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 주일예배 설교

물 위로 오라

마태복음 14장 22-3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설교영상: https://youtu.be/TzCk03gKVeA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이후의 모습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는 ‘좋았더라’였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자연들이 다 하나님의 솜씨요, 그것은 매우 아름답다.

피조물 중의 하나인 바다 역시 아름답다. 그 큰 물이 지구에 생명을 부여하며, 그 안에서 생명을 길러낸다. 바다를 썩지 않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은 파도다. 파도가 있기에 바다는 살아있고, 바다의 풍부함을 가져온다. 해류와 폭풍과 파도가 없는 바다는 고인물이 되어 썩게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바다의 아름다움은, 바람 한 점, 파도 하나 없는 그림 같은 모습과 더불어, 폭풍과 파도가 이는 거친 바다의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은 바다를 그렇게 지으셨다.

창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큰 이유는 그 여섯째 날에 사람을 지으신 까닭이다. 인생은 바다보다 아름답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아무런 고난이나 아픔 없이 항상 아름다운 날들만 계속되어서만은 아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삶의 역경과 고난을 통하여 그 삶이 더 아름다워지며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과 역경이 없는 인생은 고인물처럼 썩게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생의 아름다움은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인생을 그렇게 지으셨다.

만일 누군가가 기도하기를 ‘내게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평안한 인생을 주옵소서’라고 하였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기도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평안한 인생’을 약속하신 적도, 그렇게 살아가게 하신 적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일수록 삶의 평안한 가운데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는 역경과 고난 속에서 그러한 복을 받았던 것은 성경은 수많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고난과 역경, 눈물과 희생을 누군들 즐거워하랴마는, 그것을 통과하지 않는 인생은 결코 아름다워지지도 못하고, 완성될 수도 없다. 그건 마치 운동을 하지 않으며 근육을 원하고, 기름 가득한 음식을 먹으면서 건강하길 원하며, 공부하지 않으면서 1등만 하기 원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종종 ‘별일 없는지’를 묻지만, 별일 없는 인생은 별것 없는 인생이 되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시려고 훈련하시지도 않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려고 연단하시지도 않는 인생이라면, 차라이 우리는 ‘별 일 있는 삶’을 바라야 하지 않을까? 인생에 고난이 있다고 해서 그게 꼭 인생이 잘못된 증거는 될 수 없다. 사철 햇빛만 따스히 내려쬐게 되면 사막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대추나무에 대추를 많이 열리게 하는 농부의 비법 중에, 염소를 매어놓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염소의 특성 상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고삐를 당기며 나무를 흔들어 괴롭히게 된다. 그러면 대추나무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며 긴장하게 되는데,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을 하게 되고, 성장하여 줄기와 잎을 무성하게 하는 것보다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바다와 인생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야말로 그 안에 고난과 역경이 기본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고난과 실패, 극복과 연단은 신앙이 자라나는 자양분, 햇빛과 물과 같은 요소다. 진짜 성숙한 믿음은 산 속 수도원이 아니라 세상에서 만들어진다. 거기에 고난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서 떠도는 삶을 살아야 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남의 양을 치면서 40년을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을 광야길을 걸어야만 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도 20년 동안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의 그 믿음은 나그네길과 망명길과 광야길과 도망길에서 형성되었다.

모든 믿음은 아름다운 빛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빛의 찬란함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고난과 역경을 도구 삼아 그 껍질을 벗겨내야만 한다. 그것이 믿음의 본래 속성이기도 하다.

골짜기를 휘돌아가는 바람이 있기에 백합화의 향기는 들에 가득하게 된다.

시냇물이 멈추지 않기에 노래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익을 두고 다투지만 주님은 그 다툼 속에서 영원한 것을 말씀하신다.

세상은 혼란을 만들지만 주님은 그 혼란 속에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신다.

물도 없고 양식이 없는 광야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하늘의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를 맛볼 수 있었겠는가? 골리앗 같은 위험한 대적이 없었더라면 어찌 다윗과 같은 용사가 빛을 낼 수 있었을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풀무불에 던져 넣어 죽이겠다고 협박하지 않았더라면 다니엘의 그 유명한 고백,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갈릴리 바다의 그 거친 풍랑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자비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

제자들이 배를 타고 어두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바다는 거칠어졌고 배는 흔들렸고 제자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제자들 중에 4명은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었다. 11명이 갈릴리 지역 사람으로서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도 이 물결을 이길 수 없을만큼 상황은 거칠었다.

밤 사경쯤 되어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는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요청하였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하였다. 주님은 ‘오라’고 말씀하셨다.

갈릴리 바다에 왜 풍랑이 몰아쳤는지, 그 파도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돌풍이 갈릴리 바다의 특이한 지형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제자들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님이 일부러 일으킨 바람이라는 해석은 너무 결론을 미리 결정해버리는 방식이 된다. 예수는 따로 기도하러 산에 가시고 제자들은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냈는데 하필 그 때 풍랑이 일었고, 또 하필이면 그 때에 주님이 그 바다를 걸어오신 것 속에는 어떤 의도와 뜻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마치 이 일이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과연 이 사건은 주님께서 계획하신, 우연을 가장한 의도적 접근일까?

