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7일 주일설교

제목: 하나님의 안식
성경: 창세기 2장 1-3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다. 이 천지만물에 하늘의 별들도 포함되고, 열왕기상의 기록 등을 참조하면 천사들도 적용된다. 일곱째 날에 모든 일을 그치고 쉬셨다.

창세기의 일곱째 날이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은 아니다. 오늘 본문의 일곱째 날은 안식일보다 먼저 있었던 쉬는 날이다. 안식일은 출애굽 이후에 주어진 계명이다. 일곱째 날에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을 근거로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주셨다. 하나님의 안식은 ‘쉼’에 초점이 있고, 출애굽의 안식일은 하나님 백성의 삶에 초점이 있다.

안식일 계명을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에게 주지 않으시고,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제는 자유민이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신 것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십계명은 성경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에는 안식일에 모든 백성이 쉬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이라고 부연한다.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에서 안식일에 모든 백성이 쉬어야 하는 이유를 애굽에서는 노예의 신분이었고 쉬는 날 없이 일아였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내셨으니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모셋가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가야겠다고 말한 이유가,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게서 세상에 매여 고생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목적 자체가 광야에서의 예배, 예배와 안식이라는 점이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미치는 것인데 반하여, 안식 자체는 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안식은 세상의 모든 인간들과 모든 생명체들과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다.

땅에도 안식의 명령이 주어졌다.

레25:3-4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지구와 우주에게도 안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훗날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성경은 가나안 땅이 안식을 취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물의 안식도 선포되었다. 신명기에 나타난 안식의 명령은 사람에게뿐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미친다.

신5: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이토록 안식은 마치 우주의 보편적 법칙처럼 선포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피곤하니 쉬라는 이야긴가? 제정 러시아가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무너지면서 세워진 소련은 안식일은 기독교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생산을 저해하는 요소로 여겨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엿새 일하는 것보다 하루 더 일하면 그만큼 더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노동자들이 쉬지 못하면서 오히려 생산이 떨어졌고, 경제는 쇠태했고, 결국 소련의 공산정권이 붕괴되었는데, 이를 보니 하나님의 안식 명령은 진리라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었는데, 어느새 우리 사회는 직군에 따라 주5일 근무가 정착되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라는 것이 계명이라면, 주5일제는 성경의 뜻에 으것날까?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뛰어즌 후보들은 앞다퉈 주4일제 근무, 혹은 주 4.5일제 근무를 들고나왔다. 실제로 유럽쪽에서는 주4일 근무가 많이 확산되어 있고, 큭히 코로나 시국에 더 촉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구인사관리협회 2019년 통계는 미국 전체 기업 중 27%가 주4일제를 도입했다고 발표했다.

쉬는 날은 매우 중요하다. 몇 년 뒤의 달력까지 찾아가면서 년간 공휴일 날자와 연휴 기간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만약 주4일 근무가 현실화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쉬려고 일하는 것일까, 일하려고 쉬는 것일까? 옹경시대의 일과 산ㅎ업화시대의 일에는 큰 차이가 있고, 정보화시대의 일에는 더 큰 차이가 있다. 분명한 것은 장차 쉬는 날은 더 많아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쉬는 날이 많아진다는 것은, 일하는 날은 그만큼 더 힘들게 일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관심은 쉬는 날에 있다. 쉬는 날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혹은 어떻게 쉴 수 있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고, 일의 질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잘 쉴 수 있는 사람이 결쟁력을 가질 것이고, 잘 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삶의 초점이 일에서 쉼으로 옮겨가는 모습도 보인다.

신앙생활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앞으로 그동안 사람들이 해왔던 힘들고 어려운 일을 로봇이 대신하는 시대가 온다면,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쉬는 시대가 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그때 안식일의 개념은 어떤 변화의 요청을 받을까? 엿새 일하고 하루 쉬라는 성경 구절을 이 시대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제 교계에서 안식일 또는 주일의 개념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말씀은 변치 않는다. 다만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안식을 지키면서 안식일 계명을 정하였는데, 그들의 법도들을 예수께서 다 무시하고, 바꿔버리신 예가 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 예수의 선언이었다.

