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9일(대림절첫주) 주일예배 설교

제목: 약속

본문: 여호수아 1:1-9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설교영상: https://youtu.be/d8EFn9JC6IE

불확실성의 세상, 불확실한 인간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기에, 오랫동안 서있었다,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구부러지는 데까지

눈 닿는 데까지 멀리 굽어보면서;
그리고 다른 한 길을 택했다,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좋은 이유가 있는 길을,
풀이 우거지고 별로 닳지 않았기에;
그 점을 말하자면, 발자취로 닳은 건
두 길이 사실 비슷했지만,

그리고 그 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아직 밟혀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묻혀있었다.
아, 나는 첫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두었다!
길은 계속 길로 이어지는 것을 알기에
내가 과연 여기 돌아올지 의심하면서도.

어디에선가 먼 먼 훗날
나는 한숨 쉬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다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이 시는 수능시험에 지문으로 등장한 단 세 편의 외국어 시 중의 하나로도 유명하다. 이 시를 둘러싼 수많은 해석들이 있는데, 내가 본 중에 가장 억지스러운 해석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자기계발서류의 해석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언급은 프로스트가 이 시를 쓸 때에 자기 친구이며 또한 시인인 에드워드 토마스와 함께 종종 산책을 했는데 토마스는 어느 기로 가든지 꼭 다 걷고 나면 다른 길로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버릇이 있었다는 점을 밝힌 자서전의 기록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어느 길을 걸었더라도 나중에 한숨을 쉬면서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하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인간을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한 삶 속에서 내린 결정들은, 그 특정한 시간과 그 특정한 상황이 반복될 수 없기에, 그 결정이 옳았는지 글렀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때의 선택으로 지금 괜찮게 살고 있다 할지라도, 다른 선택을 했으면 더 잘 살았을 수도 있다. 그때의 선택으로 인해 지금 고생하고 있다고 여길지라도,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더 나빠졌을 수도 있기에 인간은 과거의 선택에 대하여, 비록 그 선택이 스스로 내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의 타당성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점에서,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는 인생이라는 존재는 깃털처럼 가볍다고 생각했고, 그의 유명한 책 제목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지었다.

삶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생 스스로만 해도 불확실한데, 세상은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더욱 빨리 변하고 있어서 불확실함에 속도마저 더하고 있다. 누구라도 자신의 삶이 그렇게 흔들리기 원치 않는다. 사람들이 인생과 세상의 불확실함에 대처하는 방식은 변치 않는 확실한 것을 붙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비교적 확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금은 보화와 땅을 중요하게 여겼다. 불확실성이 클수록 물질주의는 증가하게 마련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해 정면으로 대처하기도 하는데, 그 불확실성, 한 치 앞도 모르는 앞날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는 철학적 태도도 그런 유형이다. 혹은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것으로 대처하기도 하고, 극단적으로는 산 속에 들어가서 홀로 살아감으로 그것이 회피이든 정신승리이든 자신만의 세계에서 안도감을 누리기도 한다.

인간의 삶이 불확실하며, 안정적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 배우지 않아서인가? 진화가 덜 되어서인가? 이런 질문이 쓸데없이 잘난척 하는 질문일까? 그러나 이런 질문이 꼭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이라기 이전에 가장 인간적이지 않을까? 결국 가장 인간적인 질문이 가장 종교적인 질문이 된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완전하지 못한 까닭인가? 사실관계가 다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에 불완전하게 지으셨다. 물론 창세기 1장은 사람을 지으신 날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첨언하지만, 이 말씀이 인간과 그 삶의 불확실성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인간뿐 아니라 자연 만물은 불안정하며, 불확실하다. 그 불확실함은 오히려 생명의 특징이다. 더 이상 불확실함이 없다면, 이를테면 높은 곳에 있는 모든 것은 떨어지고, 움직이는 모든 것은 멈추고, 뜨거운 모든 것이 차갑게 된다면, 바다에 파도가 멈추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마저 멈춘다면, 그것은 생명과 활력이 아닌, 죽음과 침묵이 될 것이다.

변화와 불확실성은 모든 생명에게 있어서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같은 줄기에서 날아오른 수많은 민들레 홀씨 중에 어떤 것은 바위 틈새에서 죽어가고, 어떤 것은 물 위에 떨어져 물고기 밥이 되고, 어떤 것은 좋은 흙에 떨어져 생명을 이어간다. 왜 그렇게 흩어져가서 제각기 운명을 맞는지 민들레 홀씨는 질문하지 않겠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삶에 주어지는 불확실함의 의미를 묻는 존재다.

성경의 대답은 하나님이 인간을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로 지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의 관리를 맡겼지만, 아담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어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도 모르고 그것을 맡겼다면, 하나님의 실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을 명령하면 어김없이 행하는 로봇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이 초래하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살아가는 생명으로 지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정론이라는 말을 오해하고 확대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버리는 것도 예정된 것이라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의 관리를 아담에게 맡길 때에,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조성하신 것이다.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어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는데, 사울이 왕이 되고서는 하나님을 배신할 것을 알고도 왕으로 세우신 것일까?