그러나 이 사건을 포함하여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건과 상황들은 크게 보아 우리들의 삶의 일부분, 그저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자연의 재해든, 예기치 못한 전쟁이든, 혹은 사업의 실패나 가까운 사람과의 갈등, 마치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적인 일들까지도 그것이 세상이요 우리의 인생일 뿐이다. 그리고 주님은 마침 그런 상황에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찾아 만날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일 뿐인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느 우연한 날, 어느 우연한 만남과 사건, 어느 우연한 상황과 사정들로 삶은 이어지지만 그런 가운데 눈을 들어보면 문득 우리는 주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며느리감을 찾으려고 수천리 먼 길을 걸어 하란에 도착하였는데, 하필 그 도착한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났던 것과 같다. 이방 여인 룻이 홀로 된 시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추수철이 이삭을 주으러 나갔는데 마침 우연히 이르른 밭이 그의 가문을 살릴 수 있는 보아스의 밭이었다는 것과 같다. 사마리아 여인이 평소와 같이 낮 열두시 사람 없는 때에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왔는데 그 우물가에 마침 예수께서 앉아 계시던 것과도 같다. 어떤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갖 수모를 당하다가 마침 예수를 시험하려는 바리새인들의 흉계에 이용당해서 내팽겨쳐진 곳이 하필이면 예수 앞이었던 것과도 같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처지를 아시며 또한 보호하시며 이끄셔서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길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끄신다. 은총은 사건과 사고. 고난과 역경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서 발견하는 주님의 사랑이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들에게 찾아오신다. 그렇게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습 중 특이한 것 한 가지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다. 죄를 짓고 숨어있는 아담에게 찾아오셨다. 기약 없이 고향을 떠난 야곱에게 벧엘에서 찾아오셨다.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잊혀져가던 모세에게 찾아오셨다. 미디안 군대를 피해 포도밭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농부 기드온에게 찾아오셨다.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은 용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대개 아쉬운 것을 인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것은 당신의 일을 이루려 하심이다.

예수께서 풍랑 이는 바다를 걸어 배로 다가오신 것은 어떤 의도인가? 단순히 배에 타려고 오신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이 배는 바다를 건너는 도구에 불과한데, 주님은 그냥 걸어서 바다를 건너도 된다. 그러니 배로 다가오신 것은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말이다.

풍랑을 잔잔케 하려고 오신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께서 함께 타고계신 배가 물결 때문에 고생하였는데, 주님은 고물에서 깊이 주무시고 계셨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는 말씀하셨었다.

막4:40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능력은 이미 제자들에게 이미 보이신 적이 있다. 굳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주님께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

마가복음은 본문의 내용에 없는 다른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막 6:47-48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마태복음에 없는데 마가복음에 들어있는 단어는 ‘지나가려고 하시매’라는 곳이다. 헬라어 성경 원문에 쓰인 단어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상황에서 쓰는 말이다.

정말 지나가려 하셨을까? 그건 본문이 기록하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비슷한 상황, 비교할만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요한계시록에는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다만 문은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열어야 한다. 주님은 문을 부수거나 억지로 열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다. 두드림으로 응답할, 문을 열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상황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동구밖까지 나와서 기다리는 것까지였다. 돌아오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한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중 여리고 시내를 지나가고 계셨다. 지나가고 계셨을 뿐이다. 그런데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고, 그것은 키 작은 삭개오가 할 수 있는 큰 부르짖음이었다.

본문에서 예수는 그들에게 오셨지만 지나가려고 하셨다. 이건 많이 궁금하다.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 벳세다로 보냈다는 45절의 언급을 거기서 만나기로 했다는 잠정적 약속으로 볼 수 있다면, 적어도 제자들이 가는 방향과 예수께서 가는 방향이 일치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주님께서 가시는 길과 경로가 같다면, 부는 바람과, 요동치는 물결을, 그로 인한 고난까지도 두려워 할 것 없다는 점이다. 다만, 주님을 불러야 한다. 유령인 줄 알고 소리지르든, 주님이신 줄 알고 깨닫고 외치든, 주님께 우리의 음성이 들리게 해야 한다. 흔들리는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부를 수 있도록, 보이는 곳까지, 부를 수 있다고 느낄 지점까지 다가오시는 것이 주님의 방식이다.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슬픔 가운데 지낼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무너진 왕국과 성전을 재건하는 환상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겔36:36-37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해 준다고 약속하신다. 그럼에도 한 가지,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는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은 우리를 힘들거나 민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위한 특별한 배려이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힘과 능력이 그에게 있음을 인정하게 한다. 부르짖음으로 하늘의 도우심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가까이 오시지만, 환란과 풍파, 파도와 두려움 속에서 주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실만큼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가 해야 할 한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님을 부르는 일이다.

