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4일(부활주일) 설교
제목: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성경: 마태복음 28장 1-10절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춘래불사춘,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다는 시구가 생각난다. 꽃은 피어나지만,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다. 봄이 오는 것보다 코로나가 끝나기를 더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지난 여섯주 동안,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거치면서, 오늘을 기다려 왔다. 오늘은 주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이 모든 성도들에게, 모든 가정 위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부활주일에 주님의 무덤을 생각한다. 세상에는 큰 무덤들이 많다. 이집트의 피라밋 중에서도 쿠푸의 피라밋은 4500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평균 25톤이 되는 돌을 230만개 쌓아서 만들었다. 진시황릉은 아직도 다 발굴되지 못한 엄청난 무덤이다. 무덤을 지키는 용도로 사람 크기의 군사를 흙으로 만들었는데 7000개나 되었고, 수백개의 마차와 가마도 들어있었다. 최근에는 이 무덤에 옛 황궁의 터를 발견했는데, 그 크기가 5만 1천평에 달한다고 한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무덤으로 불린다. 무굴제국의 샤한 왕이 죽은 부인 마할을 기리기 위해 지은 무덤인데, 일꾼 2만명을 동원하여 22년간 지었다고 한다. 지금 가치로는 9800억원짜리 무덤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큰 건축물들이 대개 무덤이었다는 점, 무덤이 관광지라는 것이 생경하다. 그런 큰 무덤들은 오히려 인생의 덧없음을 교훈한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 또는 죽을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지만, 정작 무덤의 주인은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무덤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해도, 그것을 누리는 자는 죽은 자가 아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다 간 사람들 중에, 무덤을 가진 사람보다 무덤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무덤들은 오래 보존되지도 못한다.
기독교인들도 무덤은 필요했다. 특히 육신 그대로의 부활을 믿던 옛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덤은 매우 중요했다. 유럽은 그 전체가 기독교를 받아들였기에, 유럽의 거의 모든 도시에는 그 중심부에 예배당이 세워져 있다. 현대적 건축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대개의 도시들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은 예배당이었다. 이 건물들은 단순한 예배당을 넘어 유적이기도 하다.
유럽의 큰 예배당의 특징 중 하나는 그 안에 무덤이 있다는 점이다. 그 큰 예배당은 그 자체로 큰 무덤이기도 하다. 체코 프라하를 여행하는 사람은 대부분 비투스 성당을 방문하는데,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라는 명성과 함께 눈에 띠는 것은, 예배당 안에 들어있는 여러 개의 무덤들이다. 여러 명의 체코 왕과 성자들, 영주, 귀족, 대주교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스페인 세비야의 대성당에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의 무덤이 있다. 예배당 한쪽에 관이 있고, 그 관 안에 콜롬부스의 시체가 들어있다. 로마에 가면 누구나 베드로 대성당에 방문하는데, 그 지하는 거대한 묘지다. 파리의 그 유명한 노틀담 성당도 그 지하에는 무덤으로 가득하다. 노틀담 지하 무덤은 평소에도 관광객이 관람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낯설게 여겨지는 이 무덤들, 예배당 내에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 있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학적 입장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죽은 자도 산 자와 함께 예배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공간은 죽은 자에게는 무덤이 되고, 산 자에게는 예배당이 되었다. 예배당 안에 자리가 부족하게 되면, 예배당 뒤뜰이 무덤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소위 ‘죽은 사람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신교인이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들의 부모와 이웃들이 교회의 무덤에 묻혀있었다. 카톨릭 사람들은 여전히 ‘죽은 자의 예배’ 때문에 그 무덤을 원했지만, 기독교인들은 ‘함께 묻히는 공동체’라는 소속감으로 그 무덤에 묻히기 원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묘지는 부족하게 되고, 카토릭과 개신교의 묘역은 분리되었다.
