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3일(대림절3주) 주일설교

그가 오신다

성경: 누가복음 3장 1-6절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올해는 성가대의 찬양 없이, 아이들의 축하 인사 없이 성탄절을 맞아야 할 것 같다. 섭섭한 것도 있지만, 오히려 그 행사에 가려져 있던 우리의 진심이 드러나게 될 것 같다. 우리의 성탄이 얼마만큼 기쁜지, 각자에게는 얼마만큼 의미가 있는지가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 생일잔치에 예수보다 손님들만 가득했었다면, 이번에야말로 주인공만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성탄절을 축하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 축하드리는 것이 아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이천년 쯤 늦은 축하고, 급으로 따져도 인간이 신에게 축하할 자격은 아닐 것이다.

성탄의 축하는 우리들끼리의 축하다. 나에게 예수가 얼마나 큰 기쁨인 줄 알기에 누군가가 축하해주고 있다. 너에게 성탄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기에 내가 축하해주는 것이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가 성탄을 축하해도 별 감동이 없다. 남의 일에 내가 축하는 받는 기분일 것이다. 지금 예수와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모르기에 누군가에게 성탄을 축하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성탄을 축하하면 내가 더 감동한다. 그건 내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기에, 누군가에게도 성탄을 축하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은 과거의 어느 날이 아닌, 현재의 성탄이다. 누군가의 절기가 아니라 나의 명절이다. 아이들과 성가대의 성탄 축하가 아니라, 내 영혼의 노래이어야 한다.

주가 오신다

2000년 전 베들레헴에 오셨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은, 그의 현재 시간에 예수를 만났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태어나신지 30년 쯤 된 때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를 만났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성탄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태어나신지 대략 35년쯤 된 시점에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를 만났다. 예수는 그 때에 바울에게 오셨다.
386년 늦은 여름, 어거스틴은 오랜 방황을 끝내고 예수를 만나고 회심하였다.
1738년 어느 수요예배 중에 영국 목사 존 웨슬리는 예수를 만났다. 웨슬레에게는 그 때 예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의 오심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오늘은 누가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이번 성탄에 예수는 누구에게 찾아가실까. 누가 예수의 기쁨을 누릴까. 그 기쁨에 누가 참여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예수는 우리 각자의 삶에 오늘도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점, 예수는 그걸 바라신다는 점이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베들레헴 촌락에 은둔하거나 은거하신 분이 아니었다. 예수는 가만히 앉아서 명상과 사색에 잠겨있는 도인이나 철인이나 종교지도자가 아니었다. 주님은 인간의 삶의 현장에 직접 오셔서 역사하셨다. 온 누리에 내리는 비처럼, 옷을 뚫고 몸을 적시는 이슬비처럼, 주님은 우리의 삶 깊숙히 임하신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부두 노동자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었다. 부두 노동자들이 고용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본 목사님은 자연히 노동자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고용주들이 목사님께 대들었다. ‘당신은 당신 교회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부두의 노사문제에 개입하지 마시오.’ 이 때 그 목사님이 대답했다. ‘여기가 나의 교회요.’ Here is my church!

예수께서 유대 땅에 오신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던 데 비해 반대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백성을 버리거나 떠날 수가 없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속에 예수가 오시면 희망이 되살아났다. 병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 예수가 오시면 병자들이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다. 배고픈 사람들이 있는 곳에 예수가 오시면 배부르게 먹는 역사가 나타났다. 죽음이 있는 곳에 예수가 오시면 부활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자기들에게로 오시기를 고대했다. 그 주님이 오시면, 그 주님이 오시면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오실 때에 즐거움이 있는 그 반대편에, 예수의 오시는 의미를 오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성경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예수께서 찾아오시는지 말해주고 있다.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

주님은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 찾아오신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제자들이 바다 위에서 풍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은 그들이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누가 바람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기껏 흔들리는 배와 노를 힘써 붙들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원망만 할 뿐, 고치려 하지 않는다. 고난의 세월, 풍랑 가득한 세상은 컨트롤 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건 우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질병의 확산, 세상의 혼란, 양극화, 정의의 실종, 파산, 친구의 배신 등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냥 죽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노를 저을 뿐이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신다. 풍랑을 이기지 못할 뿐 아니라, 풍랑 속에서 주님을 찾을 줄도 모르는 그 연약함을 아신다. 그래서 몸소 그 풍랑 속으로 다가오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는 그들을 그 고난에서 구해주시고 평안한 뱃길을 인도하실 터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고 놀라서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무서워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아는 것, 지식과 경험이라는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너무 익숙하고, 그가 곧 세상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요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러나 그 미련한 인생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신다. 겨울이기에 찾아오시고, 봄이기에 찾아오신다. 따뜻하게 녹여주시려고 찾아오시고, 새싹을 틔우려고 찾아오신다.

희망을 빼앗긴 자에게

주님은 희망을 빼앗긴 자, 잃어버린 자에게 찾아오신다.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연못에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있었다. 그 이유인 즉은, 가끔씩 천사가 내려와 그 물을 동하게 하면 그 때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한 중풍병자가 물이 동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누워있었고, 언제나 더 빨리 뛰어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절망의 시간으로 변해버렸다. 돈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사서라도 거들어줄텐데, 가족이나 변변하다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이 병자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38년 된 병자라는 말은 그에게 소망이란 없다는 말과 같다. 있던 희망이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기회는 있다지만 내게는 없다. 그럴 때 인생을 지탱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소망 없음에 익숙해져서, 이렇게 살다가 천국 가련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절망에 익숙해져서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내 세상엔 본래 희망이 없었다고 말한다. 가끔씩은 기적과 우연을 기다리며, 복권은 내게도 당첨될 수 있다고 여기며 위로한다.

