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0일(대림절4주) 주일설교
빛과 어두움
요한복음 3장 16-21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인공위성에서 밤에 지구를 찍은 사진이 있다. 전기불이 환한 곳은 산업이 발달하고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고, 그렇지 않은 곳은 어둡게 찍혔다. 평양을 제외한 북한 대부분이 어두웠고, 우리나라는 강원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환하게 비쳐졌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사람들은 어둠을 몰아내는데 힘썼다. 예전에는 밤을 지배하는 세력을 두려워하여 불을 밝혔지만, 현대인들은 더 많은 생산성과 편의를 위해 불을 밝힌다. 이젠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에는 거의 다 전등이 들어있어서, 예전이라면 집집마다 비상용으로 꼭 비치하던 성냥과 초가 주변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이전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불과 빛을 소유하였다.
그러나 빛이 강해진만큼이나 그림자는 더욱 어두워진다. 거리와 골목은 분명 밝아졌지만, 세상은 오히려 어두워져간다. 풍요와 성공을 상징하는 높에 솟은 빌딩의 그림자 속에는 노숙자들의 숫자가 늘어간다. 지구상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아파트 숲이 만들어져가는 동안, 전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쪽방과 벌집들도 가득하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은 꼭꼭 숨지만, 그 농축된 어둠은 숨이 막히도록 위험하고 절박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이토록 혼란하고 어두운 것은, 아무리 강한 불빛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비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환한 조명을 의식하여 화장을 짙게 하고 맵시 있는 옷을 입지만, 애써 겉을 꾸밀수록 속을 단장할 시간과 비용을 아까워하기 마련이다.
성경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빛으로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 빛은 형광등과 같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다. 예수의 빛은 불 꺼진 방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의 어둠, 세상 사람들 사이의 어둠, 비정하고 차가운 현실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다.
그 어둠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에 가득하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손해를 아랑곳하지 않는 어둠이다. 권력을 소유하기 위해 간첩 조작도 서슴치 않는 어둠이다. 큰 기업의 경영을 위해 작은 기업의 기술을 빼앗는 어둠이다. 우리 지역의 집값 하락을 막기 위해 혐오시설은 다른 지역에 지으라고 시위하는 어둠이다. 자기 편 사람의 불법 논문에 대해서는 고발한지 일년이 지나도록 수사를 시작도 하지 않고, 남의 편 사람의 표창장에 대해서는 100곳이 넘게 압수수색하는 어둠이다. 세상에 빛으로 세운 교회인데, 코로나 시국에 오히려 세상의 민폐가 되고 있는 어둠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귀한 이름을 주셨는데,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그 귀한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어둠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속이고,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사람과 임금을 차별하는 어둠이다.
세상의 발전이 곧 인간의 발전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그것을 누리는 인간의 삶을 편하게는 하였지만, 인간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했다. 노벨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해서 산업혁명에 크게 이바지하였지만, 다이나마이트가 가장 효과적으로 쓰이는 곳이 전쟁이라는 점에 절망하였다. 원자력은 현재까지 인간이 개발한 가장 강력한 힘이지만, 발전이나 의료에 쓰이는 것의 수천배의 힘이 폭탄으로 만들어져서 인류의 멸망을 겨냥하고 있다.
물론 모든 인간이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함을 추구하는 사람도 많고,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동시에 악에 물든 사람도 많고, 양심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만약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숫자가 같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생수 한 통에 먹물 한 방울이면 오염되지만, 오염된 물 한 통에 생수 한 방울이 아니라 깨끗한 물 한 통을 다 들이부어도 생수가 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악의 힘은 강하다. 궁극적으로는 선이 이길지 몰라도, 인생은 짧고 우리는 그 궁극적인 시점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볼 수 있는 것은 악이, 어둠이 그 세력을 떨치는 모습들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면 온 연못물을 흐리게 할 수 있으며, 불량배 한 두명만 설쳐도 온 마을이 뒤숭숭하며, 매국노 친일파 몇 사람이 나라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이 악의 힘을 보여준다.
악은 강력하다. 체면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다. 악은 강력하다. 선이 대화를 준비하는 동안 악은 주먹을 내지르기 때문이다. 악은 강력하다. 선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얻어낼 결과를, 악은 폭력과 강포로 순식간에 달성하기 때문이다.
어둠의 힘은 강력하다.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항상 그래왔다. 인간은 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했는가? 예수님 때에만 그랬는가, 지금은 어떤가?