하나님의 후회

성경은 하나님이 후회에 대해 언급한다.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 노아의 홍수 때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는 성령이 근심하였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후회와 근심은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함이었다.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확실성의 상황, 선택의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인간 자신의 일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불확실함이 하나님의 근심이 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실수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불확실성을 포함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인간이신 예수 한 분 뿐이시다. 우리 인간은 본래 불완전하고, 삶은 본래 불확실하다.

다만 인간은 지혜로운 존재여서, 인간 존재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스스로 헤아릴 수 있었다. 인간이 과거 어디에서 왔는지, 미래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깨닫지 못했지만, 현재 인간이 근본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채우고, 보완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어떤 종교는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공(空)이라고 말하며, 또 어떤 종교는 삶이 윤회한다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번 생은 망쳤어’라는 식의 말은 윤회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으로 인한 헛발질이다. 심지어 기독교인 청년이 그런 말을 별 생각없이 따라하는 것도 봤다. 윤회는 그렇게 계속 끊임없이 돈다는 이론이 아니라, 도는 것을 멈추기 위한 가르침이다. 흔히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은,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번뇌와 업을 끊어버렸기에,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존재를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윤회라는 가르침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생은 망쳤다’는 생각은 다음 생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주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그 어떤 성찰도 인간의 부족함을 채울 수 없었다. 그 어떤 도전도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없었다. 다만, 인간을 불확신한 상태에 내버려 두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 불확실함을 극복하여 온전함을 이루는 길을 예비해 두셨다. 아담은 자신의 선택의 결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는다. 아브람은 고향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땅이 약속된다.

인간의 불확실성이란 것이 아직 채워지지 않은 한 조각이라면, 실버스타인이라는 작가의 잃어버린 반쪽과 같은 것이라면, 그건 본래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던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채워져야 하는 신비의 영역이란 점을 성경은 말한다. 그것이 우리의 불확실함을 채우는 하나님의 배려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은 불확실한 세계, 불확실한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손에 쥐고 있는 돌멩이를 놓으면 바닥에 떨어진다는 것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지식과 경험과 예측이 도달하지 못하는 삶의 불확실성을 채우는 것이 믿음이다.

다만, 이 경우의 믿음은 하늘에서 온 것을 말하는 것이지, 내 속에서 쥐어짜내는 신념이나 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축구선수가 패널티킥을 차면서, 골을 넣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할 수 있어. 나 자신을 믿으면 돼. 그렇게 공을 찬다. 이것도 우리가 사용하는 믿음의 하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땀을 믿고, 어떤 사람은 돈의 힘을 믿는다. 어떤 사람이 퇴직금을 투자해서 동네에 음식점을 여는 것은, 자신의 열정과 안목과 땀과 성실함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러한 어떤 믿음도 다 배신의 가능성이 있다. 이런 믿음들은 불확실함을 내포한 자신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해 사용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믿는다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제일 못믿을만한 놈이 나 자신인 것도 있고, 건강을 믿는다지만 코로나 하나 잡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요, 돈이 믿을만하다면 통장잔고가 천억원이 넘는데 자살했다는 사람은 뭔가.

하나님이 불확실한 인생을 위해 선물해 주신 믿음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말씀과 약속이 있어도 사람들은 불확실함을 극복하기 위해 경험과 이성을 동원한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도 빈틈을 찾으며, 어리석게도 세상에 속한 경험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걸을 때에 하나님은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주셨다. 만나를 주시면서 백성에게 주신 말씀은 ‘매일 먹을 것만 거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머리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이건 불합리한 제약이었다. 그래서 오늘 한 번 나가서, 내일 먹을 것까지 거둬오고, 내일은 편하게 지낼거라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만나는 상하여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강제로 배우게 된 것이 ‘일용할 양식’이다.

더 많이 거두어서 쌓아놓아야 안심하고, 미래를 위해 쌓아놓아야 행복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런 믿음이어야 한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확고한 걸음을 내딛게 한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불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한 번 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마치 전에 걸어봤던 길을 걷는 것처럼, 길을 잃지 않게 한다.

성경은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브람은 아버지의 유산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갔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다. 노아는 산 꼭대기에 배를 건조하였다. 그것이 노아의 의로움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뒤쫓는 원수의 원수의 생명을 보호하였다. 그것이 다윗의 선택이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불확실한 상황, 선택의 기로에서 세상의 논리, 경험의 가르침, 주변의 충고를 따르기보다는 하늘의 뜻을 따랐다.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죽은 직후의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종,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한 사람 모세의 위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의 후예는 부담이 크다. 더구나 그냥 평화의 통치가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전쟁이 여호수아의 사명이었다. 이 말 잘 듣지 않고, 사사건건 불평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휘하여 이 거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마침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아마도 여호수아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는 말씀, 백성에게 권위를 세우는 징조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세우실 때에 수많은 기적과 권능으로 저를 세우셨으니, 여호수아에게도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수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냥 여호수아에게 진군을 명령하시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더구나 첫 구절은 조금은 차갑게도 들린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모세가 여기서 죽은 것은 늙어 쇠약해져서가 아니었다. 그의 나이 120세였지만,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가렸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뿐이다. 모세가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였더라면 굉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에게 뚜렷한 메시지가 있다.
모세는 죽었다. 너는 모세에 의해 키워졌지만, 더 이상 모세를 의지하는 자가 아니다. 이제 가라.
그리고 약속하신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준다. 네 평생에 너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단서가 있다. 이건 어떤 거래 조건이 아니라 인생과 세상의 불확실함을 메꾸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식이다.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승리를 약속하셨다. 형통함을 약속하셨다. 다만 그 약속은 말씀 위에 세워진 약속이다. 그 말씀이 없다면 그 약속도 없다.

