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4일 주일설교

제목: 나의 선악과
성경: 창세기 2장 4-17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다시 한 번 창조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 보았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지난주까지 보아온 창세기에서는 항상 ‘하나님’으로 언급된 창조주를 오늘 본문에서는 꼭 ‘여호와’라는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

히브리어 ‘톨레돗’이라는 단어가 있다. 오늘 본문 4절의 ‘내력’이 그 단어다. 이 말은 ‘그 역사가 이러하다’, 또는 ‘그 이야기가 이러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이 단어가 창세기 5장 1절에도 사용되고 있다. 5장은 아담 후손들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우리는 창세기를 한 권의 책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지만, 창세기 5장은 사실 창세기라는 책 속에 포함된 또 하나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성경에 6장 9절에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여기에서 쓰인 단어도 ‘톨레돗’이다.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고 되어 있다. 성경이 이렇게 언급할 때에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노아 때의 이야기다’라는 맥락이다.

이렇게 창세기는 여러 이야기들을 그 속에 품고 있는 책이다. 전통적으로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로 알려져 있지만, 모세가 에덴 동산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노아의 홍수를 목격한 것도 아니다. 모세는 그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들의 편집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진 것도 각각의 저자가 다른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 4절에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의 하늘과 땅의 내력이다’라는 언급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천지가 창조될 때의 하늘과 땅의 내력이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일곱 날의 창조 이야기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물론 큰 시각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합쳐서 창조의 이야기지만, 적어도 다른 저자에 의해 계시되거나 전해진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창세기 4장까지 계속된다. 즉 2장 4절부터 4장까지는 창세기라는 큰 책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작은 책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사람

창세기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1장부터 11장까지를 원역사라고 부르고,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12장부터는 족장들의 이야기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원역사는 네 개의 이야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1장의 창조 이야기, 2장부터 5장까지의 타락 이야기, 6장부터 10장의 홍수 이야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로 나눠볼 수 있다.

오늘부터 살펴볼 이야기들은 창조와 에덴 동산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창세기 1장처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서사시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이야기와 그 타락에 대한 보다 세밀한 이야기들이다. 이 아담의 이야기와 그가 살았던 이야기, 살던 곳 이야기, 아내 이야기, 죄, 타락과 추방 이야기 등이 계속된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게될 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사람의 창조는 모든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서 특별했다. 1장에서는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고 살펴보았다. 또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만든 하나님의 방법은 말씀으로 명령하시는 것이었다.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심으로 만드셨고,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고 명령하심으로 만드셨다. 그런데 사람을 만드실 때에만 이 명령이 없는데 그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라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어떻게 만드셨는지에 대해서는 오늘 말씀이 추가로 알려주고 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전해주고 있다. 사람의 지으심은 매우 특별하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것이지만, 유독 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흙을 재료로 삼으셨다.

이 부분의 흙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떠올리는 흙덩어리가 아니다. 오히려 흙의 어느 부분, 요즘 표현으로는 어떤 원소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바 ‘사람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이 반쯤은 맞는 말이다. 사람이라고 특별한 존재가 아닌 것이, 모든 다른 동식물들을 구성하고 있는 똑같은 원소로 만들어졌다. 흙으로 만들었으니 그런 생각 할 만 하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니 그럴만 하다.사람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교만한 인생들이 깨달을만한 교훈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고귀한 존재이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이 생기란 것을 성령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단순한 호흡으로 이해해도 상관없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지어졌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무엇보다도 사람을 위해서는 특별한 것을 또 만드셨기 때문이다. 바로 에덴 동산이다.

에덴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이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신 땅이었고, 아담에게 주신 사명이었다. 네 개의 강이 흐르는 풍요로운 곳이었고, 그 강은 세상으로 흘러나가 땅을 적셨다. 나무에서는 열매가 풍성하였고, 아담은 들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명명하였으며,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내를 주어서 살게 하셨다. 에덴은 우리가 소망하는 바로 그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영국의 작가 밀턴은 인간이 땀 흘리며 수고하는 원대한 목표는 복락원, 즉 에덴으로의 복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가 에덴 동산을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으며, 먹고 사는 것으로 인하여 땀 흘리지 않는 이상향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두 가지를 명령하셨다.

경작과 지킴

첫째 명령은 일의 명령이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아담은 에덴 동산의 식물들을 경작해야 했고, 보존하며 지켜야 했다. 하나님이 아담 앞으로 동물들을 이끌어 왔을 때에 그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에 일을 시키려고, 노예로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일과 노동을 피해갈 수 없는 존재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그랬다.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의미로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고, 놀이를 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호모 루덴스라 부르고, 직립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호모 에렉투스라고 부르는 등 수많은 인간에 대한 정의가 있지만, 오늘 창세기 2장에서는 호모 라보란스, 인간은 일하는 존재인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일하는 존재였다. 사람은 일함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어떤 다른 존재에게도 하나님은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위임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일은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되기도 한다. 성경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한다.

