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

마가복음 1장 29~39절( 2019년 2월 22일 )

영국 극작가 제임스 베리가 어느 집에 손님으로 가서 대화하고 있는데, 주인 아들이 살금살금 와서는 손님용 과자를 야금야금 하나씩 들고 가서는 먹었다. 점잖은 자리여서 참고 있던 부인이 마침내 한 마디 했다.
얘야, 너 자꾸만 손님이 드실 걸 훔쳐가면 안돼! 그러다가, 너 영원히 어린이같이 된다!
하지만 아이는 싱글벙글거리며 대꾸하였다.
“엄마, 과자를 먹고 난 영원히 아이처럼 남고 싶어요.”
제임스 베리는 웃으면서 부인에게 말했다.
“이 아이 말을 듣고 마침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아이가 나오는 동화 구성이 생각났습니다. 이 설정을 쓰고 싶은데 10파운드를 드리겠습니다.”
마침 그 아이의 이름이 피터였고, 그래서 나온 소설이 피터팬이다.

피터팬은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고 TV에서 종종 상영하였지만, 원작 소설은 사실 어린이용이라고 보긴 힘들다. 피터팬은 네버랜드에 사는 어린아이들의 왕인데, 네버랜드의 규칙 중 하나는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된다’였다. 원작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들이 성장하면 규칙위반이므로 피터는 가능한 서둘러 집요하게 그들을 죽였다.’
그 외에서 수많은 비도덕적인 설정과 양면성이 결코 어린이들에게 교훈을 주기에는 부적절해서, 조지 오웰은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읽히느니 차라리 로마의 동성애 성 묘사가 가득한 풍자소설을 읽히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주인공 피터팬은 나이가 들지 않는 어린아이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네버랜드에 사는 아이들의 왕이다. 주인공을 돕는 요정 팅커벨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여자친구 웬디가 함께 한다. 타이거 릴리라는 추장의 딸도 등장하는데 피터팬의 친한 친구다. 피터팬의 최대의 적은 후크 선장인데, 왼손이 없어서 갈고리를 달고 있다. 왼손을 먹어치운 악어는 그 손에 달려있던 시계까지 삼켰기 때문에 이 악어가 가까이 다가오면 시계소리가 째깍 째깍 나는데, 후크 선장은 이 시계소리만 들으면 혼비백산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피터팬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다. 팬은 사실은 ‘판’의 다른 발음이기도 하다. ‘판’은 기요르모 델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라는 영화를 본 사람은 염소모양의 신을 기억할 것이다. 또 이스라엘의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던 큰 신전은 모든 것의 신이라던 ‘판’ 신을 모시던 신전이었다. 피터는 어른이 되기 싫어하는, 나이가 들기 싫어하는 모든 사람의 상징이다.

어린이는 나중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사실 잠재력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사실은 그는 어른이 되기를 원치도 않고, 안 되려고 한다. 어른을 보니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주변의 어른의 대표는 후크 선장이다. 누가 후크 선장같은 어른이 되고 싶겠는가? 손이 하나 잘려져서 갈고리를 달고 있고, 억압적인 폭군인데다가, 혼동의 용, 즉 시계를 삼킨 악어가 항상 쫓아다니는 불안한 인생의 어른이다. 그 악어는 이미 후크 선장의 일부를 먹어치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이 자신의 일부를 먹어치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시간이라는 것이 너 자신을 조금씩 먹어치우다가 언젠가는 다 잡아먹어 버릴 것이다. 후크 선장은 그런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어른을 보면서 피터는 자기 어린 시절을 포기하면서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된 것이 네버랜드에 모인 길 잃어버린 소년들의 왕인 것이다.

네버랜드는 말 그대로 네버, 없는, 아닌 랜드, 즉 존재하지 않는 나라인 것이다. 피터팬의 친구 웬디는 어른이 되는 것을 수용하고, 아이도 가지고 삶을 살아나가기 원한다.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것도 받아들이고, 웬디는 성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피터팬은 팅커벨에 만족해야 한다. 실상 팅커벨은 요정일뿐이다.

팅커벨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도 피터팬을 채우는 무엇인가이다. 그것은 진짜 여자의 대용품이기도 하고, 화면 속의 포르노이기도 하고, 익명의 사이버 친구이기도 하다. 현실 속의 여자친구와 모니터 속의 여자친구를 구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의 여자친구는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 성숙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잠재력이라는 것을 희생하고 대신에 현실의 프레임 안에 확고하게 실현된 어떤 한 가지가 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마땅히 선택해야 할 것을, 마땅히 선택해야 할 시점에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선택장애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선택하고, 피터팬을 선택하고, 어리광을 선택한 선택이다.