비정하고 어두운 세상을 탄식하는 로마서 3장의 말씀을 보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이 이야기가 2000년 전 팔레스타인보다는 오히려 2020년대 지구, 한반도의 상황에 더 적절한 묘사가 아닐까? 사람들이 예수를 싫어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땅에서 비로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예부터 그래왔다. 요한복음이 전한 바로는 처음부터 예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단순히 알아보지 못하거나, 영접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여기에 왜 인간이 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는지의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였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구원은 두 측면을 갖는다. 영원한 구원과 현재의 구원이다. 영원한 구원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로서, 죽음 이후의 천국, 영생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의 구원 역시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로서, 예수를 믿는 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릴 구원이다. 이건 개인적인 것뿐 아니라 인간 사회를 향한 선언이기도 하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라는 이사야 65장의 비전은 육식동물의 초식동물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피할 수 없는 삶의 법칙으로 인정하는 이 비정한 인간세상을 바꾸시겠다는 약속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통용되고 사람들이 다들 인정하는 삶의 원리를 바꾸기 원하셨다.
힘보다는 사랑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되기 원하신다. 다스림보다 섬김이 세상의 가치가 되기 원하신다. 지식인들과 권력자들로 가득한 바리새인의 집보다 세리와 죄인의 집에 들어가기 원하신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원칙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의 법이다.
돈이 있는자가 복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복되며, 땅을 가진 자보다 온유한 자를 복있는 자라 부르며 돈과 땅에 목마른 자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를 존경하는 세상이 되기 원하신다.
예수의 말씀을 단순히 상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이 전부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예수의 말씀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개인이 실천해야 할 삶의 기준으로 제시하신 것이며,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대로 살아가신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어려운 말씀이라면, 무엇이 어려울까?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까, 행하는 것이 어려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렵다. 악한 자는 끝까지 악한 삶의 방식을 고수할 터인데, 내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만 한다면 대체 어느 세월에 공평한 나라,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유럽 전체가 기독교 국가로서 천오백년을 지냈는데, 로마시대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중세 암흑시대라고 일컽는 인권과 정의가 실종된 시대를 지내지 않았던가?
아니, 사람이 정말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교회와 인간이 예수의 뜻을 오해한 지점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할지에 대해 다툼이 일어났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께 와서 자기의 아이들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주시기를 청탁하였다. 그때 주님은 탄식하며 대답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두 가지 삶이 담겨있다. 섬김의 삶과, 대속의 삶이다. 그중에 대속의 삶은 세상의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길이니, 우리가 참여하고 거들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섬긺의 삶은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신 예수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아가신 것은 단순하게 당신의 취향이 그렇다거나, 그냥 보여주신 것에 그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따라할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섬긴다고 해서 비굴해지라는 말이 아니다. 섬기는 신분이라고 해서 비천한 자리가 아니다. 우리가사용하는 장관이라는 말은 행정부서의 우두머리는 뜻하는데, 영어로 minister라고 쓰는 장관의 의미는 ‘섬기는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minister를 장관, 목회자로 설명하고 있다. 사람 자체가 높다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하게 섬겨야 할 자리라는 의미다. 지위든, 돈이든, 지식이든 그가 가지고 있는 것, 걸치고 있는 옷, 앉아있는 자리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인간 자체가 사람다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 가르침은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가 변하는 것에 제일 민감한 사람들은, 기존 질서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다. 지난 여름을 지나면서 의료계가 파업을 한 이유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함이요, 판사와 검사들이 개혁에 저항하는 것도 자기들의 몫을 빼앗기기 않으려는 투쟁이요, 언론들이 부동산 기사를 쏟아내는 이유도 자기들 회사 내에 만들어놓은 부동산 투자기관들의 사업을 유지하려는 욕심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예수를 떠난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에 바리새인들이 발끈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권력자들이요 기득권자들인 대제사장 무리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다. 자기들이 판을 짜놓은 세상을 예수께서 뒤흔드는 것을 참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어둠에 속한 자들이다. 빛으로 오신 예수는 그들의 어둡고 추악한 면들, 감춰져 있던 지식인의 위선과 종교인의 허상을 밝혀버렸다. 저 사람들은 어둠을 버리고 빛으로 나아오기보다, 빛을 꺼트려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직접적으로는 당시 바리새인, 대제사장, 헤롯당원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 그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지배층과 피지배층,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는 세상 질서를 옹호하던 자들, 익숙해져서 벗어날 줄 모르는 자들, 결국 인간들이 죽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힘의 질서에 이미 가담한 교회들은 그 힘이 주는 달콤한 유익을 뿌리치지 못한다. 먼저 움직이는 것이 교회여야 한다. 먼저 움직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주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의 전환을 선언하신 것이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근본 인식을 바꾸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인간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세상을 바꿀 패러다임의 변화
엊그제 대통령 담화 중에 탄소중립선언을 하였다. OECD 국가의 가장 중요한 아젠더는 기후변화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유럽과 북미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회 이슈 중 하나다. OECD 국가의 시민들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제발전 공약이나, 자기 지역 발전 이야기를 하는 정당보다 기후변화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정당에 표를 준다. 기후변화가 경제보다 시급하다는 것이 벌써 선진국이 된 나라들의 깨달음이다.
