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주일설교

제목: 하나님이 정말 그러셨나?
성경: 창세기 3장 1-3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욥기는 동방에 살았던 욥이란 사람의 고난과 결말을 기록한 책이다. 욥이란 사람의 이야기는 물론 흥미롭지만, 욥의 인생 이야기가 흥미롭고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해서 성경에 포함된 것은 아니다. 욥기에 기록된 교훈은,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데,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질문으로부터 신정론이라는 답이 나타난다.

악의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악은 그리스도인에게 심각한 장애물이다. 악의 존재는 곧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은 매우 강력하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신다면, 그 자녀들이 악에 처하도록 버려두시는 것은 모순이라는 생각을 한다.

신정론은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선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조차 사용하셔서 당신의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이 당하는 고통마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선악과 이야기는 악과 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선악과 사건이 있기 전에 악은 이미 존재하였다. 하나님은 그 나무를 명하시면서 죽음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선악과 이야기는 악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궁금하지만,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전, 영적 세계에서 타락이 있었다는 것을 슬쩍 말해주고 있는데, 오늘 이야기에서 다룰 내용이 아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롬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고 선악과 이야기는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었던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을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고발하는 현재의 이야기이며,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선악과가 사과나무로 묘사되지만, 성경이 쓰여질 당시 팔레스틴에는 사과나무가 없었다. 사과를 신성한 과일로 여기는 북유럽 신화의 영향이라고도 말하고, 라틴어의 사과(malus)가 악(malum)이라는 단어와 비슷한데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유대인들 중에는 선악과는 포도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무화과로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다급히 몸을 가리려고 바로 그 자리에서 손에 닿는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든 것이 하필 무화과 나뭇잎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틴 성당의 천정화, 천지창조에는 선악과를 무화과로 그려넣었다.

이렇게 선악과를 굳이 열매로 확정지으려는 것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어떤 과일의 형태로 선악과를 이해하고 싶은 바램의 산물일 뿐, 선악과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상징물로 등장한 것이지, 실제 어떤 나무의 열매는 아니다. 열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지 명령이 핵심이다.

선악과 이야기에는 사람이 악에 유혹 받아 넘어가는 모습의 전형적 패턴이 들어있다. 그런 모습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된 것을 설명하는 데에 이만큼 효과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선악과 이야기는 알고 있다. 선악과 이야기에서, 인간이 죄에 포로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뱀이 곧 사탄은 아니다. 1절에는 뱀도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기록이 있었고, 뱀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간교함이 뱀의 특성이었으며, 이런 특성이 악한 자로 하여금 뱀을 선택하여 유혹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뱀이 곧 사탄은 아니며, 사탄이 나타나는 유일한 형태도 아니다. 다만 사탄에 의해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뱀이 하와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이 참 미묘하다. 마치 궁금해서 물어보듯, 비밀이 있는데 너는 아느냐고 묻는 듯, 먹지 말라고 하셨던데 그 이유를 알고는 있느냐고 비웃듯, 아니면 관심 없는 것이었는데 마침 지나가다 물어본다는 느낌으로 슬쩍 물어본다.

그렇게 악은 자신의 모습을 감출 줄 안다. 적절한 위장은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린다. 멋진 옷으로 위장하고, 문득 떠오른 호기심으로 위장하고, 널 위해 비밀을 알려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친절함으로 위장하고, 삶에 필요한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처럼, 인기 신상을 알려주는 친구처럼, 기발한 특종을 취재한 인기 유투버처럼, 새로운 게임을 발견한 친구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악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을 미리 차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치명적인 유혹은 일상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뱀이 질문할 때, 대화를 요청할 때에 즉각 끊어버리지 못한 것이 실수라고 배운 적도 있다. 유혹에는 노출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악과는 대화하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런 질문을 듣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삶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도 그렇게 다가오고, 그런 방식으로 알아야 하니까.

그러기에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하다. 듣는 모든 말을 의심하면서 살 수는 없다. 다만 비둘기 같이 순전하되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각 마을로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6:16)

예수께서 왜 하필 뱀을 지혜롭다고 말씀하셨을까? 사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성경해석집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인용하신 것이다. ‘너희는 내게 대하여는 비둘기같이 순결하지만 이교도에 대해서는 뱀같이 지혜로워라’ 뱀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과 그것을 피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위험을 경계하고, 알아야 안전하다.

하와는 저 접근이 위험한 것이라는 점을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이익에 대하여 둔하면 조금 불편하게 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유혹에 대하여 둔하면 삶을 빼앗기게 된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 유혹에 대하여 민감해야 한다.

특히 이런 질문과 의심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면의 물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섬세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어린아이가 하나님 계신 것이 진짜 맞는건가?라는 의문이 들었다면, 특별한 자극 없이 어린아이가 그런 질문을 가졌다면, 그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 그건 사람 자체가 그런 호기심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다는 말이 될 것이다.