사람은 왜 성숙하고 싶어 하는가? 또는 왜 성숙해야 하는가? 이건 꼭 스스로 질문애햐만 한다. 누구에게나, 당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늦게 알아차릴수록 인생은 더욱 후회하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서른에 알아차리면 후회할 것이고, 마흔에서야 깨우친다면 매우 슬플 것이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는 이 질문과 대답을 미루는 일이 흔하다. 사람들이 즉각적인 어려움 없이 어른이 되는 것을 미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미룰수록 발생하는 보이지 않는 비용은 모르는 사이에 계속 쌓여갈 것이다. 마침내 그 비용을 지불하려 할 때에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수도 있다.

청년이 스물다섯이라면 무얼 해도 된다. 직장을 구한다면, 경력도 없고 경험이 없더라도, 괜찮다고, 아직 젊으니까 우리가 훈련해서 쓰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서른이 되면 달라진다. 사람들은 서른살을 보고 흥분하지 않는다. 지난 10년 동안 도대체 뭘 했다고 물을 것이다.
글쎄요 지금 저는 22살때와 별 다를 바 없는데요..
문제는 너는 지금 스물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몸집만 큰 아기는 징그러운 법이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희생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왜 필요하냐면, 그것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늦을수록 데미지가 크기 때문이다. 그 큰 데미지를 수용하기 힘들자 나온 논리가, ‘괜찮아, 요즘 다 이렇게 사는걸 뭐’하는 자기합리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시기를 비교적 일찍 선택할 수 있다. 그건 주변의 도움을 힘입어서, 또는 비정한 삶의 압박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그 결정의 시간이 이르면 이를수록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둘지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여지는 더 크고 더 자유롭다. 일찍 선택하는 것이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숨겨진 비밀이다. 그래서 삶을 결정하는 것을 미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길다란 피터팬 이야기는 여기가 초점이다. 아이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이 잠재적이지만, 사실은 그 잠재력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다가 교육과 직업훈련을 거치면서 우리는 적어도 구체적인 무엇인가가 되어 간다. 진짜 인생은 우리가 아이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구체적인 누구인가가 되는 과정, 책임적 존재가 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세계이다. 훈련기간과 삶의 도전은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수많은 것들을 버리고 작은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무척이나 수축되는 일이지만 동시에 분명한 방향으로 계발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한 성인으로서의 삶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생이라는 기회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칼 융이 이렇게 말했다.
‘적절한 인생 후반기의 발달 과정은 수습생으로 일하던 시절에 남기고 떠났던 당신의 어린 시절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즉, 구체적인 무엇인가가 되어야 또한 온갖 잠재력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희생이다. 인생의 핵심은, 삶의 온갖 가능성 중에서 무엇을 희생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젊음이 소유한 무한한 가능성을 읿어버리기 싫어서 다 끌어안고 버둥대는 동안,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은 모래처럼 새어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삶의 실제를 선택하고, 무엇인가를 희생하는 좁은 터널을 무사히 지난다면, 오히려 당신은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들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이건 말장난이나 논증이 아니라, 실제다. 삶을 깊이 성찰한 학자들과 선현들의 가르침이며, 실은 이게 성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신앙의 성숙에 대한 것과 일치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에 있어서 어린아이로 남아있기를 원한다. 어린아이가 편하고 좋기 때문이다. 어질러놓아도 다른 사람이 치우며, 배가 고프면 칭얼대면 해결되는 것이 어린아이다.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교회 가면 반갑게 맞아줄 것이니 걱정도 없다. 맘에 맞는 교회와 듣기 좋은 설교를 쇼핑하고, 책임이 주어지면 삶을 핑계로 거절한다.

교회가 그렇지 않던가? 처음 믿기 시작한 사람이 오히려 자유롭고, 또는 배려와 대접을 받는다. 오래 다녔다고 해도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어떤 분과 상담하는 중에 내 믿음은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건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신 것은 분명히 믿지만, 내게 어려운 일은 맡기지 말라는 의미의 어린아이 신앙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 다른 표현으로 신앙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원하면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히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왜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른이 되기를 두려워하는가? 그건 지금까지 자신이 누리던 것들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자신이 소유한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아니 대부분 소유할 가능성 정도지만, 그래도 아쉬워서 놓지 못하는 것들이다. 자유로운 시간들, 방해받지 않고 즐기고 싶은 취미들, 혹은 초보처럼 취급받는 번거로움, 혹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신앙적 의문들을 보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신앙생활 한다. 경계선 가까이에 서서, 언제든지 들어갈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나갈 수도 있는 권한을 포기하지 않는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계3:15-1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유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시험을 받으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더 이상 무슨 자격이 필요했다는 말인가?