개혁자들은 예배당 안의 무덤을 치워버렸다. 사실 무덤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뒤뜰에 있으나 건물 안에 있으나 지하에 있으나 어차피 예배당 안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개혁자들이 무덤을 치운 이유는 사도와 성인은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 우리의 예배나 숭배를 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 기본이지만, 예배당 안의 무덤으로 인한 여러 부작용도 이유가 되었다. 예배당 내부의 공간은 한정되고, 거기 묻히기 원하는 사람은 많았다. 권력자가 묻히기 원했고, 유명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돈이 관건이 된다. 고대 로마의 유적 판테온은 7세기에 예배당으로 바뀌었는데, 그 내부에는 르네상스의 3대 미술가 중 한 사람인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다. 라파엘로가 교회 건축에 공헌한 것이 거기에 들어간 이유지만, 덤으로 라파엘로의 약혼녀도 함께 묻혔다. 유명 예배당 안의 공간은 이미 세속화되었다. 판테온의 한 두 자리 남은 무덤에 누가 묻히느냐의 논의가 유명세를 탔는데, 국민투표로 정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럴 경우 이탈리아의 국민 축구 스타 또띠가 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우리들로서는 예배당 안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데,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상황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정서상 무덤은 마을 밖, 뒷산에 있어야만 한다. 교회들도 시골에 교회묘지를 마련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제 기독교에서도 화장이나 수목장이 낯설지 않게 되었고, 교회 묘지는 교회 납골당으로 바뀌는 추세다. 교회를 지으면서 여유가 있으면 체육시설도 만들고, 심지어 사우나를 만드는 교회도 있던데, 아직 교회 지하나 별관에 납골당 만들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납골당이라는 이름이 좀 성의가 없는데, 죽은 자가 부활을 기다리는 대기실 혹은 영혼의 휴게실을 의미하는 좋은 이름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교회 뒤뜰에 묘지가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 같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무덤은 귀신이 나오는 곳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고, 마을의 일부였다. 파리 시내 한가운데도 그 유명한 페르 라세즈 묘지가 있다. 그 유명한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도 묻혀있고, 쇼팽도,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도 거기 묻혀있다. 주변은 다 주택가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차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 한국사회는 묘지를 혐오시설로 본다. 묘지는 혐오시설이 아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도 거기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혐오를 너무 당연시한다. 요양병원은 혐오시설이 아니어야 한다. 집값 떨어진다는 말을 뻔뻔하게 하다니. 누구라도 요양병원의 신세를 질 수 있다. 요양병원이나 고아원이나 장애인 시설들은 이 사회의 한 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죽음과 삶을 너무 분리시키고 떼어놓는 정서가 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너무 무섭고 가혹한 존재였다. 사람이 잘못 죽거나 사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떠도는 귀신이 된다는 생각까지 만들어냈고, 그래서 더 무서워했다.
귀신이나 영혼의 차원을 제쳐놓는다 해도, 죽음은 사실 두려운 것이다. 나의 삶, 나의 기억, 나의 소중한 것들을 다 빼앗아가는데도, 그것을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죽어가는 과정이 두렵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이 두렵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두렵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의 소망을 가졌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힘들다.
