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반석을 치라
출애굽기 17장 1-7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르비딤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이란 곳에 도착하였다. 마실 물을 또 구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원망하였다.
이 원망은 잘못된 것이었다. 1.마라에서의 경험을 잊어버렸다. 2.모세를 원망하면 일이 해결될 것이라고 여긴 것 같다.
그러나 이 원망은 곧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된다. 특히 ‘죽게 하느냐’는 원망의 말은, 그들의 저열한 생각을 드러낸다. 이제는 모세에게 돌을 던지려 한다.
이 백성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모습은 모든 인간들의 현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대표로 보여주고 있을 뿐, 우리들이라고 별다르지 않다.
믿음은 쉽게 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중에는 오랜 시간동안 신앙생할 해 오고,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들이 있다. 정말 기도에 힘쓰시는 분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신앙은 저마다의 넘지 못하는 문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오래 신앙생활 하고, 그만큼 많이 배웠으면, 그만큼 설교 말씀 들었다면 지금쯤은 영성은 은혜로 충만하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살 것 같은데, 실상은 그런 사람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는 남을 가르쳐도 충분할 만큼의 배웠고, 은혜도 경험했건만, 지금도 은혜받는 것만 사모할 뿐, 남을 가르치거나 전도하거나 봉사하는 것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을 보면서, 때론 목회자의 마음이 답답해진다. 우리가 배우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키기는 하는 걸까? 목회자의 외침은 얼마만큼의 효율을 가질까?
그러나 문득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물론 담임목사는 예수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 비교급이 아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하늘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실망하시지 않고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가르치시고 사랑하시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은혜는 가득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때 그때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은혜가 가득 채워진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면, 더 이상 열심히 주님을 간구하고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은혜는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음식과 같고, 연료와 같다. 그건 몸 안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소모되는 것이니, 목회자는 계속 공급할 의무가 있고, 성도들은 계속 받아 먹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말씀은 잊혀진다. 그럼에도 성도를 살린다. 어제 먹은 밥이 오늘 나의 힘이 되듯, 지금까지 먹은 말씀과 은혜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걸음으로 여기 이 자리까지 온 것은, 그동안 우리가 들은 말씀, 받은 은혜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날마다 투덜거리는 이 불평 민족을 비난하는 것은 이 설교의 목적이 아니다
믿음은 그렇게 쉽게 자라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걸 너무 잘 아시기에 저들이 불평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못살게 굴고,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여도 화내시지 않는다. 목 마르다고? 물 줄게. 모세야 얼른 일어나라. 백성들이 목마르단다. 이게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알게 하려 하신다. 큰소리로 혼내고, 다그쳐서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려 하신다.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기다리신다. 이 민족은 아이와 같다. 잘 걸으려면 자꾸 넘어지면서 배워야 한다. 넘어질 때마다 꾸짖으면 아예 걷지도 못할 것을 염려하신다.
그간 모세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핑계 많은 모세를 격려하고 참으시면서 여기까지 오셨다. 모세는 백성들이 분노하면서 돌을 들어 칠 위기에 닥치자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중이다.
모세가 지금까지 만난 하나님, 지금까지 경험한 위대한 능력이라면, 모세는 지금 이 상황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어야 했다. 그래서 백성들이 난리를 치더라도 그것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고, 고개 돌려 하나님께 마치 귓속말 하듯, ‘이제 물 주실 타임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스스로 불신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하나님의 위대하심보다, 백성들이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 더 커 보였다. 그래서 모세가 부르짖은 기도의 내용은 ‘백성에게 물을 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 쟤들이 나 죽이려고 해요’가 되어버렸다.
3절은 백성들의 부족함을 보여준다면, 4절은 모세의 미숙함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라고 말한다. 모세는 착각하고 있다. 그 백성에게 무언가를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모세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실 차례다. 그걸 착각하고 있다.
지도자로서 모세도 아직 어리다. 훗날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해서 몰살시키려 할 때, 모세가 하나님을 가로막으면서 ‘이 백성은 살려주시고, 저를 죽여주십시오’라고 간구하는 성숙한 믿음에 비교하면, 모세도 아직은 서툴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세우신다.
