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9월 23일

얼마동안 유튜브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면서 홈페이지에 설교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곳에도 유튜브를 연결하되, 설교 원안을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현장 설교와 글로 기록된 설교 원안에는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전체 요지와 흐름에 있어서는 별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 마가복음 15장 33 – 47절
제목: 신은 왜 죽었는가?

신은 죽었다는 주장

니체라는 철학자는 그의 책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언급했다. ‘신은 죽었다’라는 이 말은 심지어 니체보다 유명해졌다.

이 말이 유명한 만큼, 오히려 오해도 많은 것 같다. 적어도 무신론을 주장하는 현대인들이 니체의 이 말을 끌어다 쓰는 것은 모순이다. 문구 그대로 생각해본다면, 신이 죽었다는 것은 죽기 전에는 살아 있었다는 말이 된다. 죽었거나 살았거나를 말한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신론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없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관점에서 니체의 말을 살펴보면, 니체는 오히려 유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라는 언급은 니체만 한 것이 아니고 제일 먼저 한 것도 아니다. 니체가 이른바 초인의 사상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언급하여서 유명해진 것일 뿐이다.

니체의 말은 신학적, 종교적 주장이 아닌, 철학적 논리의 전개일 뿐이다. 실제로는 서양철학의 근간이 되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따른 이데아의 세계를 부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육체와 현실을 초월하는 이상적인 세계, 이데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 이데아의 세계가 하필 기독교와 만나 하나님의 나라와 융합되어버린 서구의 사상에 따라 그는 ‘이데아는 죽었다’라고 말하는 대신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니체가 말한 신은 하나님도 아니며 그리스도도 아니며, 모하멧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그저 그때까지 인간이 의지하고 기대하던 최고의 가치과 희망이 실은 허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냥 인간이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세상 그 외에는 그 무엇도 현실이 아니니까, 인간도 스스로를 의지하고 운명을 개쳑하며 살아가야 된다는 말을 괜히 신을 들먹이면서 제법 품위있게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단어의 유희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삶의 전제를 논하는 제법 심각한 주제다.

신은 인간이 아니기에 신이다. 신에게는 인간이 가지는 유한의 속성, 죽음과 멸망, 최후라는 것이 없다. 그 속성에 갇힌다면 신이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죽었다’라는 말은 끝을 의미하지만 신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신이 죽었다면, 그 다음에는 살아나면 된다. 내 생각에는, 니체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래서 그가 그토록 신뢰하였던 인간과 인간의 이성이 1차세계대전과 2차대전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오는 것을 보았더라면, 어쩌면 다급하게 신을 되살려냈을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시대의 사람들 중에 무신론자는 차고 넘친다. 그 사람들은 신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며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가? 니체가 말했던 초인이 존재하는가?

니체가 떠난지 한 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세상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신이라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이라고 말하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나고 해서 인간이 스스로 서는 자리가 저절로 마련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들은 오히려 더 심각하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의존할 뿐이다. 대표적으로 돈이 그렇고, 혹은 향락이 그러하며, 대부분이 균형 잡힌 삶이기보다는 어딘가에 치우쳐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 칠 뿐이다. 인간의 본질을 깊이 연구한 칸트는 오히려 신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을 읽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뭔가 신비가 담겨있는 말씀인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지기로 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으되, 예수님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이 선택한 십자가에서 예수는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가? 이건 모순이지 않은가?