외부의 질문은 단호히 거절하면 되겠지만, 내면의 질문에는 답을 해 주어야 한다. 해답을 찾지 않고 억눌러 놓거나 무시하면 언젠가 더 큰 목소리로 뛰쳐나오게 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저 짧은 한 마디의 말 속에서, 그 속에 숨은 악한 의도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지혜다. 그것에 넘어갔을 경우 나타날 치명적인 결과에 대한 성찰, 무엇보다 내 영혼을 각성시키는 하늘의 은혜가 필요하다.

뱀이 하와에게 사용한 ‘참으로’라는 단어가 매우 미묘하고 강력하다. 본문에 ‘참으로’라는 단어는 새번역와 우리말성경에는 ‘정말로’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요즘 시대에 ‘정말?’ 또는 ‘진짜?’라고 사용하면서 감탄사처럼 쓰이기도 하고, 놀람을 표현하기도 하고, 스스로 사용하면서는 강조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을 진지한 대화에서 사용할 때에는 잠시 멈추고 그 내용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그거 진짜야?’라고 물어보면 갑자기 혼란하게 된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거 진짜야?’라고 물어보자 오히려 의혹에 빠졌다. 마치 집에서 나올 때에 분명 가스렌지 불 끄고 나왔는데, 누군가가 ‘가스렌지 끄고 왔어?’라고 물으면 갑자기 혼란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마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큰 비밀이 있는 것처럼 ‘진짜야?’라고 묻는다. 사랑하는 남편과, 에덴의 동산과,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다가 문득 왜 내가 저 열매는 먹지 못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건 왜 못 먹게 한 건데?라고 말하면서 잠자던 욕망을 충동질한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건데?라고 삶 자체에 대해서 항의한다.

지나가듯 사용한 단어이지만, 신중하게 고른 말이다. 그 유혹은 치명적이다.
너 못 먹잖아? 니가 왜 그런 불이익을 당해야 해? 참 안됐다.
이런 말들을, 그 속에 숨겨진 불순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서 하는 말도 있지만, 그 반대도 있다. 겉으로는 나를 생각해주는 듯 하지만, 실은 내 욕망을 부추키고, 내 분노를 자극하는 말들, 내가 어떻게 반응해 주기를 기대하는 말들이 많다.

특히 나의 연약한 점, 나의 부족한 점, 평소 불만이었던 것들을 드러내는 질문에 조금 너그러워야 한다. 영화배우 중에는 위험한 연기를 스턴트 전문배우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해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배우 중에 안젤리나 졸리라는 사람이 있다. 졸리가 어떤 영화를 찍던 중 책상에 얼굴을 부딪쳐서 이마에 흉터가 남았다. 한 인터뷰에 출연했을 때에 사회자가 ‘얼굴에 흉터가 생겨서 낙담했겠다’고 말하자 대답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에게 여러 흉터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것은 그저 삶의 일부일 뿐이고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하나의 특징이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약속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작은 유혹에도 넘어간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묘한 단어 하나에 영혼을 팔아넘기게 된다.

한 두 마디 말로 하와를 유혹한 것 같지만, 그 단어의 선택은 신중했고, 치명적이었다. 그런 치명적 유혹의 단어가 또 있다. 뱀은 하나님의 이름을 슬쩍 바꿔 불렀다. 2장에서 시작되는 창조이야기부터 4장까지, 하나님의 이름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으로 불리는데, 두 곳에서만 ‘하나님’으로만 칭해지고 있다. 한번은 뱀의 유혹의 말에서, 다른 한 번은 하와의 대답에서 그렇게 쓰인다. 의도적인 사용이었다는 말이다.