하나님은 모세를 먼저 가르치셔야 했다. 백성의 연약함은 인내와 기다림으로, 지도자의 연약함은 즉각적인 가르침과 교훈으로, 투 트랙 교육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모세는 지금 백성들이 분노하자 도망치듯 하나님께 피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도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세우신다. 그 앞을 당당히 지나가라 하신다. 돌을 던지면 맞는 것이 지도자의 삶이다. 모든 사람이 다 지지하고 이해해 주는 지도자는 없다. 있다면 대개 가짜거나, 크게 백성을 속였을 것이다. 참된 지도자는 공동체의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사실, 모세의 두려움도 이해할만 하다. 모세가 용기 없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는 애굽의 왕과 군대 앞에서 당당했었다. 홍해와 애굽 군대 사이에서 죽음의 위기에 이르러서도 모세는 오히려 당당히 외쳤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고 크게 외쳤었다.
그러나 원수도 두려워하지 않고, 군대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다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라도, 사람은 두려운 법이다. 그것도 자기를 칭송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자기 편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배반하듯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은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세가 기가 죽은 것을 이해할 만하다.
모세의 꺾인 자존심, 잃어버린 긍지, 지팡이에 얽힌 위대한 전설을 다시 그의 손에 돌려주시려 하신다. 그걸 위해 필요한 것이 모세 자신에게 있다.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고 모세를 죽이려고 손에 돌을 들고 있을 사람의 면전에, 그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가야 한다. 그게 먼저다. 그 정도는 감당해야 하나님의 이적을 행할 자격이 있다. 용기가 없다면 믿음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기적을 보여주면 따르겠다는 말은 믿음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가 똑똑한 줄로 생각하겠지만, 그건 비겁함이고, 무지일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무모한 도발일 뿐이다. 하나님은 비겁한 자의 손에 떡을 쥐어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에게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는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적을 행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용기를 먼저 회복해야 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백성 앞에 세우신다. 거길 지나가라고 명하신다. 기적은 그 다음에야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도 모세가 그렇게 용기를 낸 이후라야 그를 사용하실 수 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이번 일만 해결해 주시면 신앙생활 잘 하겠노라고 하나님께 일종의 제안을 하는 것을 본다. 얼마나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그래, 하나님과 협상을 한다고 하자. 서로 교환할 품목을 비교해 보자. 하나님이 주실 것은 ‘이번에 사업 어려운 거 해결해 주시는 것’이고, 당신이 하나님께 드릴 것은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인데, 이게 비교 가능한가? 당신이 받는 것은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반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할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 너 한 사람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하나님께 무슨 이득이 된다고 그런 제안을 하는가? 세상에서 사업하다가 상대방에게 그런 제안 했다면 사기꾼 취급 받기 십상일 것이다.
하나님의 이적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란다면, 먼저 당신이 할 일을 해야 한다. 예배를 회복하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회복하고, 사람들이 눈이 둥그래져서 ‘저 사람 무슨 일이래?’라고 수근거릴 만큼 열심을 내야 한다. 그게 먼저 해야 할 일이고,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될 때에야 하나님은 당신을 기적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일은 독불장군처럼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해야 한다. 모세에게 장로들을 데리고 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증인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이건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꼭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던 것과도 같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하신 짧은 명령 속에는 모세 개인의 용기 회복을 위한 의도와, 장로들을 통한 공적 증명,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재확립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사랑이 가득히 들어있는 것이다.
혼자 갈 것이 아니라, 장로들을 데리고 가라고 명하셨다. 지도자 곁에는 그 짐을 함께 나눠 질 동료들이 필요하다. 함께 돌 맞을 사람이 필요하다.
네 지팡이를 잡고 가라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이 구절은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이 지팡이는 사연 많은 지팡이다. 젊을 때 그의 손에는 왕자의 위엄과 칼이 들렸었지만, 망명객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데릴사위로서, 장인의 양떼를 치면서 나이 팔십까지 살아온 사람이다. 지팡이는 모세의 굴곡진 인생의 상징이다.
모세가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는 사명을 맡기시면서 모세에게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명하셨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그 뱀의 꼬리를 잡았을 때 지팡이는 다시 뱀이 되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셨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이 지팡이는 처음부터 용도가 분명했었다. 그건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이었다. 출4:20은 이렇게 언급한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그건 하나님의 지팡이였다. 애굽 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키던 지팡이, 나일강을 치면 피로 변하던 지팡이였다. 지팡이를 높이 들면 우박이 내리고 불이 땅을 달렸으며, 그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었을 때 홍해가 갈라졌던 능력의 지팡이, 하나님의 지팡이였다.