이 말씀을 생각해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우리가 성경말씀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뜻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땀의 결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더하여,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야 그 길에 설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주께로부터 얻은 수많은 깨달음들도 우리 자신이 내게 주시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안내판이 되고 있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근거 중 하나는,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경험하셨다는 점이다. 배고픔을 경험하셨고, 피곤함과 졸림도 경험하셨다. 배신도 경험하시고 부끄러움과 고난도 경험하셨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대부분 경험하는 한 가지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본성적으로 경험하실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죄의 결과, 범죄의 대가이다. 예수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죄를 짖지 않으셨고, 죄를 지으실 수가 없으셨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늘상 죄를 짖고, 또 그 죄의 대가로 어려움과 고난과 형벌에 처한다. 그렇게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의 사이를 분리시킨다. 예수는 바로 이 부분, 하나님과의 분리를 경험하실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십자가에서 예수는 인간의 연약함의 나머지 하나까지 경험하신 것이다. 인간이 죄 때문에 어떤 고난에 처하는지에 대하여, 주님은 마지막 단절의 고통마저 맛보신 것이다. 주님은 그 단절의 장벽 너머에서 돌아오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우리 주변의 넘어진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저들이 죄 때문에 넘어졌는가? 죄를 사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도 돌아오지 않는다. 죄로 인한 형벌이나, 고난마저도 저들을 돌이키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쌓은 담장 때문이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체념,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는 이미 건널 수 없는 단절이 생겼다는 인식이 저들을 붙잡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주님의 십자가가 놓여진다. 주님의 저 외로운 외침은 이 모습이 예언자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는 선언임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한 것은 너 하나뿐이 아니라는 우리를 향한 깨우침의 목소리다. 그 단절의 자리에서도 또 외쳐야 할 소리가 있다는 것이 십자가의 교훈이다.

37절에는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슨 소리였을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두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가상칠언은 부활절에나, 삶의 마지막 순간에만 묵상해야 하는 말씀이 아니다. 내가 문득 혼자인 것을 느낄 때에, 누구도 내 고난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그 순간에, 이 고난의 지리한 길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대체 이 길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혼란의 와중에서 다시 조용히 따라해 보아야 할 말씀들이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적 대신 찟어진 휘장

주님이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기적이 일어나는지 보자는 사람도 있었다. 십자가 앞에는 항상 구경꾼이 있기 마련이다. 마지막까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잠깐 내려오셔서 모든 비웃던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주님은 내려오지 않으셨다. 그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는 것 외에도 수없이 많이 가져올 수 있다.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 정말로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제사장들이 예수를 조롱하느라고 한 말이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다” 정작 예수께서 스스로 내려오셨더라면, 저들의 농담은 진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 놀라운 일 앞에,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떨며, 예수께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예수의 증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가치 있는, 효율적인, 주님이 기대하는 증인 될 수 있을까?

예수는 골고다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일으켜 당신의 사람으로 삼는 것에 관심이 없으셨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이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뻘 생각이지만,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으로 십자가 곁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무리들이 급작스럽게 주님을 믿고 따랐었다면, 교회가 진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었을까? 교회에도 실권적 자리가 있다면, 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차리가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저들이 진정으로 회심하였을지라도, 아마 교회마저도 저 예루살렘 귀족들의 권력놀이터가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리는 기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사람을 살리는, 사람을 위한 참된 길은 갑작스런 인기로 얻어져서도 안 된다.

예수는 단번에 얻는 수백명의 유력한 증인보다, 갈릴리에서부터 함께하셨던 제자들을 신뢰하셨다. 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고, 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고, 세리와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훈련시키셨었다. 주님의 교회는 저들을 통해서 세워질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오르시기로 결정하신 것도, 거기서 내려오지 않은 것도, 겉으로는 부족하며,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지만, 제자들, 제자들을 믿고 행하신 것이었다.

대부분의 진리, 진실, 정의에는 십자가의 경우와 비슷한 경향이 있다. 돌팔이 의사가 약을 과하게 써서 질병을 단숨에 고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몸을 축낸다. 그런 의사들조차 아마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약 먹지 말고 쉬라고 충고할 것이다.

세상에는 빠른 시간이 전부가 아닌 경우가 많다. 더 많다.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부랑자들 다 잡아넣어서 교화시키겠다던 독재자가 있었다. 법을 어긴 자기 자신부터 잡아넣지 않을 것은 둘째치고, 자신의 추악함을 감추려던 비열한 목적도 셋째치고, 그 삼청교육대를 시행하면서 사익을 추구하던 무리들을 넷째 치더라도, 정의를 힘으로라도 세우겠다는 그 기본전제부터 틀렸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정의롭기에 총과 칼도 정당하는 사람이 있고, 목적이 정의롭기에 수단도 의로워야만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 갈등은 항상 있었다.