이름은 단순히 부르거나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은 그 자신, 그의 정체성을 담는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를 노래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냥 하나의 꽃으로 부르는 사람은 대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뿐이다. 우리 교회 카페에 여러 화분이 있는데, 나는 그냥 꽃으로만 부를 뿐이고, 피었다가 지는 것만 알 뿐이다. 가끔 예쁘게 핀 꽃들을 사진 찍지만 그뿐이다. 꽃에게 나는 가끔씩 그 꽃을 따서 바닥에 버리는 아이들과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내는 그 꽃의 이름을 부른다. 이건 덴마크 무궁화고, 저건 가랑코, 저건 몇 년 전 시골 고모 댁 마당에서 캐 온 작살나무꽃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그 꽃을 아끼고 사랑하고 물을 주는 사람이다. 그냥 꽃이라는 단어로만 부르는 사람하고 그 꽃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다르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살아계시는 인격적 하나님의 칭호를 감추고,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원문에는 엘로힘이라는 일반적인 신적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름 하나를 바꿈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유일한 창조주가 아니라, 수많은 신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와를 창조하신 여호와가 아니라, 일반적인 신이 되는 것이다. 나를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책 속에 있는 하나님, 어디서 들은 신, 존재를 증명 받아야 하는 신이 되며, 인간을 억압하는 신, 만들어 놓고는 먹지 말라고 하는 심술궂은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뱀은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이름처럼 하나님으로 부르면서, 하와에게도 그 아무것도 아닌 이름을 부르도록 유도하였고, 하와는 그런 부름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우리말로는, 그리고 우리말 성경으로는 이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말로 번역된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벌써 유일신 하나님을 향한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굳이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려면 ‘신’으로 바꿔 읽으면 비슷할 것 같다.
신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을 신으로 바꾼게 어때서? 이 평범한 호칭에 유혹이 담겼다. 불신하도록 자극하는 도발이 담겼다. 꼭 틀린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였기에 치명적인 가시를 감추었다. 사냥꾼이 덫을 설치하고 그 위에 낙엽을 뿌려서 위장하듯, 그 위험함을 친근한 말투나 여유로운 표정 뒤에 감추고 있다.

유혹은 그 질문에 담긴 단어 하나에도 이렇게 신경을 쓴다. 그래서 여자도 대답했다.
신의 말씀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잡혔다. 대답하는 순간, 그 용어를 사용하는 순간, 그 단어는 주문이 되었고 마법은 작동되었다. 어쩌면 그 속에서 자신감이 솟아났을지도 모르겠다.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동질감, 비밀을 공유한 즐거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포로가 된 것이다.

단어 하나가 그렇게 중요할까 싶지만, 그게 덧을 작동시키는 방아쇠와 같다. 작은 실을 건드렸지만, 창애는 땅에서 튀어오르고, 하늘에서는 그물이 떨어진다.

그래서 욕을, 거친 단어들을 조심하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평범한 욕이라 할지라고, 배우면서 증오를 배우고 편견을 배우고 편가르기를 연습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이 욕을 배우는 것에 어른은 반응해야 하며, 스스로를 삼가는 것이다. 일베의 용어나 메갈의 용어가 위험한 것은, 그런 단어들을 통해 유혹과 악이 깃들기 때문이다. 그런 용어들은 파괴력이 있어서 상황을 바꾸고 사람을 억누르지만, 그 힘이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긴 대가라는 것을 사용하는 자만 모를 뿐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정당하게, 필요한 때에 사용하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신이시여’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신을 부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만군의 여호와, 유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그런 모습이 보인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구체적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이, 구체적인 응답을 다윗에게 가져왔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는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시를 지어 노래했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124:7-8)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처음 등장하던 창세기 12장에서의 행적을 보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처음 한 일이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창12:7-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자주 불러야 한다. 그 이름이 우리의 힘이요, 그의 이름이 우리의 도움이다.

하와는 이것을 실패했다. 뱀을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바꿔 불렀고, 그 유혹에 넘어갔다. 그래서 말했다.
‘만지지도 말랬다’
하나님의 말씀은 ‘먹지 말라’였을 뿐인데, 하와는 거기에 ‘만지지도 말랬어’ 라고 덧붙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자,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지 않자, 하나님의 말에 자기의 생각을 덧붙이게 되었다. 그 덧붙임, 그 호들갑, 그 과장법이 타락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렇게 말해버리자 먹고 싶은 욕망은 실제가 되었다. 그 금지령이 너무 엄한 것이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는 흔들려버렸다. 하와는 스스로의 방어벽을 무너트리고, 성문을 활짝 열어 제친 모습이 되었다.

에덴 동산이 유지되는 열쇠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나를 보호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하와는 태연하게 뱀의 말에 대답할 수 있어야 했다. 분노할 필요도 없고,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셨어’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유혹은 항상 있는 것이다. 날 찾아왔다고 괜히 분노할 필요도 없다. 거긴 에덴 동산이었다. 그 동산 안에 뱀이 들어왔다. 어디에나 있다. 교회 안에도 있고, 드나들 것이다. 우리는 태연히 대답할 준비만 갖추면 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신뢰한다.

괜히 쓸데없는 해석으로 열지 말아야 할 문을 여는 사람들이 많다. 잘난 척 한 마디 덧붙임으로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현실에 만족하기만 하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은혜의 문을 활짝 여시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도전하기를 격려하고 계신다. 더 큰 은혜의 바다는 제쳐놓고, 하나님이 금하신 작은 것에 불만을 집중하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지킬 것을 지키며 그의 이름과 명령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를 존중하라, 그의 이름을 귀히 여기라. 그의 이름을 부르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삶과, 이름과, 계명들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들의 힘이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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