주일이라는 말로 바꿔 말해보자면, 우리들과 오늘날의 교회가 생각하는 주일의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요, 그 다음이 하나님 나라의 일, 예컨대 섬김 봉사 전도 나눔 등의 일이요, 그 다음이 쉼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게 맞는가? 놀랍게도 안식일의 가장 오래되고 기본이 되며 하나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신 안식일은 쉼의 날이라는 점이다. 나는 장차 다가올 주4일, 혹은 그 이상도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쉼에 대한 명령과 교훈을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쉼에 담긴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찾아보고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쉬는 날은 어떤 날이었는가? 하나님의 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판 성경 외의 대부분의 번역성경에서 오늘 본문의 ‘안식하셨다’는 단어를 ‘쉬셨다’고 번역하고 있다.

공동번역: 이렛 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표준새번역: 이렛날에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우리말성경: 그리고 그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NIV,KJV: he rested

하나님의 쉼은 어땠을까? 하나님도 우리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 밖으로는 나오지 않으셨을까? 오늘 성경에 보면 그날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다. 일곱째 날에도 무엇인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지와 인간을 만드시는 데에 엿새가 걸렸다. 그리고 두 가지 하나님의 행위가 일곱째 날에 있었다.

첫째, 쉬셨다. 이렇게 쉼으로 천지의 창조가 마쳐졌다. 이 쉬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창조가 마쳐진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 끝나는 종이 울렸더라도, 선생님이 나가지 않으시고 쉬지 않으신다면 수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쉬심으로써 창조 사역이 마쳐지고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신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보다도 오히려 일을 마감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둘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각 날마다 그로 인한 영광, 그로 인한 아름다움이 날마다 가득하였다. 창조의 엿새가 지나는 동안 항상 보기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심으로 이날을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셨다. 이 날에는 어떤 물체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자체를 거룩하고 복되게 하셨는데 그 방법이 안식, 쉼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일곱째 날은, 소극적으로는 창조사역의 완성이, 적극적으로는 축복과 성화가 이뤄진 날이다.

어떻게 쉼이 거룩함이 될 수 있는가? 거룩함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용어다. 영어 성경에서는 holy라는 단어로 사용된다. ‘구별하다’는 말이다. 똑같은 사람인데 구별된 백성이라는 모습으로 쓰인다. 똑같은 물건인데 구별되었다는 의미로 쓰인다. 똑같은 시간인데 구별되었다는 의미로 쓰인다. 일주일 중에 똑같은 하루인데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기에 거룩한 날이다.

나아가서, 그 날이 거룩하기에 그 날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일곱째 날의 모습을 출애굽기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출31:4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평안하였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오 ‘인나페쉬’로서 ‘쉬어 평안하는 것’, 성령의 임재를 의미한다. 이날의 쉼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쉼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안에서의 평강의 쉼인 것이다. 즉 안식은 단순한 쉬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시간과 공간처럼 특별한 존재이며,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쉼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다. 하나님의 쉼은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시키는 일이다. 완성하였기에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 쉬는 날이다. 쉼으로서 과거는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쉼은, 과거가 혹시 잘못되었더라면 다시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으로서, 완성을 보조하는 시간이다. 돌아볼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쉼은 한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괴로워서 좀 쉬어야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쉼에 속하지 못한다. 과거를 잊기 위한 쉼은 의미 없고, 과거에 솔직해야만 한다. 진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지나온 시간들을 의미 있게 보낸 사람들이다. 이리 저리 핑계대면서 신세 한탄만 하고, 마땅히 해야 했을 일들을 대충 때워 넘긴 사람들에게는 온전한 쉼이 없다.

쉼은 미래를 위한 약속이다. 안식은 하나님의 일이며 또한 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4:4-5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기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이 구절에 따르면 안식은 창조 때의 하나님의 일임과 동시에, 장차 우리가 들어가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안식은 창조에서 시작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의 쉼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맛보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고백록에서 영원한 안식을 안식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에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하셨기에 주님의 품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에게 참 평안이 없었나이다’

이것이 영원한 나라와 연관되어 있다.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다.

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창조의 일곱 번째 날은 종료되지 않은 하나님의 날이다. 창조하시던 여섯 날에 항상 나타났던 말씀 하나가 일곱째 날에는 보이지 않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이다.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오지 않았다. 이 일곱째 날에서 영원무궁히 지속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엿보인다.

