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8일 주일설교

제목: 탐스럽기도 한 나무
성경: 창세기 3장 1-7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에덴 동산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실수만을 기록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즉 이 이야기는 모든 인간들 속에 있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금지된 것 이야기,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이야기, 그 선을 넘었을 때의 이야기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들은 보통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것을 우리는 원죄라고 부른다. 그 원죄로 인하여 인류가 에덴에서 쫓겨나 고통 받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가끔씩은 그들의 행위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죄라는 말은 ‘모든 죄의 원인이 되는 죄’라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는데, 그들이 이런 죄를 짓게 만든 그 원인이 되는 죄를 원죄, original si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개혁자 칼빈은 그 원죄를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먼저는 불신이다. 믿지 못하니까 의심하였고, 흔들렸고, 속아 넘어갔다. 또, 흔들리고 속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이 없었다면 굳이 그 열매를 먹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원죄는 불신과 교만 이 두 가지로 축약된다고 보았다. 불신과 교만이 원죄라면, 그것은 우리들 속에도 있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도 있다.

불신의 반대말은 확신인가? 단어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불신의 반대는 사랑이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먹지 말라고 했지만,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일 거라고 받아들인다. 이걸 왜 먹지 말라고 했지 의심이 드는 것은 사랑이 깨졌기 때문이다.

왜 사랑은 그렇게 쉽게 식을까?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말을 뜨겁게 사랑하고 결혼해 본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점이 인간의 모순이다. 그런 말은 사랑을 알지 못해서, 오해해서 생긴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사랑은 이기적이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속담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사랑조차 억압으로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가슴이 뛰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기쁨이고 사랑은 즐거움이지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교만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가슴이 뛰지 않는 것을, 사랑이 식은 것으로 여기는 자가 불신한다. 의심하는 자는 사랑만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행동을 의심하고, 평소에 익숙하던 것마저 다르게 생각한다. 하와에게 뱀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릴만한 이유가 있다. 이미 사랑이 식어있었기 때문이다.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가 핵심이다. 어느 말을 듣든지 그 말을 한 자에게 속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 속한 자요, 유혹하는 자의 말을 듣는다면 그에게 속한 자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자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 혹시 혼동 될까봐 말씀드리거니와, 내가 사랑하는 자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어준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한다.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세상으로 간다. 그러나 참 안타까운 것은, 세상이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은 냉정하며, 세상은 사람을 삼킨다. 가짜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는 삼키울뿐이다.

잠언7장에는 어리석은 젊은이에 대한 교훈이 있다.

(우리말성경)그가 모퉁이 근처 길로 내려가 그 여자의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때는 어스름할 무렵, 날이 저물고 밤의 어둠이 내릴 무렵이었다. 바깥에서, 길거리에서, 길모퉁이마다 숨어서 기다리던 여자가 여자가 그 청년을 붙잡고 입을 맞추며 뻔뻔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집에서 화목제를 드렸는데 오늘에서야 내 서원을 이루었답니다. 그래서 당신을 맞으려고 나왔고 그토록 당신의 얼굴을 찾다가 이제야 만났네요! 내가 침대를 이집트의 무늬 넣은 천으로 씌워 놓았고 또 몰약과 알로에와 계피 향을 뿌려 놓았지요. 와서 우리 아침까지 깊은 사랑을 나눠요. 우리가 서로 사랑을 즐겨요! 남편은 멀리 여행을 떠나서 집에 없고 돈지갑을 두둑히 채워 가지고 갔으니 보름이 돼야 집에 올 거예요.”

이 이야기의 결말도 잠언이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호리는 말로 꾀니, 그는 선뜻 이 여자의 뒤를 따라 나섰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도 같고, 올가미에 채이러 가는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다. 마치 자기 목숨을 잃는 줄도 모르고 그물 속으로 쏜살같이 날아드는 새와 같으니, 마침내 화살이 그의 간을 꿰뚫을 것이다.

