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5일 주일예배 설교(추수감사절)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골로새서 3장 15-17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설교영상- https://youtu.be/fLb3AlDAYb8

아이가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말을 배우게 된다. 아이가 말을 하지 않으면 부모는 걱정하면서 그것을 기다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자연스럽게 감사를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감사할 줄 모르면 목회자는 걱정하면서 그것을 기다리게 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사는 핵심 내용이다. 믿음이 예쁜 상자에 담긴 선물이라면, 감사는 상자가 아니라, 상자 안의 알맹이다. 진짜 믿음이 감사를 동반하지 않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또는, 감사야말로 그 믿음이 진짜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길을 가다가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셨고, 저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 그 열 명은 길을 가다가 깨끗하게 나았는데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열 명 중에 예수의 구원의 선언을 받은 사람도 이 한 사람 뿐이었다. 육신의 질병이 나은 것에 대해서 감사를 주님께 드렸더니, 이제는 그 감사를 통해서 영혼과 삶의 구원이라는 선물까지 받게 된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한 감사는, 단순한 마음의 표현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축복을 여는 열쇠가 된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감사가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또는 목회자로서 현장에서 체득하는 것은, 감사하는 자가 또 다른 감사의 기회를 누리게 된다는 점이다.

감사는 믿음의 실체 중 하나이다. 감사하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감사는 믿음을 더하거나 빼는 것이 아니라, 좋거나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사 그 자체가 믿음의 중요한 한 부분, 핵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숙제 하나에 접근해 볼 수 있다. 그 숙제는 믿음의 크기는 측량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진 믿음을 사람으로서는 측량하기 어렵다. 성수주일, 헌금, 전도, 성경읽기 등 믿음을 간접적으로 헤아려볼 수 있는 여러 외적 요소들이 있지만 여전히 믿음은 쉬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감사하는 것으로 그 믿음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감사의 마음, 감사의 행동, 감사의 예물, 감사의 표현 등은 믿음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는 것이다. 감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의 믿음이 시원찮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믿음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반대로, 감사에 풍성한 사람의 믿음은 거의 예외 없이 귀하고 아름다운 믿음인 것도 사실이다.

오늘 추수감사주일, 우리 각자의 감사를 되돌아보자. 그리스도인의 감사를 우등에서 낙제까지, A학점에서 F학점까지 정리해 보았다. 성도 여러분의 감사가 어디에 속하는지 비교해보고, 신앙을 점검하는 기회로 삼기 바란다.

F학점, 낙제

F 학점짜리 감사가 있다. 낙제 감사다. 쉽게 말해서 감사가 없는 신앙이다. 목회자로서 판단할 때에, 감사가 없는 그리스도인이 의외로 많다는 점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신앙생활의 본질을 ‘교회 다니는 것’이라는 외형에 두는 사람들이 더욱 그렇다. 학교는 잘 다니지만 공부는 하지 않는 학생이 있듯이, 교회는 잘 다니지만 감사는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둘 다 본질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 예배에 출석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감사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진짜라는 함정도 주의해야 한다. 신앙이나 생활이나, 겉모습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진짜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만 있는 감사도 유효할까?

마음 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고, 그것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흉악한 범죄자를 보면서 저런 인간은 죽여버려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마음속의 생각만으로 처벌받는 것이 아니며, 안타까운 처지의 사람을 보면서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고 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내 마음의 생각이 실체였다면, 저는 지금 몸짱에 배가 안 나오고, 피아노를 기가 막히게 잘 쳤어야 한다.

표현되지 않는 감사, 실행되지 않은 감사, 나타내지 않은 감사는 진짜 감사가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감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드러나고 실행되지 않으면 의미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 우리의 꼬마들에게 용돈을 주면 우리는 꼬마들에게 꼭 가르친다. ‘고맙습니다 해야지’ 거기다가 머리까지 찍어 누른다. 그래야 진짜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 역시 표현되기 까지는 진짜가 아니다. 억지로라도 나타내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없다.

그러니까 낙제 감사, F학점의 감사는 바로 표현되지 않은 감사, 나타내지 않은 감사다. 감사의 표현이 없는 사람, 감사의 언어가 없는 사람, 감사의 예물이 없는 사람, 감사의 찬양이 없는 사람이 낙제다.