그걸 손에 들고도 지금 쩔쩔매는 모세를 하나님이 꾸짖으신다. ‘니 지팡이 어딨냐?’ 하나님의 지팡이가 도로 네 지팡이가 되었다. 모세는 백성들과는 달리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손에서 훈련받았고, 숱한 기적을 경험하였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수없이 보았다. 그 강력한 증거인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음에도, 지금 모세의 모습은 어떠한가? 모세는 그 지팡이를 다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해야 했다.
그 반석을 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계속 말씀하신다.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나님은 한 반석 위에 서셨고, 모세는 지팡이를 들어 그 반석을 쳤다. 물이 나왔고, 백성이 마셨다. 문제는 해결되었고, 모세는 다시 권위를 되찾았고,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 없으면 갑자기 짐승이 되던 백성도 제정신을 차렸다.
한바탕 소동은 백성들에게도 깨달음을 주었다. 자기들이 과도하게 반응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 되었다는 것을 부끄러워 했던 것 같다. 본래 그곳의 이름은 1절에 보이듯 르비딤이었다. 르비딤의 의미는 ‘쉴 곳’이다. 모세는 그곳의 이름을 바꾸어 맛사 또는 ‘다툼’을 의미하는 므리바라고 불렀다. 지명을 바꾼 것은 지혜로운 처사다. 이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선택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전혀 상상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물을 주셨다. 전혀 상상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생명을 구하셨다.
그러나 ‘그 반석’이 물을 낸 것에는 눈에 보이는 단순한 현상 외에도 더 깊은 뜻이 숨어있었다. 그 깊은 뜻은 모세의 눈에도 숨겨져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이 깊은 뜻은 비밀이 되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깊은 뜻을 오래 간직하셨고, 오래 보존하여 그 뜻이 이뤄질 때까지 쉬지 않으셨다. 이 비밀이 밝혀지기 까지는 대략 천 오백년이 필요했다.
그 반석이 가지는 깊은 뜻에 대하여, 그 반석이 깨어져야만 백성이 살 수 있었던 의미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0장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아무 반석, 아무 바위가 아니라 the rock, 그 반석이었다. 하나님이 지목하시고, 하나님이 그 위헤 서신 그 반석이 깨어짐으로 모든 백성에게 생수가 쏟아진 본문의 므리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어지심으로, 그가 죽으심으로, 비로소 만민이 생명을 얻는 십자가 구원 사건의 예표인 것이다.
하나님은 명령하셨다.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 반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아들을 깨트려 백성을 살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당신의 독생자를 인간을 위해 내어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사람들이 벌을 받았고, 하나님은 뱀에게도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이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은 끊임없이 독생자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것을 계시하셨다.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아이의 생명을 대신할 숫양을 준비해 주셨다. 이삭 대신 양이 죽었다. 이 사건 역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대한 예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어린 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자들은 죽음의 재앙을 면하였다. 굳이 왜 피였을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 덕분이라는 점을 하나님은 생생하게 교육시키셨은 뿐 아니라, 이것을 대대로 계속함으로 이 일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그 죽은 어린 양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기록하였다. 훗날 에디오피아의 재무부 장관이 마차를 타고 가면서 읽었지만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장관은 전도자 빌립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선지자가 말한 것이 자기 얘기인가, 다른 사람 이야기인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구절 뒤에 이렇게 덧붙여도 뜻이 통할 것이다. 그가 깨어짐으로 우리는 목마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사마리아 마을의 우물가에 앉으셨다. 한 여인이 물 길러 나왔고, 예수는 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 여인은 반박한다. ‘유대인이 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러나 예수께서 먼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물을 주려 하심이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인은 코웃음친다.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을 깊은데, 당신이 나에게 생수를 주겠다고요?’ 주님 말씀하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리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솟아나는 물은 예수를 뜻한다.
십자가에서 당신은 목마름을 호소하셨다. ‘내가 목마르다’ 그 목마름은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려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가 깨어져야만 우리에게 생수가, 생명이 흘러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 신비한 섭리가 그 반석 속에 숨겨져 있었다. 므리바 사건의 깊은 의미는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반석은, 세상의 수없이 많은 아무 반석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지목하신 그 반석은, 깨어지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 주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너는 그 반석을 치라’
대개 목마른 자들은 물이 있을 만한 곳을 찾는다. 그곳이 광야라면 어느 우묵한 곳이나, 혹 땅이 젖어있는 곳에서 물을 찾으려고 한다. 바위는, 반석은 외면한다. 므리바 반석의 사건은 천 오백년 후에 해석되었다고 말씀드렸거니와, 하나님의 백성은 삶의 문제, 광야의 문제, 위기에 처했을 때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를 본문에서 분명히 배운 것이다. 반석을 쳐야 한다.
