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1일 주일설교
제목: 함께 사는 것
성경: 창세기 2장 18-25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다고 하셨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하면서 처음 나온 표현이다. 창세기 1장과 2장 3절에 걸쳐 기록된 천지창조는 여섯째 날에 마쳤다고 선언되었다. 2장에서 우리는 에덴의 창설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야기를 보고 있다. 2장에서 지금까지 다룬 일들이 바로 여섯째 날에 사람을 지으시면서 일어난 일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 본문 18절의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마음만을 표현한 구절이 아니라, 사람의 본래 모습과 삶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요구하고 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처음부터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로 지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는데, ‘우리’라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속에 이어졌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온전해지는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기인한다.
특히 본문은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결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복 중의 하나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 중에서 가정이 제일 마지막 작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기서 남자는 아담이 아니다. 아담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가 아니었으니, 부모를 떠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이런 구절이야말로 모세의 흔적이 역력하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일처의 제도가 환경적, 역사적 산물일 뿐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기대하고 원하셨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하여 창세기 6장은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일부일처의 파괴, 즉 가정의 파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결혼은 사람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갓난아이는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도 없다. 아이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육체는 대략 20년 정도면 장성하며, 지식과 경험은 살아가는 동안 축적될 것이다. 장성해서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별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생각과 습관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하나가 되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완성시키는 절차에 속한다. 둘이 하나 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아직 사람으로서 완성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방해되는 것이 많아서 쉽지 않고, 핑계거리가 많아서 쉽지 않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흉계가 집요해서 쉽지 않고, 사람이 어리석어서 쉽지 않다.
결혼이 쉽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인간의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이 쉽지 않은 것은, 결혼은 두 사람의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이 쉽지 않은 것은 그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를 보면 결혼을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결혼을 지속하는 것도 쉽지 않다. 결혼에 대한 오해가 많아서 쉽지 않고, 함께 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쉽지 않다. 잘못된 시작도 있을 수 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눈다고 했는데, 요즘은 사람이 제 맘대로 짝지은 것을 하나님이 나눠주신다는 말까지 듣는 세상이다.
어느 심리학자의 최근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성격을 핑계로 대긴 하지만, 그건 진짜 핑계일 뿐이고, 진짜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헤어지는 이유는 가치관 때문이다. 특별히 돈에 대한 가치관,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면 더욱 그렇다. 가치관이 같다면, 성격이 달라도 괜찮은데, 서로를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성격이 같아도 괜찮은데 1+1이 3이 되는 시너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과 삶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다면, 성격이 다르면 달라서 갈라서고, 같으면 같아서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어쩌면 쉽게 퍼지고 들을 수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만 해도 일인 가구 비율이 많이 늘었다.
서울시 1980년 1인 가구가 82000세대였는데, 30년이 지난 2010년에는 85만 가구, 2019년에는 130만 가구가 되었다. 서울 전체 가구 중에 34%가 일인가구로 조사되었다. 서울시의 인구는 줄었는데 1인가구의 비중은 더 늘어났다. 더 높아질 가능성이 많다. 가정이라는 단어를 과거에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했는데, 요즘은 주거를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독신주의가 힘을 얻는 이유 중에, 결혼 자체에 대한 시각의 변화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 독신은 대부분의 역사와 문화에서 차별받았다. 공동체로 본다면 가정을 이루지 않으면 인구가 줄어들고, 인구가 줄어들면 군사력과 세금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인구가 곧 힘이기에 결혼은 어느 시대에든 거의 신성시되었다. 고대 로마제국에서는 독신세를 거두었고, 제정 시대에는 독신자는 상속권까지 박탈당했다. 중세 시대에는 독신자를 불신자와 동급으로 여겼던 적이 있고, 맹자가 후손이 없는 것을 가장 큰 죄라고 지목하였고, 조선 남자들은 결혼을 해야 상투를 틀고 어른 대접을 받았다.