물론 거기에도 경제위기가 있고, 정치의 부패가 있고, 사회 문제가 많다. 더구나 유럽과 북미는 물론 전세계에서 코로나는 우리나라의 경우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기후변화보다 급하지 않다. 이를테면 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지만, 백신과 치료제가 보급되면 예전 사스나 메르스같이 해결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기후변화는 우리가 사는 지구 자체를 망가트리고 있는 시급한 일이다.
탄소배출은 기후변화의 상징이요 주범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개발이나 공장이나 교통 등 산업 전반에서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그에 따라 탄소를 대기중에 방출한다. 그래서 기온이 높아지고 해수면이 상승한다.
미국의 비영리재단 클라이밋 센트런이 연구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 20년간 바다 수면이 8cm 상승했다. 그런데 제주도 바다는 지난 40년간 20cm 상승했다. 현재상태로 기후변화가 가속되면 2030년에 이르면 서해안에 만조가 되고 강력한 태풍이 겹친다면 인천공항도 물에 잠기는 것으로 나타났고, 수십년 후에는 당진과 군산 등의 서해안지역의 상당부분은 바다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으로 계산되었다. 이제 유명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거의 매년 물에 잠기고 있다.
문제는 인간이 배출한 탄소가 즉각 대기에 미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일어난 현상은 수십년 전까지 인류가 배출한 탄소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이다. 탄소배출에는 지연현상이 있다. 마치 6월22일 하지가 해는 제일 길고 햇빛은 머리 위에서 내리쬐지만 8월이 더 더운 것처럼, 인간이 배출한 탄소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것은 수십년의 차이가 나게 되고, 현재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약 십년 정도면 지구의 자체 시스템으로는 복구할 수 없는 경계를 넘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파리협약에서 지구온도 2도에서 저지하기로 결의했다. 지금 배출 상황이 지속되면 2100년에 3도 상승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구는 어떻게든 진행되겠지만, 인간의 문명은 더 이상 지속되기 힘들다.
중국에서 황사가 날아오고, 중국 동해안의 공장지대에서 미세먼지가 날아오는 것은 우리나라가 직접 느끼는 불편함이지만, 실은 이런 것들이 위험한 것은 지구 자체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 탄소배출의 37%가 발전부분이 발생시키고, 그중에 화력발전소가 3/4을 차지한다. 중국은 전세계 석탄의 50%를 소비하고 있으며, 전세계 이산화탄소의 25%를 배출하고 있다. 미세먼지는 단순히 호흡기의 질환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구를 무너트리는 신호라는 점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중국만 탓할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화력발전소를 어마어마하게 지었다. 전기가 필요하니, 다른 시설에 비해서는 쉽게 지을 수 있는 화력발전을 선택했겠지만, 이거야말로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는 말이 적당한 경우다. 비유해본다면 집안이 춥다고 문짝 뜯어서 난로 지피는 격이다. 이런 것을 경제 논리, 정치 논리로만 보지 않고 환경의 관점에 보는 것이 패러다임의 변화다.
기후 변화는 우리가 살아온 방식, 추구하던 방식 자체를 바꾸라는 요구다. 겨울철에 실내 온도 1도 씩만 낮춰도 지구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액체비누나 샴푸 등은 대부분 화학제품인데, 고체비누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지구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식의 체계, 인간의 삶을 이루는 기본이 변하고 있다.
지구의 삶에서도 그러하지만, 태어나면 한 평생 땀흘리며 살다가 나이 들면 죽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인류에게, 주님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시작하셨다.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사실 이미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모르고 있고, 알면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가장 큰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미 2000년 전에 시작되었다.
예수의 오심이 바로 그 전환점이다. 그래서 역사도 주님 오시기 전과 주님 오신 후로 나뉜다.
요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주님은 율법이 지배하던 세상을 사랑의 법으로 바꾸셨다. 그렇게 선언하시고, 그렇게 살아가셨다. 율법은 유대인들을 지배하던 법과 정치와 성공의 방식, 살아가는 방식의 전부를 의미한다.
“옛 사람에게 너희가 배웠고,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의가 살면서 경험하였고, 그게 인생이라고 배웠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를 주목한다. 세상의 성공방식, 세상에서 살아남는 악착함이나 처절함으로 옷입지 말라. 그런 것들은 허물진 인간의 가치, 세상의 가치, 어둠의 가치들이다. 돈에도 명예에도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아가라. 그것은 빛의 옷이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다. 그리스도인은 빛의 사람들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은혜와 평강을 천국에 가서나 누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 은혜와 평강은 살아서 누리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이건 우리 신앙의 거대한 기본 전제를 바꾸는 일이다. 예수의 오심을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로 바꾸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탄은 빛으로 오신 예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 빛이 버겁고 두려워서 다시 어둠으로 숨어들지 말라고, 지금도 빛으로 오시는 분이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