감사할 제목이 없으면 어떻하는가? 조금은 냉정한 말이지만, 그건 눈이 어두워 찾지 못해서 그렇다. 없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는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유명한 찬양의 2탄이 있는데, 그 첫머리 가사가 이렇게 시작한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감사의 제목, 조건에 대해서는 후에 더 말씀드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가?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는 그리스도인의 감사 예물이 있다. 물론 재물로만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가장 손쉽고 가까운 것이 헌금이기도 하다. 돈으로 감사하는 것이 쉽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기까지, 당신은 진짜 회개한 것이 아니다.’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지갑이 감사하기까지, 당신은 진짜 감사한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소나 양의 희생 없이 감사제를 드리지 못했다. 힘이 부족하면 비둘기나 곡식을 드리더라도, 예물 없이 주 앞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경은 감사를 예물과 동일시했다.

감사를 ‘헌금’이라는 말과 묶어서 그렇지, 예물이라는 단어로 바꾸면 그 경계가 무한히 확장된다. 감사 찬양은 어떤가? 오늘 저녁에 잠시 시간을 내서, 홀로 찬송가 588장을 4절까지 가사를 음미하면서 천천히 불러보라. 주께 감사를 드리는 훌륭한 감사가 될 것이다.

중세 유럽에 성탄절과 관련해서 전해져 오는 캉탈베르라는 곡예사의 이야기가 있다. 캉탈베르는 열심히 노력해서 솜씨 좋은 곡예사가 되었지만, 아무도 그의 실력과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캉탈베르는 수도원장의 배려로 수도원에 기거하게 되었다. 수도원의 모든 훈련자들이 자신들의 재주로 하나님을 섬기되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지어서, 어떤 사람은 책을 저술하며, 혹은 요리로, 시를 지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자신의 재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수도원에서마저 그는 낙심하고 있었다. 마침 성탄절이 가까오고, 사람들은 여러 준비로 분주한데, 홀로 있던 캉탈베르는 몰래 예배당에 들어가 밤새 재주를 넘으며, 공을 돌리며 곡예를 하였다. 새벽에 예배당에 들어온 수도원장이 그때까지 재주를 부리고 있던 캉탈베르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이 신성모독을 말리려고 뛰쳐나가려다 멈춰섰다. 마침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캉탈베르의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에 무슨 제한이 있겠는가? 내게 주신 예배당을 감사하여 청소할 수도 있고, 아름답게 장식할 수도 있다. 내게 주신 삶을 감사하여 경건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깨끗하며 건강하게 하는 것도 귀한 일이다. 육체의 힘으로도 감사할 수 있고, 시간의 감사를 드릴 수도 있다.

오래전에 어디선가 말씀드렸던 제 이야긴데, 저는 아내와 교회학교 고등부와 청년부 동창이었고, 결혼할 때에 나는 성가대 지휘자였고, 아내는 대원이었다. 토요일에 결혼하였는데, 그 다음날 주일예배를 드리고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기에 어디서 잘까의 문제가 생겼다. 그날 저녁에 서대전 산 속의 기도원으로 갔다. 당시 마루바닥으로 되어있던 대예배실 한쪽 구석에서 기도제목도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다가 깜빡 졸기도 했는데, 산속의 4월 추위가 얼마나 매서웠던지 벌벌 떨었던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기도 하다. 그 추웠던 밤은 서원의 시간인 동시에 감사의 시간이었다.

감사의 형식에 제한은 없다. 다만, 표현되지 않은 감사는 감사가 아니다. 감사가 없으면 낙제, F학점이다.

D학점

낙제는 면한 감사로 옆구리를 찔려 드리는 감사가 있다. 언젠가 어느 기독교 신문에 감사헌금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어떤 교회에 가 보면 감사헌금 봉투 수십 가지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본래 전통이니까, 다들 그렇게 하니까 드리는 감사가 d 학점의 감사다. 추수감사절 헌금 봉투가 주보 사이에 끼어있지 않으면 그냥 넘어갔을 감사가 D 학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무시할 것이 아니다. 꼬마 아이가 부모님이 시켜서 고맙습니다라고 해도, 그것을 보는 어른이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감사는 그렇게 시작되고, 배워가는 것이다.

