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8일 주일설교

제목: 세상을 다스리는 자
성경: 창세기 1장 26-31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의 모습은 다른 피조물의 경우와 많이 달랐다. 모든 다른 피조물은 거침없는 명령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을 지으실 때에는, 하나님의 대화, 하나님의 의논이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렇게 인간을 지으시면서 모든 피조물 중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다.

피조물 중 하나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 부담을 감수한 일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함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며, 심지어 하나님마저 거절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 신학자 틸리케는 말하기를 ‘인간은 하나님이 위험을 감수하고 만드신 존재’라고 하였다. 고심 끝에 창조하신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신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 모험이었다고 본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명과 부탁을 거절하고 자신의 길을 갔다. 악과 손을 잡으며 스스로를 신적 존재로 자처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의 삶마저 죄에 빠트리고 악에 물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이 전해준다.
창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표준새번역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을 왜 만드셨나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 대답은 오히려 간단하다. 사랑 때문이다. 기대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를 낳을 때에, 여러 가지 부담을 감수한다. 자기의 일부를 포기한다. 시간의 여유, 돈, 자유로운 삶을 기꺼이 희생해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의 삶을 기꺼이 용납한다. 아이가 아플 수도 있고, 말썽을 부릴 수도 있다. 정말 기쁨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론 낳을 것을 후회할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예상하면서도 아이를 낳는다.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도, 사람들이 아들을 무시하며 거절할 것을 아시면서도 보내셨다. 사랑 때문이다. 이 사랑은 그냥 막연한 기대, 아련한 감정이 아니라 큰 능력이요 권세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회복을, 다시 에덴 시절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하는 것은 창조 때부터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배신이 일어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들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으로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엄청난 비밀 하나가 따라오게 된다. 인간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고, 인간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그 이유를 말하려고 하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인간은 인류의 존엄에 대한 이유를, 그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몇 가지 제안들은 있다.
다른 모든 생물보다 뛰어나난 지능 때문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뛰어나지 않은 인간은 어떤가? 개 중에 지능이 뛰어난 종류는 유치원 아이 정도의 지능과 판단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고도의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그런 개가 더 존귀한가?
모든 생물 중에 가장 많이 진화된 생물이기에 존엄하다는 사람도 있다. 진화로 따진다면, 모든 생명체의 진화의 시간은 오히려 동일하다. 인간이 가장 많이 진화했다는 근거는 있을까? 아니, 혹시 인류보다 더 발전된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온다면, 그 외계인은 존엄하고 인간은 동물 차원이 되는 건가?
사람은 도덕적, 윤리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귀하다고 하던데, 그러면 사이코패스나 살인범에게는 인간의 존엄이 없는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존엄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이 소나 돼지의 생명보다 존엄한 근거는 무엇인가? 모든 생명을 말한다면 식물도 생명인데, 그 생명을 먹고 살아가는 모든 동물은 무슨 근거로 식물의 생명을 취하는가?
인간의 존엄을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과 유지에 필요한 개념으로도 보지만, 이것조차 이기적이며 상대적일 뿐이다.
인간은 인간이 왜 존엄한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성경은 인간의 존귀함이 하나님을 인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귀하다.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귀하다.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존중하며,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도덕이나 생존의 이유 이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창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이 선언은 인간 세상은 경쟁이요, 적자생존의 전쟁터일 뿐이라고 하는 무신론적 태도에 대한 엄중한 질책이다. 돈보다 사람이 귀하며, 내 부귀만큼이나 이웃의 삶이 귀중하다. 인간의 존엄은 공동체 유지를 위한 기능도 아니며 혼란을 억제하기 위한 도덕적 기능도 아니다. 인간의 존귀함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렇도록 하나님이 모험을 하시면서까지 인간의 형상을 부여하신 또 다른 이유가 본문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모든 세상의 관리를 인간에게 맡기셨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잘 관리하고 보존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세상을 관리하는 것은 바위나 풀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들짐승이나 새에게 맡길 것도 아니다. 당신을 닮아 지적 능력, 통치의 능력, 관리하고 정복할 능력, 스스로 판단하고 자주적으로 결정할 능력이 필요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2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들을 ‘문화명령’이라고 한다. 문화의 영어 단어 컬쳐(culture)는 라틴어 꼴로(colo) 또는 꼴레레(colele)에서 왔는데 이 말은 땅을 간다는 뜻이다. 문화는 땅을 갈아서 곡식을 재배한다는 의미였고 점차 확산되어 왔다. 자연에서 채집하던 상태를 벗어나 인간이 자연을 길들이고 살아가는 방식들, 또 이웃과 소통하며, 지식과 지혜들을 개발하고 축적해나가는 인류의 활동과 상태들을 의미하는 용어다.

가끔씩은 인간의 삶이란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비관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사는게 뭐 다 그런거지’라고 말하는 사람들, ‘다 먹고 살려고 하는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인생이 다 허망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 유의해야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사람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이어받은 이유이며, 인간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는 힌트이기도 하다.