다만, 그 일, 노동은 땀 흘려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세계의 표현으로 부가가치를 남겨야만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 이후로, 사람에게 먹고 살기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은 형벌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의 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에덴을 회복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세계를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책임이다. 자연을 관리하는 것은 에덴에서부터 인간의 사명이었으며,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지금도 유효하다. 시와 노래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진짜 일이다. 이웃을 돕는 것도 일이며, 어려움과 슬픔을 서로 나누는 것도 일이며,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도 일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일이며, 평화를 지키는 것도 일이다. 예수의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다.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것이 예수의 일이었다. 그것은 에덴을 회복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먹고 사는 일’에 밑줄을 치고 빨간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서, 이 일 이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강조하고 사람들이 동의할수록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더 유리해지기 때문에, 경제가 문제라고 설득할수록 기득권층이 가질 몫이 더 커지기에, 소득이 문제고 땅값과 집값이 문제라는 이야기는 더 많이 외쳐지고 더 많이 융통될 것이다.

다만, 에덴은 경제문제로 회복되는 땅이 아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일을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나라가 부자가 되고, GNP가 오른다고 에덴이 회복되지 않는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세상,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사는 일’ 이전의 일, 에덴과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선악과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에 두시며 주신 명령 중 두 번째 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선악과는 비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지금까지 호기심과 연구의 대상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한 번쯤은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없었더라면…하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인생이 땀 흘리며 고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인간 세상의 온갖 죄도, 죽음과 이별도 없었을텐데.

왜 선악과가 거기 있었을까? 하나님은 왜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거기 두셨을까? 먹지 말라고 명령하시느니, 아예 거기 그 나무를 세워놓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 왜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시고는, 시험에 들었다고 추방하셨는가? 시험에 빠지지 않을 만큼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으셨더라면 또 모를까, 혹시 이건 하나님의 실수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선악과는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다.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배려였다. 성경에 선악과라는 단어가 없다. 정확한 워딩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인데 편의상 선악과라고 부를 뿐이다. 이것이 사과 비슷한 열매로 사람들이 그림도 그리지만, 어떤 열매인지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화과나 포도를 의미하는지, 혹은 지금 우리는 알지 못하는 특별한 나무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선악과 이야기는 열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금지령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인간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다. 선악과의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정해진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지만, 하나님의 자리만큼은 범할 수 없다. 선악과의 금령은 인간의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서는 안되는 존재,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시도, 하나님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허용되지 않은 존재라는 뜻이다.

실제로 뱀이 하와를 속일 때에 그렇게 말했다. 우리말성경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려서 너희가 선과 악을 아시는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그 열매에 선악을 알게 하는 어떤 특별한 성분이 들어있어서 먹게 되면 그런 효과가 난다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선악과 이야기의 핵심은 ‘하지 말라’는 명령 자체다. 그러니까 그 금령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너희가 이 나무에 올라가지 말라, 오르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했던 구절은 이렇게도 바꿀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면 너희가 하나님과 동급이 되는 거 아냐?’

인간의 위치

그러나 인간의 위치는 그 자리,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다. 시편은 선언한다.

시8:4-5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점이되,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스스로 높아지려 하며, 신이 되려 한다. 하나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하며, 자신을 하나님과 동급으로 여기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기려 한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한 시대의 사람들 뿐 아니라, 예전부터 그랬다. 아담의 아들 가인도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였고, 가인의 후손 라멕은 살인을 자랑하면서 자신을 가인보다 더한 사람으로 자랑하였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높은 탑을 쌓은 이유도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신들도 사랑하며 질투하며 바람 피며 죽고 죽이는 존재로 등장한다. 신도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인간도 신적 존재라는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로마 황제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자랑하였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사람들은 신의 형상을 만든다. 사람이 우상을 만들어 금과 은으로 입히고 치장하며, 제물을 바치고 의식을 행함으로 신의 행동을 유도하고 제한하며 부려먹으려고 한다. 얼마전 중국에서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 얼굴을 한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원작자는 공예품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돈을 많이 벌게 해 준다는 광고와 함께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넘볼 정도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되 너무도 뛰어나게 만드셨다.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는 능력마저 주셨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큰 지혜와 능력을 부여하시되, 그 위치, 그의 자리를 정해주셨다.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지 말라’

선악과는 하나님에 대한 존중의 열매였다. 선악과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열매였다. 선악과는 인간의 위치에 대한 이해의 열매였다.