인생의 문제를 목마름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돈에 간절하고, 인기를 간구하며, 인정받기를, 소외되지 않기를, 초라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목마름으로 표현한 것은 탁월한 비유이다만, 불행히도 우리 민족은 삼천리 금수강산, 세계에서 거의 최상급의 물을 가진 땅에서 살아왔고, 어딜 파도 마실 물을 얻을 수 있었고, 식당이든 길거리든 물 인심을 풍부한 나라에서 살다보니 ‘목마름’에 대한 반응이 좀 시원찮다.
그러나 세상 마지막 날에 당할 목마름은 단순히 생수를 사먹지 못하는 갈증이 아니다. 이를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하였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이 시대의 목마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얻지 못하는 목마름이다. 양식은 오히려 풍부하며, 집집마다 정수기나 생수통일 굴러다니는 세상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며, 군사력은 세계5위다. 불경기라고 다들 걱정이지만, 잘 나가는 맛집은 몇 시간씩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 서 있고, 2025년도에 이르러서 해외여행 가는 사람의 수는 사상 최대를 향해 가고 있다. 진짜 불경기인지, 마음이 불경기인지 잘 모르겠다.
케이팝과 케이 드라마는 전 세계에 열풍이며, 공연장에는 사람이 넘치고, 경기장에는 관중이 넘치는데, 일자리 소개소에는 구직자가 넘치고, 이혼 법정에는 서류가 넘친다. 2030세대는 미래를 말하지 않고, 기성세대는 자기 앞가림에 급급하다. 기득권층은 국민이 준 권력을 자기가 쟁취한 것인 양 기고만장하고, 회사는 직원을 부품처럼 여기며, 같은 직장에서 올해에만 다섯 명이나 목숨을 잃는 세상이다.
인생이 싸워서 이기는 것이라고 누가 자꾸 주장하는지, 그 입을 청소하고 싶다. 자기가 원숭이에서 진화하여 최종 승리 유인원이 된 존재라고 생각하니 인생을 싸움으로 여기는 것 아닌가? 인생은 하나님이 내셨다. 삶은 아름다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려 하는 세상의 모습은 에덴 동산 속에 나타나 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행복했고 아름다웠다.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고 교제하였다. 두려움이나 죄책감, 수치심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즐겼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경쟁이나 비교 없이 순수한 동반자의 관계였고, 서로 보완하며 존중하였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소모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작하고 지키는 청지기의 역할을 하였다. 노동은 고통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창조적인 즐거움이자 목적이었다. 그 나라의 삶은 생존경쟁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은 그 모든 아름다움을 빼앗긴 상태다. 에덴에서의 노동이 목적이 분명한 즐거움이었던 반면, 현재의 노동은 생존을 위한 고통이자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자원이 풍부해도 그것은 다툼의 이유가 될 뿐, 결핍과 불평등은 심화될 뿐이다. 전 지구에 식량이 과잉생산 되어도, 정치적 구조적 이유로 굶주리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는 세상이다. 에덴에서의 순수함과 달리, 현대인들은 옷을 신분 구별의 도구로 삼고 얼굴에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진정한 관계는 어렵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다운 삶이다. 소박하고 안전하며 웃음이 있는 삶이 필요할 뿐이다. 그 목마름이다. 그게 간절하다.
당신의 목마름은 영혼의 문제다. 목마르지 않다면 그게 더 문제다. 병원도 찾지 않고, 예수도 찾지 않을 테니까.
선지자는 외친다. 단순한 목마름을 넘어서서,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할 곳으로 우리를 부른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고민과 갈등의 순간에 예수의 이름이 생각나야 한다. 스트레스와 좌절의 때에 반석을 치라는 명령이 기억나야 한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그래봤자 소용없는 그 순간에, 주위만 돌아보지 말고 하늘을 봐야 한다.
골방으로 들어가 세상의 문은 닫고 기도의 문을 여는 것이 반석을 치는 일이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지난주에 암송한 성경말씀 한 구절을 읖조리며 묵상하는 자가 반석을 치는 자다. 예배를 기다리는 것, 부지런히 달려와 그 자리에 앉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 반석을 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