목회자로서 장례에 많이 참여하면서, 죽음이 얼마나 인간을 얽매는지를 매번 실감한다. 오래 전 섬기던 교회에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양육하던 부부가 있었다. 아이가 다섯 살 될 때까지 대여섯 번의 큰 수술을 했고, 겉으로도 드러나는 아이의 장애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뻐하고, 자랑하며, 항상 기도 부탁하고, 신실하게 봉사하던 부부 교사였다. 어느 날, 아이가 감기에 들었는데, 열흘쯤 앓다가 죽었다. 내가 담당하던 교구였고, 눈물로 장례를 치뤘다. 얼마 뒤에 그 집사님 부부는 다시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첫째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그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둘째를 가지지 않았었다.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다시 자녀를 주기기 원한다고 상담했다. 나는 기쁨으로 축복하며 기도했다.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가졌다. 첫째의 경험이 있어서 태중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는지 진찰했고, 90년대의 의술로서는, 아이에게 문제가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기도 들어주심에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했던지 기억이 생생하다.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심장에서 약간의 잡음이 들리지만, 너무 어리니까, 보름 쯤 뒤에 다시 진찰하자고 하였다. 열흘 쯤 되었을 때에, 아이의 심장이 갑자기 멈췄다. 다시 뛰지 않았다. 연락을 받고 뛰어가서, 얼마나 울었던지, 예배도, 기도도 되지 않고. 다른 데 연락 취하지 않고, 장례를 치뤘다. 이불에 싼 채 품에 안고, 자주색 스포티지 자동차를 타고 화장장으로 향했다. 청주에서 충주까지, 일년 전에 갔던 그 길을 다시 갔다.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아이를 하나님께로 보냈다. 아니, 출생신고도 못한 아이를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아닌가? 주시는 척 하다가 빼앗은 것인가?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아이가 죽었는데,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내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이 울었고, 더 오래 아팠고, 더 오래 힘들었다. 목사로서 얼마나 무력함을 느꼈던지. 그 어린아이가 왜 죽어야 할까? 그렇게 바로 죽을 아이라면 왜 태어나게 하셨을까? 그 두 아이들이야 힘들었지만 부모 사랑 듬뿍 받고 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부부에게 대체 어쩌라고.. 그 부부의 첫째 아이가 죽었을 때는 나의 어머니 돌아가신 일 년 쯤 된 때었고, 그 둘째 아이가 죽던 해에, 나도 병이 들어서 두 번 정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나는 그 때 하나님께 실망했다. 그런데, 내가 실망한다고 하나님이 꿈쩍도 하지 않으시길래, 실망하는 것도 포기했다. 그 젊은 부부 집사님이 당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오만한 생각이었고, 그렇게 포장하고 싶었을 뿐이다.
죽는다는 게 무엇인가?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멜 깁슨이라는 영화배우가 감독해서 10여년 전에 개봉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다. 아카데미 세 개 부분을 수상하였다. 나는 그 영화에 감사한다. 그 영화에서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동안,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갈 때에,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따라가는 모습을 많이 비춘다. 감독이 독실한 카톨릭이어서 성모에 더 초점을 두었겠지만, 예수의 어머니의 눈으로 아들의 고난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가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예수의 고난을 내 죄를 대신 해서 고난 받으신 ‘그’의 십자가, 2000년 전의 십자가다. 고맙고, 미안하고, 마음 아프지만 ‘그’의 십자가일 뿐이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아들의 십자가다. 아무 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지고 가는 십자가다. 납 덩어리과 갈고리가 달린 채찍에 살이 찢기고, 피가 튀고, 무거운 십자가에 조롱하며 못 박는 고난을, 어머니의 눈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하늘 아버지로서도, 그 십자가는 아들의 고난이다. 내가 하나님이 그 부모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속 좁은, 이기적인, 철 모르는 투정이었는지. 죄인을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서 부활은 있어야만 한다. 부활은 아들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다. 왜 아이가 열흘만에 죽어야만 하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기도 하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은 죽음이 더 이상 권세가 없다는 선언이다. 아이의 죽음 때문에 울고 힘들고 가슴 아팠지만 그건 육신과 감정의 고통이었을 뿐이다. 사실 성도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이 귀히 보시고 계신다.
시116:15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나는 그가 죽어서 어떻하느냐고 망연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영혼을 받아 품에 안으시니, 죽음 그 이후를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아직 그 문턱에도 가지 못한 내가, 여기서 소리치고 발버둥치는 것이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부활은 사는 게 무엇이고 죽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다.
영국의 시인이고, 성공회 목회자였던 존 던이라는 분이 있다. 한번 쯤은 들어보았을만한 싯구, ‘누구도 외딴 섬은 아니다’로 시작되는 시의 저자이다. 존 던이 죽음을 주제로 시를 지었다. 제목은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다.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어떤 사람들 그대를
강하고 무섭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
그대가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는 그들 죽은 것 아니라네.
가련한 죽음이여, 그대는 나도 역시 죽일 수 없어.
단지 그대의 그림자일 뿐인 안식과 잠에서
많은 기쁨이 흘러나온다면,
그대에게선 더 많은 쾌락이 흘러나오리라.