유령으로 알고 소리지르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주님과 몇 년을 동고동락하였어도,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고 주님과 같은 지붕 아래에서 잠들었어도 우리가 주님과 같아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본능과 이성과 경험을 벗어나는 일에는 놀라고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을 찾았다. 주님께 외쳤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베드로의 위대한 점 하나가 여기에 있다. 베드로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아는 사람이다. 주님이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는, 주님이시라면 나도 걷게 하실 수 있다고 깨달았다.

이점은 다시 강조해야겠다. 베드로의 표현은 ‘나도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가 아니라 ‘주님이 명하시면 나도 걸을 수 있습니다’였다. 이건 단순한 소망이나 기도가 아니다. 주님이 파도 위를 걸어오신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제자의 성장을 보는 것, 차원이 다른 제자의 요청을 듣는 기쁨이 아니었을까? 물론 베드로는 걷다가 빠져서 주께 꾸지람을 받았지만, 그 꾸지람은 주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고, 우리들로서는 베드로의 용기, 지혜, 순발력, 믿음의 상상력이 부러울 뿐이다.

생각해보니 베드로는 항상 저렇게 앞서갔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먼저 대답한 이도 베드로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약속하셨다. 하지만 곧 이어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이러나면 안된다고 만류하였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꾸지람을 받았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칼을 뽑아 휘두르는 데에서 그치고 도망자가 되었으며, 계집종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진심과 사랑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반 걸음씩 밀려났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실수하지 않는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대신, 한 걸음씩 예수께 나아갔고, 사탄은 반걸음씩 밀어냈을 뿐이다. 바보같은 모습, 실수하는 모습, 넘어지는 모습, 바다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베드로는 끊임없이 반 걸음씩이라도 주님께 가까이 갔던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이 대답은 정말 아름답고 정말 통쾌한 대답이며 베드로를 향한 칭찬과 격려인 것이다.

오라. 물 위로 오라!!

조금 후에 바다에 빠질 녀석을 웃어주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는 것을 흉보지 않는다. 넘어지면서도 일어서려는 그 몸짓과 의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성도의 도전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일 것이다.

믿음은 흔들리는 배 밑바닥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뱃전을 뛰어넘어 풍랑 이는 바다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믿음은 행동이고, 모험이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르는데, 여기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을 믿음의 모험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산 꼭대기에 배를 만든 노아는 세상이 보기에는 정신 나간 사람, 믿음의 사람 노아에게 이 일은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것은 믿음의 모험이다. 아는 길, 경험한 길로만 가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식이다. 믿음은 이해되지 않는 길, 방법, 결정 속에 드러난다.

수백만명의 노예 출신 오합지졸의 백성을 거느리고 물도 양식도 없는 광야도 인도해 들어가는 모세의 길이 그렇다. 삼백명의 민병대에게 칼도 창도 아닌 횃불만 들려서 12만명의 미디안 군대를 향해 기습해 들어가는 기드온의 병법이 믿음 모험적 속성을 보여준다.

단, 이 모험은 자기가 선택한 자기의 취향에 따른 모험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고,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많이 했고, 주님은 때마다 응답하셨는데, 병든 사람을 고치기도 하고, 안 되던 일도 기적처럼 이뤄졌다. 기도와 응답에 재미를 붙였는데, 더 큰 욕심도 생겼다. 예수의 말씀에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니라고 하셨으니, 나도 기적을 만들어보고 싶고, 기적중에서도 물 위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금식과 철야로 부지런히 기도하였고, 드디어 바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깊이 잠수해버렸고, 물 먹었다. 친구에게 하는 말이, ‘정말 의심하지 않고 믿었는데, 왜 안 되는거지?’라고 하였다.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오라고 하니까 갔는데, 너도 오라고 하시든?’

자기 확신, 자기 신념, 자기 소망을 믿음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착각이다. 성경에 ‘네가 믿는대로 되리라’는 구절은 없다. 맹인들에게 예수께서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말씀하신 것이지, 성경은 한 번도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하지 않는다.

오늘 분문에서 구체적인 상황은 배를 흔드는 물결이다. 베드로는 구체적으로 주께 요청하였다. ‘주님 제가 이 물결 위를 걷도록 명해주십시오.’

여러분 각자의 실제 상황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파도는, 내가 발을 디뎌야 하는 바다의 이름은 무엇인가? 코로나로 인한 건강의 위협인가? 위축된 경기로 인하여 삶이 흔들리고 있는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역동적이며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먹고 사는 일이 여러분의 풍랑인가? 직장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위협 받고 있는가?

어거스틴- 예수는 파도를 밟고 오셨다. 그와 같이 예수는 인생에 넘치는 모든 혼란은 발 아래에 밟아버리셨다. 크리스천이여, 왜 두려워하는가?

두려움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이긴다. 노력과 눈물과 땀이나 주어진 수저의 색깔이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다, 그 파도 속에서 주님께 요청하는 나의 기도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거친 바다 물결을, 세상의 높은 파도를 우리가 이길 수는 없지만, 아니 파도 따윈 잠잠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더 높아져도 상관없다. 주님과 함께 그 물결을 밟는 상상만 해도 즐거우니까. 까짓 거기에 빠진들 어떠랴? 예수께서는 즉시 손을 내미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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