은 이렇게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으로 밤을 지냈을까? 정말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을까?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로 되돌아가보자. ‘예수님 성탄 축하해요’라는 말 대신에 이게 무슨 일인지를 다시 고백해보자.

이 날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날이다. 이 날은 어두워 소망이 없던 인간 세상에 하늘로부터 구원의 빛이 비친 날이다. 세상 수많은 사연과 인생들 중 하나에 불과하던 내 삶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과 약속을 얻게 된 날이다.

본문에 천사는 두 마디의 말을 하였다. 하나는 목자들에게 한 말씀이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다른 하나는 천사들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이야기가 아이 예수의 부모에게 전해졌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두 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가지를 오늘도 확인해야 한다.

첫째. 이것이 내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가?
둘째. 그로 인한 평화가 내게 있는가?

성탄절이 기쁨인 것과, 하늘 평화가 내 안에 깃드는 것은 백화점의 화려한 성탄장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주인공으로 모실 때에야 그 기쁨, 그 평화가 내게 임하는 것이다.

언젠가 국내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탄절에 가장 많이 생각하는 이미지는 산타클로스였고 그 다음은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예수라고 대답한 학생은 7%정도에 그쳤다.

성탄절의 주인공을 되찾아야 한다. 성탄절은 산타클로스의 날이 아니며, 방송에 나와서 웃고 떠드는 빨간 옷 입은 연예인의 날도 아니고, 성탄 케잌 자르는 날도 아니고, 심지어 성탄절은 가족의 날도 아니다.

성탄절은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날, 죄인들을 위해 순결한 목숨을 주시려고 어두운 세상에 빛의 발걸음을 내딛으신 날이다. 이 귀한 일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다면, 하나님 아들의 일을, 일개 인간인 내가 기뻐할 수 있다면, 그로서 내 삶의 차원이 달라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에 세 단계가 있다고 했다.
첫째 단계는 미학적인 실존이다. 순간적인 아름다움이나 쾌락을 추구하여 끊임없이 떠돌며 방황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단계에서 인생의 목적은 건강, 아름다움, 풍요로움, 즐거움 등등 인격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며, 이것들에게 노예가 될 수 있는 단계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실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 단계는 윤리적 실존이다. 개인적 만족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윤리의 단계로 올라선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다든지, 정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이것은 보다 큰 차원의 아름다움이지만, 인간 존재 자체의 부족함을 인하여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셋째 단계는 신앙적 실존이다. 인간의 악함 앞에서 어떤 사람은 그걸 인간의 본질로 받아들여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가 되지만, 다른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 인간의 연약함과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에 걸려 넘어진다. 인간의 역사와 시간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존재, 순간 속에 찾아오신 영원자를 이성으로 이해하려 하는 사람은 이 세 번째 단계에서 실족하여 현실에 머물게 된다.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일을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바라보는 자리, 2000년 전의 사건이 내 삶에 절대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오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리, 세상은 자기들의 필요대로 축제로서의 성탄절을 즐기지만 이 날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된 날이라는 고백, 믿음은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믿을 필요가 없다. 이해되지 않기에 믿는 것이다.

올해 코로나로 인하여 성탄절의 세속화에 문득 제동이 걸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순결한 성탄절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우리는 이날을 세상의 날, 공휴일, 연인들의 날, 년중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날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날, 하늘과 땅이 만난 날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날에 모든 많은물 성도들의 마음과 삶에 주님 은총으로 가득하기를 바란다. 이날에 모든 많은물 가족들에게 하늘의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이날에 온 세상에 성탄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은총이 다시 새롭게 기억되는 날이 되기를 축복한다.

2000년 전의 그 밤이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었다면, 오늘 우리의 성탄은 고요하기에 더 거룩한 날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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