가장 선한 자 가장 먼저 그대를 따라가지만,
그것은 육체의 안식이요 영혼의 구원.
그대는 운명과 사고와 폭군과 절망자들의 노예,
독약과 전쟁 그리고 질병과 함께 사네.
아편이나 마술로도 우리를 잠들게 할 수 있으니,
그대의 칼보다 낫지, 그러니 뽐낼 것이 무엇이랴?
짧은 한잠 지나 우리 영원히 깨면
이젠 죽음은 없네, 죽음 그대가 죽으리!
예수님은 무덤이 없다. 무덤이라는 말은 시신을 안치한 곳인데, 예수는 부활하셨다. 예수의 육신이 잠시 누이셨던 동굴은 죽음의 비밀히 풀린 공간일 뿐이다. 관도 없고, 묘도 없다.
예루살렘 성묘교회는 그 동굴 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이름이 거룩한 무덤 교회일 뿐이다. 무척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지만, 그건 처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에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저 종교적 이해관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주님의 고난을 인하여서는 찾아가지만, 그 화려함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 아마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다 치워버리라고 채찍을 손에 들고 말씀하실 것 같다.
장기적으로 보면, 교회 안에 무덤이 있든, 그 안에 시체가 있든, 장차 다 빈 무덤이 될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천사가 말한다. 그곳은 비어있다.
기독교는 무덤의 종교가 아니다. 나아가서, 기독교는 건축물의 종교가 되어서도 안 된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잠자던 자들이 깨어나니, 무덤이 없는 세상이다. 무덤이 다 열리듯, 예배당도 다 열릴 것이 아닌가? 우리의 새 예배처소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그리스도인은 땅에 있는 것들에 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육신에도 매이지 않고, 돈에도 매이지 않고, 죽음에 주눅 들지 않고, 무덤에도 갇히지 않고, 심지어 예배당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의 시작을 성탄절로 착각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부활절에 시작되었다. 부활이 없다면, 교회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들의 믿음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부활하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위대하다. 산상수훈은 가장 빛나는 가르침이며, 서른 셋 갈릴리 청년의 삶은 세상 어느 영웅도 비교할 수 없는 고상한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없었다면, 그는 그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요 성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인식과 태도를 바꾼다. 삶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 바뀌지 않았다면, 그는 부활을 머리로만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물론 슬픈 일이지만, 그건 육신의 일 때문이다. 정들어서 그렇고, 때론 고마워서, 때론 불쌍해서 힘들 뿐이다. 그러나 죽음 그 너머에는 부활이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정하셨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며, 부활은 기쁨이다. 예수의 무덤에 왔던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갈 때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주님이 ‘평안하냐’라고 물으신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인사 같이 보인다. 신약성경이니까 샬롬은 물론 아니지만, 이 인사는 놀란 여인들에게 어울리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인들은 지금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다. 천사를 만났고 무덤은 비었다. 여인들의 상태를 8절에서만 뽑아내보면, 무서움과 큰 기쁨과 다급함이다. 무서움과 기쁨을 같이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런 모습으로 달려가던 여인에게 예수께서 나타나 말씀하신 것이 ‘평안하냐’라는 것은 많이 어색하다.
원래의 단어 ‘차이레테’(chairete)는 인사말로 보통 쓰이기에 영어로는 greeting이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다. 쉽게 말하면 hello 라고 인사한 것이다. 그러나 본래의 문자적 의미는 ‘기뻐하라’는 뜻이다.
천사가 어서 가라고 하였으니 달려가는 것이야 그렇다 치고, 한 가지는 갖고가지 말라고 하신다. 무서움은 가져가지 말라. 그 무덤에서 기쁨만 가지고 가면 된다. 그 무덤에서는 기쁨만을 발견할 수 있다.
주님은 코로나 시국으로 일년동안 함게 모이지 못하다가 이제 부활의 아침에 달려나온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죽음은 내려놓고, 죽음에 대한, 삶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기쁨만 가지고 가라.’
부활의 아침이다. 이 아침에 우리 주님은 부활의 기쁨과 생명을 선물처럼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