이 교훈은 남녀간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길을 떠나 세상의 길을 가는 걸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규범들을 나를 얽매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믿음을 지키려면 오래 걸리기에, 슬쩍 편법을 쓰는 일을 말한다. 주일을 잘 지키기엔 피곤하니 마음만 진실하면 된다고 타협하는 일을 말한다. 내가 지금 교회에 출석하지 않지만, 내 맘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삶의 어느 골목, 어느 갈림길에서 그물처럼, 화살처럼, 속삭임처럼 음성이 들리게 될 것이다.

그걸 먹으면, 그걸 행하면, 그걸 도전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처럼 되는 거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하나님과 동급이지 뭐. 설마 죽인다는 말이 사실이겠어? 열매 하나 먹는다고 죽인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잖아. 하나님이 그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 열매가 해로워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야. 그건 하나님의 악의와 시기 때문이야.

문득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뱀의 말은 일부 사실이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거짓말을 숨기고 있었다. 죽음은 확실하게 하와를 찾아왔다.

사람들은 불신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말씀에 쓰여진 하나님의 사랑, 지켜야 할 명령, 경고의 말씀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 그의 말씀을 지키라. 그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마음속만 뒤지면서 그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고 지킴으로 믿음을 확인하면 된다. 그 말씀을 기억하여 유혹의 순간에 이긴다면 사랑하는 것이요 믿는 것이되, 그 유혹의 순간에 말씀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불신이고, 생각났더라도 말씀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불신이다.

그러한 선악과의 상황은 우리의 삶에, 이번주에도 우리들에게 계속될 것이다. 선악과의 상황은 우리들에게 진행형이다.

불신만큼 치명적인 것이 교만이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하와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하와의 욕망, 하와의 원죄가 우리 인간들의 원죄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절대권력을 가진 왕들은 인간 이상이기를 원했다. 애굽의 가장 중요한 신은 태양신 ‘라’이다. 태양신 라가 선발하여서 세상에 내려와서 통치하는 호루스의 화신을 파라오, 성경의 표현으로는 바로라고 불렀다. 즉 바로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믿었다.

로마 최초의 황제 카이사르는 신이 되었다. 그의 수식어는 신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만물의 주, 신이신 아우구스투스였다. 고대의 인물들 뿐 아니라,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자기들의 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믿었었다.

현대에 이르러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자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현대인은 신을 거부하는 형식으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려고 한다. 과학은 신의 존재에 대하여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지만, 사람들은 과학을 핑계대면서 하나님을 떠난다.

사실은 사람들 속에 그렇게 하고 싶은, 하나님과 동급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와는 선악과에 그 욕망을 담았고, 현대인들은 각자가 선호하는 것에 담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돈에 담고, 어떤 사람은 짧은 인생을 즐기기에 담고, 어떤 사람은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자신의 욕망을 담는다. 그래서 자기의 삶은 신의 손아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내 인생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내 죽음마저 내가 선택하겠다고 소망한다. 그것이 교만의 죄인 줄 모른 채.

지난 세기의 많은 혁명가들과 테러리스트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인용한 시가 있다. ‘인빅투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이렇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므로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겠다’는 말은 무척 당당하며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미국 오클라호마 주 청사 폭탄테러로 168명을 죽게 한 티모시 맥베이는 죽기 전에 기자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을 저 시로 대신하였다. 남의 생명을 빼앗은 살인범행을 이런 시구로 미화하다니, 쓰레기만 못한 테러범들이 고상한 시인의 시를 자기변명에 끌어대다니, 죄는 양심뿐 아니라 지성도 마비시키는가보다.

실제로 그 시를 지은 영국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는, 12살에 골수결핵을 앓았고, 합병증으로 18살에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 스물 두 살 때에는 오른쪽 다리도 절단해야 목숨을 지킬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다른 병원에서 당시로서는 확실치는 않지만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했고, 헨리는 극심한 고통을 동반한 투병생활 중에 시를 지었다.

제목은 ‘인빅투스’, ‘정복될 수 없는’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온통 칠흑 같은 암흑
억누를 수 없는 내 영혼에/ 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라도 감사한다.

잔인한 환경의 마수에서/ 난 움츠리거나 소리내어 울지 않았다.
내려치는 위험 속에서/ 내 머리는 피투성이지만 굽히지 않았다.