얼떨결에 드리는 감사도 이 수준이다. 예전 내가 군에 입대했을 때에, 이른바 유신군대라고 불리던 시절, 며칠간 밥도 거의 못 먹고 고생하던 차에 마침 주일이 되어서 예배당에 갈 수 있었다.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호주머니에 있던 어머니가 비상금으로 주신 돈을 다 꺼내서 헌금바구니에 넣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돈도 정작 필요 없네요.’ 그런데 나중에 고된 훈련 받으면서 정작 초코파이 하나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얼마나 아쉬웠던지. 그 때 조금 남기고 헌금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건 감사헌금이 아니라 뇌물이었었다. 군대 생활 동안 잘 좀 지켜달라는 뇌물을 감사헌금으로 스스로 착각했던 것이다.

본래 감사는 그 가운데 기쁨이 담기게 되어 있다.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레22:29)’ 의무감에 매여서 감사의 예물을 드리게 되면 자칫 믿음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감사는 기쁨을 담아야 한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결혼식 청첩장을 고지서라고도 부른다. 추수감사절에 주보 속에 끼여져 있는 봉투도 고지서인가? 물론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서 어렵기도 하고, 생각해봐도 감사할만한 제목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 가장 귀한 것은 의무라는 형식으로 존재한다. 자식은 가장 큰 축복이지만, 자식을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부모의 의무지만, 그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걸 고생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식으로 감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이해를 넘어서야 C 수준의 감사가 될 수 있다.

C학점

c학점의 감사는 감사의 기본이 된 수준이다. C학점의 감사는 말씀드린 D학점의 감사에서 드러난 두 가지를 보완한 감사다.

첫째, d학점 감사가 옆구리 찔러야 감사한다면, c학점의 감사는 스스로 감사의 제목을 발견하게 된다. ‘아, 이것은 감사할 제목이다’라고 스스로 느끼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아이가 어릴 때면 부모가 생일감사 헌금을 들려서 교회에 보내지만, 이제 성장하여서 내 생일에 케잌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파티만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이런 감사가 c학점의 감사다.

둘째,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감사를 드린다.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는 기본이 된 감사, 차원 높은 감사라고 볼 수 있다. 드려지는 것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는 것을 살펴보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과부가 두 렙돈 넣은 것을 칭찬하셨다. 참 민망하게, 왜 예수님은 사람들이 헌금 드리는 것을 살펴보셨을까? 더구나 불편하게, 왜 하필이면 가난하고 없는 자의 헌금을 그렇게 동전까지 세고 계시냐는 것이다.

힘들게 주께 드리는 손길일수록 빠짐없이 축복하시려는 주님의 배려는 아니었을까? 어렵고 힘든 가운데 주께 드리는 것이라면, 더욱 그것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주님의 은혜 아닐까?

B학점

감사할 것이 없어도 드릴 수 있는 감사

B학점의 감사는 감사할 것이 없어도 드리는 감사의 수준으로 생각한다. 내게 특별히 감사할 일 없는 평범한 날들이었다고 해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가 없지는 않다. 감사가 꼭 내 삶에 일어난 것이어야만 할 이유가 있는가? 왜 꼭 내게 일어난 일만 감사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를 둘러싼 환경과 세상의 평범함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왜 감사치 못하겠는가?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서 감사는 것, 가정에 아무 어려움 없는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은 어떤가? 하나님의 의를 감사하는 것이 왜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7:17)’

또 우리는 우리의 이웃의 존재와, 이웃의 행복을 인하여 감사할 수 있다. 아이의 생일을 맞아 부모가 아이의 이름으로 감사예물을 드린다. 아이가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안다. 그리고 그것을 확장시킬 수 있다. 친구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내 친구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내 친구가 결혼하게 되었으니, 내가 감사예물을 드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수많은 감사의 제목을 갖게 될 것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감사헌금 봉투를 보면서 기도하게 되는데, 어느 해인가 감사헌금의 이유가 ‘교회 생일을 감사합니다’라는 것이었고, 큰 감동을 받았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으며, 옆구리 찌르지도 않았는데 그 마음에서 내 교회를 감사하고 있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목사는 그 감사에서, 이 사람의 믿음이 일정 수준을 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감사한 것을 찾아서 감사하는 감사