하나님의 쉼은 과거의 일이고 미래의 일이기에, 현재도 그 안에 포함된다. 다시 안식일을 말씀드리거니와 영원한 하나님의 쉼을 인간에게도 허락하시며 명령하신 것이 안식일요 쉼이다. 위리의 쉼은 영원한 하나님의 쉼을 현실에서 맛보는 축복이다.

시편 23편은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이 어떻게 다윗의 현실에 임하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파란만장했던 다윗의 삶에서,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다. 다윗은 현실에서 하나님의 쉼을 맛보았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에 어느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는가?’ 아마도 기자는 황제로서의 화려한 시절을 기대했을지로 모르겠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어서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하였던, 그의 기념비적인 전쟁의 한 순간을 지목하였다. 산을 넘을 때, 어느 주일 아침, 산 아래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에 이끌려 예배당에 들어가서 앉았는데, 그 순간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런 순간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쉼의 한 자락을 보여주시는 순간이 아닐까? 산을 넘느라 육신은 고단하였겠지만, 영혼이 쉼을 얻을 때에야 진정한 안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의 인생, 지금 나의 가정, 지금 나의 예배가 영혼의 쉼, 마음의 쉼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는 축복을 걱정에 빼앗기지 말고, 미래에 강탈당하지 말라. 현재의 쉼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기보다는 현재를 향한 부름이다. 하나님의 쉼을, 예수께서 약속하신 평안을 현실에서 누리는 사람이 되라. 쉼은 태초에 시작되어 영원에 이를 것인데, 현재에 허락된 하나님의 쉼을 맛보는 복된 사람들이 되라.

어떻게 쉴까? 이토록 쉼이 중요하며 안식이 곧 축복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쉴지 몇 가지 생각해본다.

운동이 쉬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쉴때는 침대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적절한 운동만큼 잘 쉬는 것도 드물다.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쉴 때는 일할 때에 쓰지 않는 근육을 사용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앉아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구한말에 활동한 알렌 선교사는 왕실과 친분이 깊었다. 하루는 알렌이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고 있는데, 고종이 구경을 왔고, 옆사람에게 말했다고 한다. ‘귀빈들이 저렇게 힘든 일을 아랫것들에게 시키지 않고 왜 직접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귀한 처신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단순히 몸에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어느 교수가 일리노이주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7년에 걸친 실험을 하였는데, 첫 수업 시작 전, 이를테면 0교시에 체육수업을 편성하였다. 운동강도는 심장박동이 최대치의 8~90%에 이를 정도로 격렬한 수업이었다. 목적은 학생들의 뇌를 깨어있는 상태로 수업에 들여보내기 위함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읽기 능력과 문장 이해 능력이 17% 향상되고, 수학성적이 전교 평균 19점이 올랐다. 0교시에 참석하지 않은 학생에 비해서 성적이 두배 올랐다고 한다. 신체를 사용하자 뇌도 깨어나서 학습능력이 올랐다고 분석하였다. 교사들은 이 실험을 기반으로 하여, 체육 수업시간의 다음 수업에 가장 어려운 과목을 편성하였다. 이 학교는 4년마다 열리는 국제교육성취도 평가에서 과학 1위, 수학 6위의 성적을 거두었고, 이 실험결과에 고무된 이웃 고등학교에서도 체육시간을 편성하였는데, 같은 결과를 보았다고 한다.

몸을 움직이면 몸 뿐 아니라 머리도 깨어난다. 동시에 마음도 영향을 받는다.

현대의 운동 중에 수도원에서 시작된 것이 있다. 볼링이다. 독일의 수도원에서 생겨난 케글링이라는 게임은 악마의 상징인 케겔이라는 나무를 세워놓고 돌로 만든 공을 굴려서 넘어뜨리는 게임이었다. 케겔을 잘 넘어트릴수록 신앙심이 두터운 증거라고까지 말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게임의 매니아였고, 현대적 게임의 룰을 만들고, 자기 집에까지 볼링시설을 갖추어 놓고 가족과 방문자들까지 즐겼다고 한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정말 잘 쉬는 것이다.