분노와 눈물의 이 땅을 넘어/ 어둠의 공포만이 어렴풋하다.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

그리고 평생을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고 호탕하게 살았다. 헨리의 형은 의족을 하고 있던 동생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다리를 빼들고 큰 소리로 웃고 열정을 가지고 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헨리의 친구였던 작가 스티븐슨이 보물섬이라는 소설에서 외다리 선장의 캐릭터는 헨리를 본 딴 것이었다. 스티븐슨의 아들은 아버지의 친구인 헨리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큰 붉은 수염과 목발을 가진 위대하고 빛나는 거대한 어깨를 가진 동료, 유쾌하고 놀랍도록 영리하며 음악처럼 굴러가는 웃음을 지닌 사람, 상상할 수 없는 불과 활력을 가졌다. 한 발로 휩쓸어버렸다.
헨리는 이토록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지켜가면서 투쟁의 시를 썼다. 훗날 흑인 차별로 인해 27년을 감옥에서 지냈던 넬슨 만델라도 그 긴 시간 동인 이 시를 암송하면서 스스로 넘어지지 않도록 지켰다. 이 시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의 눈물과, 어둠에 내던져진 자의 꺽이지 않는 용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알량한 테러리스트들이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으면서 ‘나는 내멋대로 사니까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함부로 가져다 썼다.

누가 인생의 주인인가? 누가 삶을 알고, 누가 죽음을 알았는가? 죽으면 끝이라고 누가 함부로 말하는가?

삶과 죽음은 그 비밀과 앞뒤를 모르는 우리 인생들이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는 인간이라면 함부로 판단할 것이 아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 외에 인생을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현대인들은 과장법의 달인이다. 인생 조금 힘든 것을 가지고 운명을 말하고, 열매 하나 먹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차별 당하고 있다고 엄살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아담과 하와의 인생을 제약하고 억누르는 족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살고있는 에덴이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그 동산의 어느 구석에서라도 잘 보이는 그 중앙에 심어놓으셨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상징이고, 사랑의 상징이며, 그들과 함께 있다는 임재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미혹된 눈으로 보니, 그것이 억압이며 차별이며 자기들을 가두는 장벽으로 보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까짓 열매 하나, 그깟 자리 하나에 하나님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악과는 오히려 하나님의 배려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만들어주신 규례일 뿐이다.

마치 광야에 성막을 만들되, 성막 중간에 휘장을 쳐서 구별한 뒤에 앞쪽은 성소로서 제사장들의 공간이지만 뒤쪽은 지성소로서 하나님의 공간이 되게 하신 것과 비슷하다. 그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온 자는 죽었다. 온 땅이 하나님의 처소요,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인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장소로 구분하고, 열매로 구분하신 것이다.

동산 중앙의 나무들의 멸매는 하나님의 영역을 상징한다. 선과 악을 아는 일, 영생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해 있다. 선악과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보아도, 선과 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능력이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일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였고, 솔로몬은 요청하였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실제 요청한 것은 ‘듣는 마음’이다. 그걸 지혜라고 해도 문맥은 통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왜 솔로몬이 지혜를,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는지를 함께 말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솔로몬의 구절을 읽어보면, 거기에 선악과와 관련된 구절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의 이 요청은 어떤 의미인가? 왜 새삼 선악을 분별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가? 이미 에덴 동산에서 사람은 선과 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지 않았던가?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솔로몬은 스스로 선악을 구별하려 하지 않고, 듣는 마음, 곧 하나님께 들어서 선악을 분별하려 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정해 놓은 선과 악의 기준, 법으로 정해진 것, 관습으로 굳어진 것,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사회의 전통과 규범이라 할지라도 다시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기 원했던 것이다. 왕과 법관으로서 백성을 재량껏 재판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복귀하기 원한 것이다.