오래 전에 어떤 50대 남자의 감사를 본 적이 있다. 가을날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 감사. 낙엽이 소리나게 뒹굴며 겨울로 가고 있음을 감사. 땍땍거리면서도, 나름 열심히 사는 집사람 사무실 개업 감사. 시험 망쳤다면서 벌써 재수 생각하는 아들놈 수능 끝나게 해 주심 감사. 죽을 병 걸린 것처럼 순간 절망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완전회복에 대한 감사. 금방 군대 간다고 대기하던 놈 군대 안가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돈 버는 큰 놈에 대한 감사. 위태위태하던 직장(?) 한 고비 넘기게 해 주심을 감사. 추수감사절 평소보다 10배 정도의 감사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여유에 대한 감사. 금방 생각나는 감사의 종류가 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왕 감사하는 김에 두 가지 채워 열 개로 맹글어야겠다. 그 와중에서도 지리산 만추를 느낄 수 있었음에 감사. 며칠 밤새우며 힘들게 일했지만, 괴롭히던 두통도 없었음에 감사.

A학점

A학점의 감사로 분류할만한 것은 어떤 것일까? 선지자 다니엘의 예를 들어보려 한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를 시기하던 무리들이 왕에게 청원하여, 한 달 동안에 왕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즉 무엇을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는 법을 제안했고, 왕은 우쭐하여 도장을 찍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그의 행동이 단6:10에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다니엘은 무엇을 감사했는가? 원수가 함정을 판 것을 감사하는가? 왕이 멍청한 것을 감사할까? 내가 이제 기도를 드리면 죽게 된 것을 감사하는가?

다니엘의 믿음과 생각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건과 비교해보자. 느부갓네살 왕이 커다란 금 신상을 세우고 모든 신하들을 절하게 했는데, 다니엘과 친구들이 거부했다. 왕은 노하여서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지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잠잠히 말한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여기에 그 유명한 고백이 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A학점 감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내 노력에 결실이 맺혀지지 아니할지라도.

다니엘의 이러한 감사의 신앙, 이러한 위대한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건 하나님의 존재 덕분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은 빼앗기지 않는다. 소매치기를 당했는데, 하필이면 빈 지갑이었다면 거기에도 감사는 있다.

하나님의 이름, 영생의 약속을 빼앗기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차원이 다른 감사를 가질 자격이 있다. 성공을 꿈꿨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는 있다. 건강을 바랬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는 풍성하다. 돈을 기도했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제목은 널렸다.

선지자 하박국은 감사의 사람이었다. 하박국은 그 시대의 양극화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고, 가난한 자를 권력자들이 등쳐먹는 세상을 주님께 항의하며 도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깨달았을 때에, 하박국은 노래를 지어 주님을 찬양하였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

이 수준에 오면 감사의 예물을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이 헤아리시는 심령의 제사가 될 것이다. 이런 감사까지 드릴 수 있기 바란다.

특별학점의 감사 하나를 추가하려 한다. 예수의 감사다.

성경에 예수의 감사는 세 번 보여진다. 첫째는 말씀을 가르치시던 중에 나온다. ‘마11:25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두 번째는 나사로의 무덤에서이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 세 번째는 이른바 최후의 만찬을 드실 때, 떡과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주님의 감사에는 풍성한 의미가 있다. 그 중 하나만 생각해본다. 우리의 감사는 대개 사후감사, 일이 일어난 다음의 감사다. 그러나 주님의 감사는 주님의 감사는 미리 드리는 감사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일은 미련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주시기로 하신 분이시기에, 미리 감사드리는 일은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니이다’라고 말 할 수 있었다.

앞당겨 누리는 것은 기독교인의 특권이다. 기독교인은 천국의 기쁨과 영광을 죽어 그 나라에 가서나 비로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천국의 그 기쁨과 영광을 가불받아서 누릴 수 있는 특권층인 것이다.

이 가을에, 2020년에도, 코로나로 인하여 세상이 혼란하며 어두울 때에도, 우리의 감사는 더욱 순전해지고,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기를, 더욱 풍성하기를 바란다.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