선악과는 인간 자신과 인간의 세계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는 선언이다. 1장에서 본 문화명령과, 그것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오늘 본문의 에덴 동산의 경작과 보존명령을 비롯하여, 하와를 만드셔서 가정을 이루는 일까지,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혹시 더 주어졌을 하나님의 축복과 명령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해야만 하냐고 괜히 투정할 수 있다. 그러나 친절하게 설명드린다면, 그 금령은 에덴에 사는 작은 대가일 뿐이다. 에덴동산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면, 에덴의 입주규칙을 지켜야 할 뿐이다. 그것을 지키는 것과 어기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3장에서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다만 선악과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 하나가 남아있다. 좀 전에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능력을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고, 그렇게 말하는 것에 우리는 익숙하다.

이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주신 엄청난 선물이요 은총이다. 이 자유의지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 애완견 같은 존재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며, 심지어 하나님께 순종할지를, 하나님을 거역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께 순종만 하며, 악마는 하나님을 거역만 하되,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거역할 수도 있는 존재다. 가진 능력은 천사나 악마에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의 가치는 천사나 악마보다 귀하다. 그 자유의지에 따라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다. 심지어 그 자유의지는 하나님조차 간섭할 수 없다. 아니, 간섭하지 아니하기에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는 왜 그를 꾸짖어 혼내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배신하든지, 다시 돌이키든지, 유다의 자유의지에 속한 일이며, 주님은 간섭하지 않으신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여 유산을 달라고 했을 때에 아버지는 거절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먼 나라로 갈 때에도 스스로 결정했다. 아버지는 이제 거지가 된 아들의 형편을 알고, 동구밖까지 나가서 매일 기다리고 있지만, 아들이 돌아오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다만 돌아올 때에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자유의지는 그런 것이다.

심지어 믿음마저 그렇다.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예수의 편지가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는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내 집의 문, 내 마음의 문을 열거나 닫는 것은 나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죄도 그러하다. 가인이 죄의 유혹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를 선택하든, 선을 선택하든 스스로 하는 것이다. 세상을 핑계하든, 사람을 핑계하든, 코로나를 핑계하든, 자식을 핑계 삼든 뭐든 할 수 있다.

순종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그에 따른 결과는 이미 선언되어 있는데, 선택할 권리가 내게 있을 뿐이다. 그것이 선악과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얼마나 큰 배려인가? 만약 하나님의 세계에 신들이 세계가 있었더라면, 다른 신들이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만든다던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면, 결국 배신할텐데?’ 이런 상황을 틸리케가 ‘하나님의 모험’이라고 불렀다고 말씀드렸거니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대가를 감당하고 계신다.

아담의 범죄를 가슴 아파하시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가인의 범죄를 가슴 아파하시면서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할 때마다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며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다. 호세아를 통해서 ‘내 사랑을 알아달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를 통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시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하나님이 기다리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기에, 하나님은 사랑을 기다리시는 것이다.

에덴과 선악과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다. 나의 자유의지, 나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너의 선악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제시된 하나님의 나라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나라는, 장차 이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이되, 실제 그 모델은 에덴이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꿈이요, 하나님은 그 꿈을 선지자에게, 우리에게,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빼앗긴 것은 북녘의 땅만이 아니다.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할 인간다운 삶을 빼앗기고, 서로 사랑하며 배려해야 할 아름다운 삶을 빼앗겼다. 아니, 인간다운 삶보다는 더 많이 가진 삶을 선택했고, 사랑하며 배려하는 삶 대신에 사람이 귀찮아서 담장을 높이 쌓아버리는 버튼을 눌러버렸다. 핑계대지 말라. 세상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너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현실 세상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에덴에는 선악과가 자란다. 선악과를 만지지 않고, 따먹지 않는 것은 평생 숙제가 될 것이다. 먹어버리면 더 이상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당신의 선악과는 아직 거기에 있는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아담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다.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구별, 그리고 선택이 오늘 나의 선악과다.

영화배우 중에는 위험한 연기를 스턴트 전문배우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해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배우 중에 안젤리나 졸리라는 사람이 있다. 졸리가 어떤 영화를 찍던 중 책상에 얼굴을 부딪쳐서 미간에 흉터가 남았다. 한 인터뷰에 출연했을 때에 사회자가 ‘얼굴에 흉터가 생겨서 낙담했겠다’고 말하자 대답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에게 여러 흉터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것은 그저 삶의 일부일 뿐이고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하나의 특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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