그건 자신의 길에 대한 자신의 확신이었다. 내 삶은 이 길이라는 분명한 확신과 선언이었다.

인생의 목적을 아는 자 드물다. 사실은 없다. 그래서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대답도 아닌 대답이 정답처럼 각인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선언하셨다.

막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의 삶의 강력함은 삶의 목적의 명료함에서 탄력을 받는다.

삶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 들뢰르’는 우리의 삶은 삶 속에 마주치는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우리가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삶 속에서 자신에게 닥치는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의 문제라고 보았다. 사건들은 어느 순간 다가와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 순간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세상에 태어나고, 부모를 만나며, 반려자를 만나 결혼하며, 부모 형제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들은 순간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방향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내 삶의 정황들도 그 방향을 유추해보면 내 삶의 지난 날 조우했던 사건들의 영향과 방향 아래 있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말이지만, 한편으로 지나치게 삶을 운명론적으로 보게 된다. 이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 이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삶을 초라하게 만든다. 나 자신이 아닌 내 주변 환경이 나를 만들어간다면 누가 자기 자신의 삶에 애착을 가지겠는가?

‘페터 비에리’는 내적 독립을 향한 욕구가 삶을 이끌어간다고 보았다. 들뢰르와는 달리 비에리는 삶은 자신의 결정이 좌우한다고 본 것이다. 자세히 설명할 필요 없이, 이렇다면 스스로 노력할 여지가 있다. 너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고 딱히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내 안의 수많은 요소들에 대하여서는 대답이 궁하다.

이를테면 사람의 IQ는 태어날 때에 유전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건 추후에 개발할 여지가 거의 없다. IQ는 내가 그저 물려받은 것에 지나지 않고, 그것을 고치거나 향상시킬 수도 없는데,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IQ별 적합 직업이 학자들에 의해 분석되었다.

130-116(95-86%) 변호사, 연구분석가, 편집인, 광고관리자, 화학자, 공학자, 고위경영자 등
115-110(85-73%) 카피라이터, 회계사, 관리자, 영업관리자, 영업당담자, 애널리스트, 총괄롼리자, 구매담당자, 간호자, 영업고객관리자 등
108-103(70-60%) 상점매니저, 부기관리자, 신용조사관, 실험실테스터, 일반판매, 회계서기, 컴퓨터운영자, 고객서비스담당자, 기술자, 서기관, 타자원 등
102-102(55-50%) 경찰관, 접수원, 계산원, 일반사무원, 내부영업당당자, 계량기판독요원, 인쇄소, 은행창구직원, 데이터입력요원, 전기기술자 등
98-95(65-68%) 기계공, 식품부장, 품질관리용원, 경비원, 비숙련노동자, 유지보수, 용접사, 염색공, 기계공 등
93-87(45-42%) 메신저, 공장생산노동자, 조립공, 식품서비스노동자, 간호사보조, 창고관리인, 빌딩청소부, 자재처리노동자, 포장노동자

IQ에 따른 직업 계층 구조에서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작업들이 더 간단해지고, 그 작업들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배정될 가능성이 높으며 또는 작업들이 반복적이다. 왜냐하면 IQ가 어느 정도 예측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빨리 배울 수 있는지이기 때문이다. IQ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거기까지, 조금 빨리 배운다는 것 뿐이다. 일단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 배우고 나면, 공부의 내용을 습득하고 나면, 그것을 얼마나 잘할지는 IQ가 예측하지 못한다.

서울대생의 아이큐 평균이 117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높지 않다. 그러면 아이큐가 130정도 되면 조금만 노력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공부라는 것은 습득해서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상태로 머릿속에 저장하되, 5년이나 10년 뒤까지 지금 배우는 것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예상해서 취사선택하고, 내가 원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실천하되,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적어도 10년 정도는 투자할 수 있는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많은 과정 중에서 IQ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첫 단계, 습득하는 데만 도움을 줄 뿐이다. IQ별로 적합한 직업군의 경우 그 정도 IQ는 되어야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준이 아니라, 상위 직종일수록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높은 IQ를 가진 사람이 더 빨리 그 자리에 도달하게 되고, 선점효과를 누리게 된다는 것 이상의 것은 아니다. 물론 똑똑하면 평균적으로 돈을 더 많이 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큐가 좋다고 그것이 돈 버는 것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아이큐는 습득하는 속도에 도움을 줄 뿐, 습득한 능력을 활용하는 것과 IQ와는 별개다.