예수께서는 간단하게 정리하셨다. 예수를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칼을 휘두를 때에 예수는 말씀하셨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우리는 신앙도, 기도도, 심지어 교회도 빨리 많은 결실을 손에 쥐기 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이다. 기적과 돈과 승리가 줄줄이 이어지는 길이 아니라, 그저 꾸준히 걸어가야만 하는 진실의 길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길이 빠른 것 같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얻을 것 같지만, 그건 상상일 뿐이다. 십자가 죽음의 길이 더딘 것 같지만, 얻을만한 사람들을 놓친 것 같지만, 이게 현실의 길이다. 많은 사람들을 돌이킬 기회를 놓친 것 같지만, 실은 더 많은 사람을 얻은 길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뭘 믿고 예수는 십자가를 지셨는가, 뭘 믿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는가? 제자들이다. 지금은 미숙하여 보이지 않고, 자기가 하는 말이 뭔지도 모르며, 장담하다가 도망가버리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저들을 믿고 교회를 맡기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분이 예수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장이나, 열매를 탐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짜라고 속지도 않는다. 오히려 살아있어서 심으면 열매를 맺을 진짜 씨앗 하나가 더 귀하다. 농부가 굶으면서도 내년에 심을 씨앗을 보존하듯,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을 이어갈 믿음의 사람이 자산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는 기적 대신 자신의 몸을 성전 휘장처럼 찟었다.

신은 왜 죽었는가? 그런데 사실은 그게 기적이다. 신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까. 신에게는 죽었다라는 단어를 인간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쓰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신에게 사용해서 주의 좀 끌어보려는 사용법이었을 뿐이다. 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죽었다. 그리고 신, 십자가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주님은 그 모습을 당신의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왜 왕과 빌라도와 대제사장에게 보이시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길어질 염려도 있거니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과 같이 이해하면 충분하다.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을 제자들, 우리의 몫으로 옮기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 살아나는 것보다, 예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 것, 믿고 따르는 것이었다.

언제 한번이라도 머리 속으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가르침이 성경에 있었던가? 아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언제든 진짜 믿음은 행동하는 자에게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문제는 우리 각자의 삶은 지금 갈보리 언덕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서울 신월동 2020년, 갈보리 언덕에서 거리로는 직선으로 8,054Km, 시간으로는 2000년에서 13년 정도 모자라는 만큼 떨어진 이곳에서도 이 믿음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가?

우리 이해할 수 없는 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리의 수난, 정의의 부재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욕망의 일반화, 탐욕의 합법화, 경쟁의 상식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의 일탈, 목회자의 욕망과 탈선, 믿음을 배반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서야 하는가? 의인의 죽음, 부르짖어도 하늘은 침묵하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

그 해답을 우리는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찾는다. 그 언덕에 그 모든 것, 부족함, 탐욕, 경쟁, 일탈과 욕망과 죽음과 침묵이 있었다.

예수의 죽음은 궁극의 해답이지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일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자격이 있는 일이다. 사람이 해야 할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 십자가, 혼란의 현장에서 우리들이 해야 역할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백부장은 예수께 대하여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하였다. 여인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십자가를 떠나지 않았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 하여, 자신의 무덤에 장사하였다. 그 무덤까지 여인들이 따라왔다.

그중에 요셉의 경우를 주목해본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이었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은 장례식이 불가능한 날이었고, 유대 지역의 특성상 당일 장례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안식일은 저녁 6시경에 시작되기에 요셉은 서둘러 자신의 일을 진행하였다. 당시 때때로 십자가에 처형된 자의 시신을 들짐승들에게 방치해 두는 일도 있었고, 골고다를 번역하면 해골 언덕이라는 이유가 그곳에 그런 식으로 방치된 해골들이 굴러다녔기 때문이라고 전해온다. 요셉은 공회원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총독에게서 예수의 장례를 허락받았다.

성경에 나타난 아리마대 요셉의 행적은 이곳 뿐이다. 그러나 조금 살펴본다면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연결고리를 찾기 힘든 기록들이 성경에 여럿 나타난다.

산헤드린의 재판 정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우리를 모른다. 공회는 예수의 죽음을 판결했지만, 그 재판정에 예수의 제자들은 한 명도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가 예수의 재판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내부의 사람일 것이다. 공회원이면서 예수와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은 둘인데, 예수께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다. 그중에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서 마태복음은 ‘그도 예수의 제자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회 내부의 사정을 훗날 제자들에게 알려주어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이 형성되도록 도움을 준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일 것이다.