여호수아는 이제 백성을 이끌고 홍수로 넘쳐 흐르는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 일곱 족속이 사는 땅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땅을 빼앗아야 한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 말씀하신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제자가 아닌, 스스로의 삶과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지점에서 듣는, 받은, 믿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수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 말씀은 모든 홀로 선 자들에게, 스스로의 삶과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자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장성하여 부모의 보살핌을 떠나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청년에게 주는 약속이다. 직장을 얻어 치열한 경쟁과 다툼 속에서 삶을 지켜내야 할 사람에게 주는 약속이다. 결혼하여 서로의 배우자에게, 혹은 태어난 아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에게 주는 약속이다. 요동하는 세상과 유혹 많은 인생에서 영혼의 순결을 지켜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약속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의 세계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인생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이제 새롭게 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모세도 밟지 못했던, 그 누구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을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코로나 사태를 격으면서 우리가 인정하는 것 한 가지는, 이전 삶의 방식의 유통기간이 끝났다는 점이다. 내년이면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고, 예전 사스나 메르스처럼 코로나도 인간이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듣지도 예상치도 못했던 이런 질병들의 세계적인 유행이 점점 잦아지고 있고, 조류독감이나 돼지열병 등의 유행들과, 급격한 생물의 멸종들과, 바다의 오염과, 해수면의 상승과 식량의 부족 등등, 인류의 미래는 더 많은 풍파가 몰아치게 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삶의 방식과 목표가 필요하다. 경제도, 정치도, 개인의 삶도 새로워져야 한다. 과거의 경제개발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더 이상 돈이 성공과 행복의 척도가 되어서도 안 된다. 현실이 그렇다고? 현실 뒤에 숨어있는 진실은 보이지 않던가? 세계와 나라의 문제는 다른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되,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은 어떻게 방향을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말씀을 구약의 이야기로, 옛날 이야기로만 듣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의 산 느보산에서 신월동까지의 8016Km의 공간과 여호수아 때로부터 오늘까지의 347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온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예수의 이름과 철자가 같은 말이다. 오늘날 히브리어로 읽으면 예수아가 된다. 단순히 동명이인일 뿐만 아니라, 많은 성경학자들이 여호수아는 예수를 예표하는 사람으로 본다. 그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한 사람이 예수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애굽은 세상을, 가나안은 천국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우리 찬송 중에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라는 가사도 있다. 그러니까 세상인 애굽을 떠나는 데에는 모세가 안내하였지만, 천국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예수가 우리를 인도한다는 의미를 찾은 것이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의 역할이기도 하다. 세상에 속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의 시작은 율법적인 모습을 띤다. 율법을 대표하는 십계명의 조항처럼,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키고 죄와 멀어지게 하며 예배와 기도와 계명을 따르게 한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완성은 아니며,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우리에게 약속된 땅에 들어가려면 필요한 것이 복음이다. 예수가 보이신 길이 우리가 따라야 할 생명의 길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율법을 통과하여 복음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여호수아에게는 모세를 통해 전해진 율법이, 우리들에게는 성경을 통해서 전해진 그리스도가 그 약속이다.

예수의 말씀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용도로만 축소시키지 말라. 성경은 하나님이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현실적인 목표와 실제적인 방법을 말하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세워야 할 현실적인 목표와 실제적인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라, 재물을 땅에 쌓지 말라, 네 이웃의 고난을 돌아보라는 말씀은 2000년 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21세기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되기 위해 지금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약속이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을 믿는 것이 약속이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라고 하신 말씀들을 믿고 행하는 것, 예수께서 살아가신 것과 같은 삶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약속의 본질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 사람들이 깜짝 놀라 주께 항의하였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대림절 첫째 주일이다.

우리가 2000년 전에 세상에 오신 예수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생이 끝난 후 가야 할 천국 때문인가? 그 순간에 주님은 묻지 않던가? 세상에서 어떻게 했니?

갈수록 불확실성이 더해가는 현대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 선택의 순간에 예수를 생각하라.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당신이 예수를 닮은 사람이다. 말씀의 약속을 붙드는 당신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당신이 천국을 이땅에 세워가는 사람이다. 당신 안에 있는 천국과 기쁨, 그것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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