개인의 선택이 소속된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강요된다면, 그것이 결혼이라고 해도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정치제도의 발달과 시민의식의 발전으로 결혼 자체는 강요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1인 가구의 좋은 점으로 가장 많이 고른 이유는 간섭받지 않는 독립 생활이고, 둘째는 나 자신을 위한 투자와 지출, 그 담에는 효율적인 시간 활용이라고 대답했다. 1인가구는 사회관계성이 20대 후반부터 낮아지고, 30대부터는 문화활동이 적어지고, 40대부터는 행복도와 건강상태가 나빠지고 50대부터는 직업만족도까지 급격히 나빠진다는 연구 결과는 서울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면, 개인의 선택에 맡기면 될 것 아니겠냐고 할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것이 무엇이냐는 평범한 질문에도 제대로 된 대답을 내어놓기 힘들어하면서, 사는 것 중의 하나인 결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것처럼 함부로 말하는 상황이 우습기는 하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으니’
혼자 사는 것이 죄냐? 그런 말이 아니다. 사람마다 특별한 상황이 있을 수 있고, 상황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목적을 위해 혼자 살아야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여겨서 혼자 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경제적 이유가 원인이 되는 경우는 흔하고, 사회적, 문화적 요인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신앙적 이유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 것을 명하셨고, 예레미야는 독신으로 살았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혼자 살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자신처럼 결혼하지 않는 것을 추천하기도 했다. 실제로 서방교회 역사 중에 오랜 동안 성직자는 가정을 이루지 않고 혼자 살았다. 경우가 같지는 않지만 예수님도 혼자 사신 셈이다.
그러나 성경이나 교회 역사에서 보이는 혼자 사는 경우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한 사명을 위한 경우이며, 이것을 은사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즉 성경에 나타나는 독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 시간을 많이 가지고, 내가 부담을 덜고, 내가 자유롭기 위한 독신이 아니다. 오히려 남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이타적 목적에서 선택한 독신이었다. 이 부분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래전에는 집단의 생존을 위해 결혼했고, 때로는 정략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로 결혼했고, 당사자의 애정이 결혼의 절대조건인 경우는 항상 있었으며, 장차 사라질 제도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한 생각들과 이해들은 시대가 변하면서 계속 바뀔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면서 부여한 인간의 본질을 기억한다. 인간은 함께 살도록 지어진 존재다. 이것을 무너뜨리거나 왜곡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는 없다.
노아의 시대에 있었던 홍수의 심판이 시작된 첫째 이유가 결혼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에 하나님이 심판을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살피려고 방문하였을 때에, 천사들이 마주한 형편은 성적 타락과 가정의 파괴였다.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은 가정을 지키는 데에 적극 관여하시는 분이시다.
왜 결혼하느냐는 질문은 동시에,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신앙생활 중에는, 종종 혼자 있는 것이 유익한 경우도 있다. 고린도전서에는 부부의 문제를 다루다가 각방 쓰지 말 것을 명하면서 예외를 두고 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신앙적 유익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혼자 있을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서로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결혼은 서로 돕기 위함이다.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무엇을 돕는다는 건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담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은 분명히 밝혀져 있다. 돕는 일이다. 아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담에게는 하나님이 맡기신 에덴 동산을 돌보는 일이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오해하진 않아야 한다. 일을 돕도록 하와를 주었다는 것이, 하와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한때 우리들에게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서, 그 밖의 다른 것들의 자리마저 치워버린 경우가 많았다. 가정도, 사랑도, 심지어 자녀마저도 일이라는 이름으로 뒷전으로 미뤘다. 말은 ‘다 너희들 먹여살리려고 그래’라고 하지만 실은 일 자체에 빠져버린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목회자들의 세계에서도 가정마저 돌보지 않고 목회에만 매진했다는 것이 전설처럼, 자랑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목회자 가정에 의외로 불화가 있었고, 목회자의 자녀들은 목회와 신앙이 가정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도 많았고, 교계에는 목회자의 자녀 문제, 소위 PK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난 적도 있었다.
일이 곧 행복이 될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도 그렇다. 아담은 에덴 동산을 볼보고 지키는 일을 할 때에 행복하지 못했다. 아담은 하와를 만났을 때에 비로소 행복했다. 어떤 것보다, 어떤 일보다 가정이 먼저다.
그렇다면 하나님보다도 가정이 우선인가? 적어도 하나님은 아담이 아내만 바라보아도 질투하지 않으셨다. 아니, 하와를 만들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아담이 하나님을 향해서는 어떤 사랑의 고백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와를 보고는 그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는 내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라’ 하나님은 아담의 이런 외침을 기대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한 사명과 상황은 때를 따라 있을 수 있지만, 가정을 우선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가정이 첫 번째 사명이다.