그런데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 현장에서 낮은 IQ는 상대적으로 삶을 어렵게 만든다. 낮은 IQ는 자기 자신의 책임이 아님에도 적절한 기회조차 자꾸 빼앗기게 된다. 오늘 현대 사회는 낮은 IQ 계층의 사람들에 대해 벼려하지 못한다. 미국은 모병제도를 택하고 있는데, 군대에 가려면 IQ가 83 이상이어야 한다. IQ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불법이지만, 기준을 그렇게 정해놓고 시행하고 있다. IQ는 내가 죄지를 지어서 낮은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삶의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노력이나 교육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너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타고난 IQ지수의 하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사회망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 속도는 가속화 될 것이다.

하위 15%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하위층을 더 많이 잠식하게 될 것이다. 고용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엄청 우울해질 것이다. 특히 돈을 벌어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타격을 받는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취업 절벽에 몰린 하위 지능 시민들이 정신성 약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IQ와 성격은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성실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비관하게 되고, 더 끔찍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를테면 자율주행 자동차로 인하여서 운전기사라는 직업군이 선천적 지능에 의한 직업선택 탈락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대하여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 삶은 마주친 사건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자신에게 달려있지 않다고 말해버린다. 내적 독립을 향한 욕구가 삶을 이끌어간다는 이야기는 삶은 내 책임이라고 말하지만, 내 능력과 아이큐와 감성조차도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내 삶은 누가 책임진다는 말인가?

사람의 삶에 주어진 유일한 탈출구가 있다면, 어디에서 태어날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아갈지는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삶의 주변환경이다. 사람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그 주변환경이란 것이 꼭 사물이나 사람만은 아니다. 자신이 접하는 모든 도구들, 심지어는 책이나 미디어나 동영상도 당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고전적인 실험이 있다.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각각의 강의실에서 주어진 객관식 문제를 풀었다. 한쪽 강의실의 학생들이 풀은 문제는 주로 오래된 것이나 노인이나 노화에 대한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른 쪽 강의실의 학생들이 풀은 문제는 주로 청년과 젊음에 대한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고, 푸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진짜 실험은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학생들의 걸음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노인과 고령에 대한 단어들로 구성된 문제를 푼 학생들이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청년과 젊음에 대안 문제를 푼 사람들의 걸음보다 느렸다. 자기가 더 느리게 걷고 있다는 것은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이 실험은 다양한 형태로 여러 번 반복해서 검증되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읽는 글, 접하는 화면, 듣는 소리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직업적이든 취미로든 가장 많이 접하는 환경이 나를 만들어간다는 점에 대해서 명심해야 한다.

맹모삼천의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내가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를 보려고 했다가 마음 바꿨다는 이야기를 드렸다만, 얼마든지 더 좋은 재미가 세상에 널렸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씩은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영화도 있어야 할 것이고, 나도 꽤 그러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즐겨 찾는 그것이 내 삶의 구성요소가 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내가 읽는 책이 내 삶을 구성한다. 내가 선택한 음악의 장르가 내 삶에 영향을 준다. 내가 선택한 TV 프로그램이 내 삶을 재구성한다. 드라마에 빠져있는 사람은 삶이 드라마처럼 혼란하게 되는 것이 일반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원하면서,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선택하는 모순부터 해결하지 못하면 안 된다. 인생은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혹시 여러분이 지금 행복하다면 그 순간을 정말 소중히 여기고 감사해야 한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다시 예로 든다면, 열심히 공부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부든지, 운동이든지, 예술이든지 어느 한 가지를 파고 든 사람은 그 스스로 행복의 백신을 맞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회계학과 교수를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학교에 단 한명밖에 없는 동양인 교수로서, 교수 모임에서 그들의 구어체와 네이티브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들에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백인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끊임없이 영어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미국에 산지 15년이고, 미국 시민권자이면서도,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만한 성취를 이뤘음에도,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안쓰러울만큼 치열하게 살아가는 중일 뿐이다.

성공한 경력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은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고,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살아야 하고, 끊임없이 할 일을 메모하고,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아쉬워하다가 다시 눈을 뜨면 또 내일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삶이 불행할까? 그건 아니다. 정작 이야기를 나눠 보면,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성취를 통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잠을 덜 자는 것, 남들보다 여가시간이 적은 것, TV를 보면서 담소를 나눌 시간이 적은 것이 그렇게 불행한 것이 아니다.