궁금한 것은, 요셉은 재판 자리에서는 왜 침묵했는가? 성경에는 요셉이 예수께 유리한 발언을 하거나, 중재하였다는 어떤 이야기도 없다. 예수의 죽음 이후에 무덤을 제공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이, 살아계실 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요셉을 비난하기는 이르다. 어떤 말로도 이 혼란한 상황에서 유독 돋보이는 요셉의 아름다운 행위를 가릴 수 없다. 이사야 53장의 예언 중에 예수의 무덤에 대한 예언이 요셉으로 인해 성취되었다. 누가복음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죽이려던 의회의 행동과 결정에 동의한 일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굳이 이해하려는 시각으로 본다면, 요셉의 예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십자가 현장에서 완성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예수의 말씀이나 그 행적도 중요하지만, 정작 최후 최고의 교훈은 십자가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서 당일 예수의 사람이 된 몇 사람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이 있다.
십자가에서 한 쪽 강도는 낙원을 약속 받았다.
백부장은 예수를 의인으로 인정하고 고백했다.

그리고 요셉이 있다. 다만 요셉에게는 조금 더 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43절에 나온다.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국회 의원이라고 다 존경 받는 것이 아니듯, 존경은 자리가 저절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과 돈을 가진 자가 존경받는 것은 더 어렵다. 평소 아리마대 요셉의 삶이 존경을 받을만한 것이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마침 십자가 아래에서 힘 좀 발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귀한 행동은, 고귀한 삶을 통해서 열매로 맺어지는 것일 뿐이다. 평소의 삶에 가치를 더하라.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요셉의 정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아리마대 요셉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외경와 전설에 몇가지 나타나는데 영화의 소재로 종종 등장하는 성배라든지, 영국으로의 도피와 심지어 아더 왕의 전설로 연결되기까지 하지만, 그건 그냥 전설로만 생각하면 된다.

요셉에 대한 설명은 이 한 마디에 많은 것이 담겼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

공회원들을 종파적 특성으로 구분하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기대하는 쪽은 바리새인이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더라면, 왜 예수께 나온 사람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뿐이었을까? 예수님 당시의 정치적, 시대적 상황에서 유대인이 공회원의 위치에까지 올랐다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소망이 아직 살아있었다.

이 소망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든, 현실 국가에서 이뤄지는 것이든, 주님 재림 이후에 이뤄질 것이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을 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가 예수의 사람이다.

지위에 상관없이, 가진 것에 상관없이, 나이나, 성별이나, 학력이나, 기회 유무에 상관없이 그 소망을 품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가?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원하는가?

신앙적으로, 이상과 꿈으로서, 혹은 원칙이라고 해도 좋고, 철학적 사유의 결론이었다고 해도 괜찮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또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정작 예수로 인하여 반응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결정적 행동의 때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 때를 놓치는 것은, 기다린 것도 의미 없다. 작은 행동으로, 별로 특출할 것 없을 한 번의 선택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라

흰 신발 신고, 흰 옷 입고 집을 나서면 종일 걸음마저 조심하지 않던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현관을 나서면 그 순간부터 당신의 모든 걸음과 언어와 판단과 선택과 행동이 그리스도인의 것,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의 것이 되게 하라.

그건 이상한 광신도의 행동을 하거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면서 다니라는 말이 아니다. 삶은 결국 경쟁이라면서 노랫가락처럼 도시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굴지 말고, 이번 생은 포기했다는 윤회론자처럼 말하지 말고, 타인의 삶에는 관계없이 자신의 길에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여리고 내려가는 길의 제사장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살아가야 한다.

구걸하는 사람을 마주치고는 예배하러 가는 걸음도 멈추었던 베드로와 요한처럼, 여리고는 그냥 지나가던 참이었는데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고는 그 집에까지 찾아가던 예수처럼, 행로에 곤하여 물 좀 달라 하는 낯선이에게 당신의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노라던 라헬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날 어떤 기회라도 외면하거나 핑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혼란만 가득하고 아무도 책임지는 자 없는 처형장에서 내게 시체를 내어달라던 요셉처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내 등을 떠미는 자 없는 그 삶의 자리에서, 내 속의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인하여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사람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죽음을 선택하시면서도 믿을 수, 안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당신의 삶의 자취를 따라 살아갈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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