옳고 그름의 원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신명론이라고 한다. 또는 기독교 윤리라고도 할 수 있다. 신명론의 명제는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은 행하여야만 하고, 그것은 선이다. 금하신 것은 할 수 없고, 그것은 악이다.
너무 간단해서, 또는 너무 직접적이어서 놀랄만 한 말이지만, 실은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면 카토릭과 개신교가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이 말에 나타난 ‘선’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카토릭은 어딘가에 절대적인 ‘선’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다는 이른바 실체론을 지지하는데, 우리 개신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고 믿고 이것을 신의론이라고 한다. 하나님 외에 다른 기준이 없다.

카토릭과 개신교는 단순히 다를 정도가 아니라 성경의 해석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개신교와 카토릭은 예수님때로부터 1500년 동안 하나였었다. 신의론을 주장한 사람으로 어거스틴을 들 수 있는데, 수백년 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본체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훗날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 안에 만연한 실체론을 배격하고 신의론으로 강력하게 돌아섰다. 아퀴나스가 주장한 본체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배경이 되었다는 이유로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미워해서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그 죽은 개에 대해서 많이 논의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욕하기도 했다.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해석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명하셨기에 그것이 선이며,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 악이다. 우리 인간들이 선과 악을 나눌 수 없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집안에 들어온 도둑을 붙잡아서 때렸는데, 정당방위냐 아니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그건 법에서 정하면 된다. 다만 법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선과 악의 기준이 들어있지는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법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사전적으로는 공동체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럼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이 언제 한번이라도 의심 없이, 이견 없이 합의된 적이라도 있었는가? 칸트는 인간이 아직 법이란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탄식하였다.

어떤 실제적인 사건에 하나님이 일일이 개입하여 선악을 판단하셔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옳으시며, 옳고 그름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선과 악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다. 선과 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도 바리새인에게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가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사탄과 논쟁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까지만 말할 수 있었다. 사람을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 되는지를 알 수 있다.

내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어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선악을 아는 일에 선악과를 따먹은 자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점수를 매겨서 선인이나 악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의 행위가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권한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그 쉽지 않은 길을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셨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이다. 핑계대지 말라고 예수께서 친히 모범으로, 낮아지심으로, 꾸짖지 아니하심으로, 범죄의 현장에서 붙들려 와 길바닥에 팽개쳐진 사람에게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한계가 거기에 있다. 선악과는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킨다.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선악을 알게 된 사람이 처음 발견한 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또 다루겠지만, 자신을 살피게 되었다는 것은 큰 상징이 있다.

사람이 문득 고혈압이나 당뇨 진단을 받으면 의사의 진단에 따라 처방을 받고 약을 먹지만,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진단은 의사가 했지만, 오히려 이제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하다. 자신의 식습관과 생활패턴을 살펴보고, 과도했던 음식을 줄이고, 필요한 음식을 섭취하며, 또 적절한 운동을 한다. 이전까지는 내 몸이 능히 감당하리라고 생각했던 것들까지도 다시 바라보고 점검한다. 지혜라고 할것까지도 없는 당연한 일이며 생존이다.

영적 진단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선악과를 통해서 아담과 하와 안에 있던 것들이 내 안에도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내 안의 욕망과 교만에 대하여 영적 진단서를 받아 쥔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고 불필요했던 것들을 버리고, 필요한 것들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소중한 인생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새롭게 얻은 생명을 간직한 채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백성들이다.

그 안에는 새롭게 지음 받은 순결한 영혼들,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 닮은 모습들, 함께 어울리며 기뻐하는 천국 백성들의 모습이 있다.

여기에 자꾸 세상을 담으려 하지 말라. 세상의 생각들, 욕망들, 돈이 주인되어버린 타락한 시대들. 우리의 판단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가까워져야 한다. 그의 말씀이 기준이 되면 된다. 선악의 기준은 말씀에 있다. 유혹을 이기는 힘은 말씀에 있다. 내가 주인이라면, 이런 것들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요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음을 기뻐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항상 유혹을 만난다. 에덴 동산에도 뱀은 드나든다. 오히려 시험하는 자가 노린다. 그래서 기도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 마옵시고’라고 기도한다. 말씀이 나의 지혜가 되어 지키케 하옵소서.

선악과의 교훈이 여전히 유혹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교훈이 되어지고, 하나님의 붙드시는 힘이 되고,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는 증거고 우리 안에 꼭 새겨지기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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