기적과 우연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베데스다 연못 물이 움직이는 것도 기적인데, 거기에 내가 들어가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어야 한다. 희망조차 빼앗긴 자에게, 그걸 원망할 힘마저 없는 자에게 예수는 찾아오신다.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외로움과 영혼의 절망에 빠져 아무런 소망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는 그에게 예수께서 다가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기적을 기다리며 깔아놓은 자리를 거둬들고 거기를 떠나야 한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다. 그 자리를 깔아놓은지가 38년인지 3년 8개월 된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이 주고, 기적이 주는 희망은 진실이 아니다. 그건 본래 허상이었다.

내가 빼앗긴 희망을 돌려달라고 눈물 흘릴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선물처럼 주시는 새 희망을, 새 삶을 가져야 한다. 진짜 희망은 예수를 만나 새로운 길을 가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관습에, 세상에, 경험에, 과거에 묶여 있다. 주님은 그걸 풀러 오신 분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을 불러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여있는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보내셨다. 그 줄을 풀어야 예수를 태울 수 있다.

특히 현대인들은 여러겹 줄로 세상에 매여 있다. 조금 더 받는 연봉, 조금 더 큰 집, 조금 더 많은 돈, 조금 더 큰 재미, 조금 더 많은 자랑거리, 더 큰 욕심과 죄에 매여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다들 거기에 묶여있으니, 그게 오히려 정상처럼 보인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깨우쳐주고 있다.

의인은 없는데 하나도 없다.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 저희 목구멍은 열려있는 무덤이며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탄은 새 빛이 비치는 날이다. 그건 예전에 꺼져버린 등불이 다시 깜빡이며 켜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새 빛, 새 희망으로 비추이는 빛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에 그리스도인은 어둠보다 빛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 희망은 빼앗겨도 괜찮다. 그건 본래 세상이 주었다가 빼앗는 것이다. 당신은 좀 더 일찍 빼앗겼을 뿐이다. 새로운 길을 가는 자에게 세상에서 빼앗긴 희망은 오히려 주님의 긍휼을 얻을 자격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포기한 자에게

주님은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 고난 당하는 인생에게 찾아오시고, 오랜 질병과 외로움으로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연장시켜 가는 희망 없는 인생에게도 찾아오시며, 심지어 죽은 자에게까지도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나사로는 죽은지 벌써 나흘이나 된 상태였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날로 장례식을 치뤄버린다. 그들의 무덤은 큰 바위에 구멍을 뚫고 시체를 넣은 다음 돌로 뚜껑을 만들어 덮는 것이었다. 그 돌은 예수의 무덤에서 보듯이 혼자서는 열지 못할 정도의 무게였다.

주님 말씀하셨다. ‘무덤에 돌을 치워라’ 그러나 예수의 가장 가까운 자들까지도 이 말에 의아해했다. 마리아도 조심스럽게 말한다. ‘죽은지 나흘이나 됐고, 벌써 냄새가 납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났다는 점, 더구나 그 돌무덤에 장사를 지냈다는 것은 이 경우에는 38년 된 중풍병자가 가졌던 일말의 기대나 희망조차도 사라진 후였다. 사실 이건 포기한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가 인간의 한계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 우리의 경험이 허락하는 것까지만 이해한다. 상황은 끝났다.

가능성마저 없는 경우, 이성이 죽음과 파멸을 선언할 때에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할 그 때가 예수께서 시작하시는 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죽음은 시작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눈물과 한숨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주님은 그 눈물과 한숨을 재료로 기쁨을 만들어 내신다.

다만, 그 눈물과 한숨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세상에 흩뿌리지 말고 주님께 드려야 한다. 친구에게 하소연하기보다 주님께 아뢰어야 한다. 혼자 끙끙대지 말고 주님을 불러야 한다.

“옛날에 내가 살던 산골에 먼 언덕 넘어 엿장수가 가위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구멍 뚫린 냄비나 깨어진 솥뚜껑을 가지고 나가서 빨래 비누나 양잿물과 바꾸어 왔다. 헌 것을 가져가고 새것을 내어주는 엿장수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나도 어떤 때에는 몰래 감추어 두었던 구멍 뚫린 고무신을 쑥스러운 듯이 가지고 나가서 얼굴을 붉히면서 ‘이것도 돼요?’하고 묻곤 했다.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는 씩 웃고는 ‘그럼!’하면서 손가락 같은 엿을 큰 가위로 탁 끊어서 건네주었다. 신이 난다. 신지도 못하는 고무신짝이나 헌 병을 마루 밑에 감추어 두었었는데, 그것이 이처럼 맛있는 엿으로 바뀌었다. 나는 가끔씩은 엿장수가 오기를 기다렸었다. 준비된 고무신이 없으면 엿장수가 기다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그럴수록 고물은 많은 법이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주님은 엿장수, 고물장수다. 세상의 상한 심령, 찢겨진 가정, 불편한 관계, 오해받은 상처를 모두 거두어 가신다. 그것을 내 놓으라고 소리쳐 외치신다. 그리고 그 모든 낡은 것들을 새것으로 바꾸어주신다. 기쁨으로 채워주시고, 건강함으로 바꾸어주시고, 새것으로 고쳐주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신다. 우리 주님은 마술사다. 우리에게 오시는 그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기뻐하는가?

광야로 오시는 이, 그의 길을 예비하라

그 주님이 지금 오신다. 낡은 것으로 가득 찬 인생에게 다가오신다. 빼앗겨서 빈 인생에 찾아오신다. 포기해서 적막한 삶에 찾아오신다.

이번 성탄은 축하하기보다 경험하라. 당신 자신에게 성탄이 일어나게 하라. 너희는 그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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