‘돕는다’는 것이 일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돕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일보다 중요하다. 부부는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 부분에 남녀가 서로 동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전에는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초장에 잡아야 한다’,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이야기에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참 비 성경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최고의 지혜이며, 최고의 우선권을 가진다. 이 둘 사이에 돈이든, 취미든, 세상이든, 사람이든 끼어들 자격이 없다.
부모라 할지라도 부부 사이에 끼어들 자격은 없다. 오늘 성경도 ‘부모를 떠나’라고 기록되어 있거니와, 결혼 한 자녀들에게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자녀가 떠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 부모자식의 사이보다 부부 사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옳다고 인정하는 부부라면, 다른 한 가지도 기억해야 한다. 자신들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부부 사이보다 우선권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종종 부모가 아이를 배우자보다 우선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큰 잘못이다. 아이가 위급할 때에는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는 것이 부모지만, 부부는 이미 생명을 넘겨준 사람으로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우선순위가 흔들리면 안 된다. 부부 어느 한 쪽이 배우자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게 되면, 그건 결국 자식의 미래와 자기 자신의 미래를 한꺼번에 망치는 일이 될 것이다.
서로 소중히 여기면, 자녀들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노인이 묘목을 심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땀흘리는 노인을 보고 물었다. 저 나무는 열매 맺으려면 오래 걸리는 거 아닙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수십년은 걸리는 나무요. 사람이 말했다. 그때까지 사실 수 있다구요?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 우리 밭에 이 나무가 열매를 가득히 맺히고 있었소. 아버지가 심어주셨던 나무였소. 나도 똑같이 하는겁니다.
이야기는 거기까지인데, 이 노인이 아버지로부터 진짜로 물려 받은 것은, 나무가 아니라, 삶의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까지 부부는 공유하는 것이 옳다. 부부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해가 같아야 한다. 아이들 앞에서 돈과 학업과 직업과 삶에 대하여 분열된 모습을 보이지 말라. 그걸 먼저 해결하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일이다.
정말로 다르다면 어떻게 할까? 태어날 때부터 다르다면, 세 살 버릇 자체가 다르다면 어떻게 할까? 함께 산다는 것은 상대방이 내 삶의 일부분을 점유하며, 내 일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의 정돈을 흩트리고, 나는 상대방의 길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 결혼이다. 때로는 깨어져서 날카로운 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눌러두었던 못된 성격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숨겨두었던 과거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결혼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 못된 성격을 숨긴 채, 과거를 감춘 채 그럴듯한 모습으로 포장하고 살아가는 가짜 인생을 끝내는 방법 중에 제일 효과적인 것이 바로 결혼이다. 결혼은 각자가 지닌 약점과 강점, 겉과 속, 숨긴 것과 감춘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들을 드러나게 한다. 그래서 배려와 사랑과 축복 속에서 고칠 기회를 준다. 간혹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서로 날카롭게 해치며 망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결혼은 나의 모난 부분을 깎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험한 세상에서 내가 든든히 서 일을 힘이 되는 것이다.
당나라 백낙천이 지은 장한가에 비익조라는 상상 속의 새를 이야기한다. 수컷과 암컷이 각각 눈 하나와 날개 하나씩만 갖고 있는 새라고 한다. 혼자서는 날 수 없는데, 제 짝을 만나면 서로 의지하여 두 개의 날개와 두 개의 눈으로 날아다닐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완전하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만나야 한다. 결혼은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게임이 아니다. 서로를 완성시켜 줄 미완의 재료를 찾는 일이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을 향해 출발하는 지점일 뿐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을 완성된 존재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완성시키는 데에 수많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일하며 배우며 노력한다. 그 많은 것들 중에 는다. 배우자는 자신을 완성시키는 존재다. 아담도 하와를 보고는 ‘내 뼈 중의 뼈’라고 했는데, 이 문장을 ‘나를 완성시키는 사람’으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모든 가정이 각자의 사정과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확인해야 하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흔적이 있는냐는 점이다. 진흙에서 생명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창조가, 생면부지의 타인을 만나 그에게서 내 삶의 생기를 서로 발견하고 불어 넣어주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느냐는 점이다. 함께 살아가다보면 상대방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상대방의 속모습이보다는 사실 나의 흔적이다. 그렇게 서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