이국종 교수가 수술실에 매여서 자신의 시간을 제대로 가지지도 못한다고, 그의 삶이 불행하거나, 그가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천만에 만만에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가치관이다. 가치관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건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가치관이다. 그냥 살아가면 되지, 뭔 걱정이야?라고 할 수도 있다. 그건 이성적인 척 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인도네시아에 지진이 나서 수백명이 죽었지만, 그게 내 삶과 무슨 상관이야? 백만년이 지나도 상관 없잖아?
그런 경우에 해 줄 말은 간단하다.
그만둬, 멍청아. 넌 인간이 아니냐?
사람이 나이 50 넘어가면 결국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의미가 없는 삶을 그냥 열심히 산다는 것은, 결국 미래의 자신을 해치는 선택이다.

인생은 선택할 수 없는 것들과 선택하는 것 사이에 서 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사르트르-
삶을 의미있게 하는 법, 삶의 무료함이나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임상심리학적인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그건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면 오늘 저녁에 ‘하루가 의미 없었다’고 여기기보다 행복하게 잠들 수 있을지, 내가 오늘 하고 싶은 일을, 강조해서 말하면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건 자기 자신과의 협상이다. 하고 싶은 일, 그래서 행복하거나 보람되도록 만들 일과, 해야 할 일들 속에서 선택을 연습하되, 며칠만 계속하면 하루가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조금 더 확장시켜서 올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의 일이며, 사실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것이 현실과 고통을 뛰어넘는 장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넉넉히 감당하는 삶의 무게를 왜 어떤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어서 힘들어할까?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라면 삶에 내재된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의미 없는 삶이라 여기기에 고통이 더 무거워진다.

예수에게서 배운다. 그가 구원자라는 것만 믿어서는 손해다. 자동차 손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바보다. 기본 달려있는데 왜 사용하지 않겠는가?

예수를 천국 가는 데만 의지하는 사람은 바보다. 그는 삶을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가 아니기에 인류를 구원할 책임은 없다. 수많은 사람이 사명의 길에 나서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교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 선교사로 나가면 선교사 후원은 누가 하겠는가?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어서 최고로 남는 장사는, 내 삶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다. 삶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는 건강도, 돈도, 행복도 모두 포함된다. 예수의 삶의 목적은 우리가 공유할 수 없지만, 그의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모범으로 주신 것이다. 그 핵심 방식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마치 운동선수에게 어깨에 힘을 빼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테니스를 해도, 볼링을 해도, 골프를 쳐도, 심지어 당구를 쳐도 어깨나 손목에 힘이 들어가면 안 된다. 각각 다른 코치들인데도 똑같은 요구를 한다.
힘을 빼세요..
그게 기본 중에 기본이다. 왜냐하면 운동은 뼈와 근육으로 하는데, 그것을 움직이는 기본이 같기 때문이다.

삶의 기본은 무엇인가?
삶은 머리와 심장으로 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힘을 빼야 살아갈 수 있다.
예수에게서 배우라.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것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였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것은 롯이 떠난 사건은 아브라함에게 큰 충격이었음을 보여준다. 롯은 조카지만 갈대아 우르부터 자신과 함께 했던 동역자였다. 기근을 맞아 애굽 땅에도 함께 피난을 갔다. 더구나 다른 친척들을 떠나왔고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롯은 유일한 친척이자 아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재산상의 문제로 서로는 갈라지게 되었다. 좋은 땅을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물질적인 손실보다 더 큰 아픔은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마음을 이해하신다는 듯이 땅과 자녀에 대한 약속을 확인시켜주신다. 롯과 땅을 잃었지만 땅의 티끌보다 더 많은 자녀들과 더 큰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는 하나님이 떠나라 했던 본토 친척 아비집 중 마지막인 친척을 이제야 버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 상실의 아픔이지만 신앙적으로는 성숙의 단계에 들어섰다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떠난 곳에 나타나신다. 하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야곱은 가족들과 소유들을 버리고 피신하던 중 벧엘이라는 곳에서 돌베개하고 자다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여호수아도 그러했다.
수1: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수아는 평생토록 모세의 시종으로서 모세의 눈과 표정만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비로소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사람이 떠나는 순간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때이다. 사람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외로운 순간이 필요하다. 사람이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하나님이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사람을 통해서 사랑과 나눔과 행복을 배운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와 궁극적인 목표는 홀로 있을 때 주어진다.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의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옆에는 아내와 남편이 있고, 자녀들이 있다. TV나 컴퓨터에서도 소리가 끊어지질 않고 나온다. 하다못해 혼자 있는 시간도 자녀 생각이나 처리해야 될 생각으로 쉴 틈이 없다.

수도사들이 광야로 나가고 주님이 한적한 곳에 있기를 좋아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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