독서가 쉼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조금 과장해서 읽는 사람의 인생을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으며, 책을 통해서 나 자신을 객관화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유명한 말도 있거니와, 서울대 의대의 어느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책 읽는 것은 치매 예방의 효과가 있다.

책 읽는 것은 겉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실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담배 피던 사람이 담배를 끊는 것보다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이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어려울 일일 것이다. 책 읽는 것은 일종의 능력이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과도하게 치우친 입시와 취업교육의 부작용으로 책 읽는 것으로부터 멀어졌다. 한국의 문맹율을 세계 최소일정도로 거의 모든 국민이 글을 읽을 줄 알지만, 글을 이해하고 논지를 파악하는 능력은 훨씬 떨어진다고 한다. 대충 읽어버리고,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노력해야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완고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과, 대화가 힘든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멋있어지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들수록 꼰대가 되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조금 극단적 생각일지 몰라도, 책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로 그것을 분간할 수 있다고 본다.

책이 쉼이라면, 일상 틈틈이 책을 읽는 사람은, 일상 틈틈이 쉬는 것이 된다.

다윗처럼 찬양으로 쉼을 누릴 수 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굴 속에 숨었을 때에도 노래를 지었다. 기척도 내지 못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윗의 영혼은 찬양한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위기에 위기가 꼬리를 물었던 다윗의 인생이었지만, 그는 잠깐의 시간만 주어져도 하나님과 교통하며 찬양을 만들어냈다. 압살롬에게 쫓길 때도 그랬고, 밧세바와의 간음이 발각되었을 때에도 시를 지었다.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다윗이 가진 가장 특별한 재능은 위기에 처하거나 심지어 죄에 빠졌을 때에라도 그의 마음을 낙심에 내어주기보다는 찬양과 감사로 채운 것이라고 본다. 말씀드렸던 동굴 속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사울이 밖으로 나갔을 때에, 다윗과 함께 숨어있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안도의 한숨을 내어쉴 시간에, 다윗은 벌써 다음 단계의 행동을 준비했었고, 시행하였다. 사울이 잠든 동안 그의 옷자락을 잘랐고, 사울이 나가자 바로 뒤따라 나가서 자신이 그를 해칠 마음이 없었던 것을 적극 피력하였다. 이런 지략과 용기와 신뢰는 위기에 빠져 위축되는 자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가 지혜와 용기를 얻는 좋은 실례를 다윗이 보여주고 있다.

묵상은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쉼이다.

가장 잘 쉬는 일 중의 하나가 묵상이다. 묵상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성경을 기초로 하지만, 꼭 성경을 펼처 놓아야만 묵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바탕에서 삶을 성찰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 묵상이다.

묵상은 명상과 다르다. 명상이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묵상은 인생의 거센 비바람 속에서 길을 찾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명상도 묵상도 둘 다 자신의 내면을 살피지만, 명상이 비우는 일이라면 묵상은 오히려 채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묵상은 현실에 바탕을 둔다. 현실에 부는 바람이 거셀수록, 넘어야 할 산이 높고 건너야 할 바다가 깊을수록 말씀의 묵상은 힘과 방향과 목적을 뚜렷하게 세워준다. 하나님과 동행하게 한다.

어떤 특별한 방법과 형식이 주어져야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들을 보라.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의 시대에는 성경도 없었고 안식일도 없었지만 기 사람들은 누구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면 빈번하게 하나님과 만나는 동안 대부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다. 그런데 이 만남은 아브라함의 묵상과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는 모습으로 봐도 어색하지 않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들 이삭의 신부가 될 리브가를 밧단 아람에서 데리고 올 때에, 이삭은 들에 나가서 묵상하고 있었다. 야곱의 생애 가운데도 하나님과의 여러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들이 믿음이 조상이라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것이 아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조차도 우리가 편의상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이었기에, 하나님이 저들을 굳이 선택하시고, 사용하시며, 동행하셨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 그 찾아오신 하나님은 찾아오실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들고 오셨기에 믿음의 조상들은 복도 함께 받은 것이다.

꼭 그렇게 신비한 경험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쉼은 과거의 조상들에게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더 간절하게 필요하다. 나는 이 주님의 은혜로 인한 쉼이, 일주일에 주일 하루 뿐 아니라 우리가 일에서 벗어나는 매 순간마다, 매 날마다 충만히 채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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