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6일(대림절2주) 주일설교

제목: 기다림

본문: 로마서 8장 19-30절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3)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다. 나이 칠십 넘도록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는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아들을 얻기까지 아브라함은 다시 이십 오 년을 기다려야 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하나님의 산에 도착하였다.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고, 십계명의 돌판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기다려야 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앞서 사무엘에게 기도와 도움을 요청하였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일은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그 의미를 농축하고, 성취를 통해서 그 비밀을 밝힌다.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그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은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십 년 동안 기다리다가, 하갈을 첩으로 삼아 이스마엘을 낳았다. 이 일이 아브라함 집안의 우환이 되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 올라가서 사십일을 내려오지 않자 사람들은 물도 없는 바위산에서 모세가 필경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동요했고, 아론은 사람들의 요구대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신이라’
사울 왕은 전쟁이 위급해지고 병사들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자 선지자가 칠일 동안 기다리라는 것을 참지 못했다. 스스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선지자 사무엘은 해 저물기 전에 와서 사울을 꾸짖었다.
‘왕은 하나님이 내리신 명령, 기다림을 지키지 않았소. 그랬더라면 당신의 나라를 영원히 세웠을 것지지만, 이제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세워 왕으로 세울 것이오’
그렇게 다윗이 등장하게 되었다.

기다림은 구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언급하셨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것은 성령에 대한 약속과, 기다림이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이 물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승천하시는 예수를 제자들이 쳐다보고 있을 때에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말하였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린다. 유대인들의 메시야는 다윗의 왕국을 다시 세우고 예루살렘을 재건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메시야는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서 해 뜨는 동쪽, 감람산 쪽에서 오실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때에 죽음에서 먼저 일어나 그를 맞이할 수 있도록, 감람산 기슭의 묘지에 묻히는 것을 큰 소원으로 여긴다. 지금도 예루살렘 구 시가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감람산 기슭은 관으로 빽빽하다.

예루살렘 성내에서 성전에 가장 가까운 문은 동문이다. 동문을 통해 들어가면 성전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문도 예루살렘 성 동문이다. 양쪽으로 열리는 문인데 남쪽 문짝은 자비의 문, 북쪽 문짝은 회개의 문이라고 했다. 아람 사람들은 이 문을 영생의 문이라고 한다. 구 예루살렘성의 여덟 개 문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 미문이라고도 불리며, 황금문이라고 불린다.

이 문은 지금 돌로 메꿔져서 출입할 수 없다.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 시대에 이슬람 지도자가 유대인의 메시야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 문을 막아버렸다. 그 후 여러 번 이 문을 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무산되었고, 가장 최근에는 예루살렘이 아직 요르단의 점령하에 있었던 1960년대에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이 문을 열고 바위사원에서 기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하여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유대인들뿐 아니라 상당수 기독교인들까지도, 이 문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열릴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

역사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믿음의 중요한 축이기도 하다.

시간은 하나님의 도구다.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연단하며,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 나무로 집을 지으려면 한달이면 족하지만, 하나님의 백 년이 없었다면 그 나무도 없었을 것이다.

영국 소설가 허버트 웰스의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다.
누구나 기도할 때에는 나름대로의 시작 문구가 있다. 이 대주교는 아침 저녁의 미사에서 기도드릴 때 항상 ‘오 전능하신 아버지시여’라고 시작했다. 평생 해 오던 기도대로 기도하던 어느 저녁에 예외 없이 기도하였다. ‘오 전능하신 아버지시여’ 그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오냐 왠일이냐, 이야기 해 보아라.’ 그런데 이 대주교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아무 기대함도 없이 습관만 남은 믿음의 사람이 너무도 많다. 어떤 노력도 없이,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성경에 써있으니 기다린다고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노벨상 작가 사뮤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부조리극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고, 전 세계적으로도 연극의 전환점이 되었던 작품이다.국내에서도 50년 동안 약 1500회가 공연된 전설적인 연극이다. 이안 맥컬런이라는 배우,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라는 마법사로 나오는 배우가 바로 이 연극을 통해 등장한 전설적인 주인공 중 한 사람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인데, 애칭 디디와 고고로 불린다. 두 사람은 어느 도로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언제 오는지, 그에게 뭘 기대하는지도 모른채 그냥 기다린다. 심지어 고도가 실존하는지도 모른 채 기다린다.

그래서 둘의 이야기,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도 두서없고 무의미한 대화일 뿐이다. 두 사람은 그만 떠나자고 하면서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이 나무에 목매어 죽자고 말하지만 죽지 못한다. 왜냐하면 고도를 기다려야 하니까.

이 말도 되지 않는 대화와 연극 자체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과 표현이 난무한다. 비참한 주종관계를 인해 영국과 아일랜드 관계를 말한 것이라고도 하고, 프로이드적 해석으로 에고와 이드를 말한 것이라고도 하고, 심지어 성경 관련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기독교의 기다림을 모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약속의 성취를 우리는 기다린다. 신앙생활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큰 약점, 아니 큰 실수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없는 사람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당신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가? 젓과 꿀이 흐르는 땅.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뛰놀고 독사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고 장난을 칠 수 있는 나라. 그게 그냥 좋은 그림, 적절한 묘사에 불과한가?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종종 출석하던 워싱턴 D.C.의 뉴욕 에비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의 조셉 C.G.목사님이 있었다. 그가 어떤 기간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펴놓은 성경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 낡은 성경에 그리고 그 성경을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그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자국이 있는 성경 한 페이지를 눈여겨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시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링컨은 무엇을 기다렸을까?

참아
인내는 기다림의 뿌리다. 참지 못하고 조급해 하며, 분을 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5]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으면 기다려진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게으름이다 -마이클 몰리노스-

렌트(Lent, 사순절)란 ‘느리다’의 뜻이다. 사순절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매년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성도의 신앙생활 자체가 기다림이 아닌가? 예수님의 고난을 기다린다. 예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다린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린다.

대림절도 마찬가지다. 기다림의 계절이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우리의 회복을 기다린다. 이 땅의 회복을 기다린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

믿음의 기다림은, 시간만 지나기를 기다리는 소극적 인내가 아니다. 어떤 임산부도, 아이가 태어날 때는 시간만 지내면서 기다리지 않는다. 아이가 입을 옷을 준비하고, 아이를 키울 환경을 준비한다. 아이가 아직 뱃속에 있는데도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진짜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그 나라가 하늘에서 임하기까지 시간만 지내면서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 나라에서 입을 거룩한 흰 옷을 지금 나의 삶에서 준비하고, 그 나라에서 부를 찬송을 지금 불러 연습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성도의 태도다.

아리마대 요셉은 기다리는 자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요셉은 빌라도에게 들어가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행동이 위태로워서 성경은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도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행동하는 자다.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는 멈추거나 잠들지 않는다.

인간이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께서 인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시간과 비교할 수 없다.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라, 약속대로 첫 오심을 기념함으로서 약속대로 임하실 두 번째 오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하다. 오늘 둘째 주간에, 여러분은 여전히 성탄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무엇을 버리고 있는가? 무엇을 구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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