생육과 번성은 하나님의 첫째 명령이다. 이것은 결혼과 가정, 아이와 양육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하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듯, 자녀를 낳아 양육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기르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이다.

자녀의 양육은 창세기 9장에서 노아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복이기도 하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 이 시대 뿐 아니라 어느 시대에도 자녀를 낳아 양육하는 것은 모험이기도 한데,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아픔과 괴로움을 각오하고도 그 사랑 때문에 창조하신 것처럼, 자녀 양육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땅을 정복하는 것과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이다. 땅을 정복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를 올라가라는 명령이 아니다. 누가 산을 정복할 수 있으며 바다가 누구에게 굴복하겠는가? 오히려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 시대 사람들의 인식을 배경으로 삼아 이해해야 할 말씀이다. 고대 사람들은 자연을 숭배하며 두려워했다. 자연은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신들과 정령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태양을 숭배하고 달에게 절했다. 비가 오지 않아도 제사를 지내고, 배를 띄울 때면 바다의 신을 찾았다.

문화명령은 이러한 미신의 세계를 추방하는 선언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니,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과 다스림과 관리의 대상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세상과 자연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과 다스림의 대상이라는 기독교의 세계관은 과학 문명의 발전에 커다란 지표와 등불이 되었다. 기독교가 서구 과학 발전에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 오죽하면 지구의 마구잡이 개발과 심지어 환경오염까지도 기독교의 책임이 크다는 논문까지 나왔을 정도다.

현재 지구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온난화는 이제 우리가 피부로 느낄만큼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미세먼지가 있는 날과 없는 날들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지구 단위의 커다란 시스템에서는 평범한 우리가 기후변화를 느꼈다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지구와 자연은 스스로를 지키고 회복하는 힘이 있어서, 오히려 인간만 멸종되면 지구는 다시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지구의 위기라기보다는 인간과 문명의 위기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이 지구의 위기이든, 인간의 위기이든, 또 모든 환경파괴가 기독교의 책임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구와 자연의 관리를 맡기셨다는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다스림은 세속적 의미의 정복이나 파괴가 아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경치 좋은 곳에 정자 지으라는 것이 아니며, 높은 산에 케이블카 놓으라는 말이 아니다. 땅속 석유를 맘껏 캐내어서 그것을 플라스틱과 스티로폼과 매연으로 바꿔서 지구에 가득하게 하라는 말도 아니다. 아마존 밀림을 태워 옥수수 밭으로 바꿔서, 그 옥수수로 소를 키워서, 소고기를 많이 팔아 기업을 성장시켜서, 그 기업의 주주들이 호화 크르주 선을 타고, 플라스틱으로 가득한 오대양을 누비면서 세계 여행이나 다니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스림은 하나님의 꿈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에 부여하신 질서에 대한 이야기다. 욕심이나 야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이뤄지는 질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진 지구의 현재 형편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플라스틱과 비닐 사용을 절제하고, 과도한 냉난방을 삼가고, 불필요한 에너지 사용을 줄여야 한다. 에너지와 기후변화의 문제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치관 자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는 것이 옳다.

나 하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까? 그렇게 회의할 수도 있다. 세상에 시급한 일들이 많고, 빈부격차, 경제위기, 취업란, 등등의 사회적 문제 등이 산적해 있는데, 개인적 책임만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효용이 있을까? 특히 환경문제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고,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며, 집단적 결의의 문제인데 내가 조금 참여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개인이 움직이지 않으면,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의 행동이 비록 작게 여겨질지라도, 개인적 행동으로 시작해서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은, 주위에 적절한 영향을 끼치게 되며, 이런 힘들이 모여져서 큰 힘이 되고, 후에 공동체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힘으로 작동하게 된다.

무엇보다, 나라의 책임, 기업의 책임들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자기 개인이 해야 할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나라나 기업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기는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환경보호, 기후변화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한 사람의 참여는 환경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는 오랫동안 정치는 그 일에 뛰어든 사람들이 할 것이며, 서로 옳다고 싸우는 사람들의 주장에 관심 없다는 태도로 살아왔다. 자기만 옳다고 하는 사람들, 신경 쓸 일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성경을 읽을수록,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세상을 조금 더 넓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조금 더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세상이 악하고, 정치가 부패한 것이 정치인들의 책임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을 끈 내 무관심이 그 어둠과 부패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몇 년 전, 세월호 사건과 그 뒤처리의 불투명한 모습들과 감춰진 부정과 부패들을 알게되면서 부정한 시대의 침묵은 죄에 다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플라톤의 말처럼, 우리가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받는 것이라면, 우리의 정치가 바르게 되는 것은 나 하나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이 옳다. 그것이 올바른 시민의식이다. 다 부패해서 관심 없다는 것은, 환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을 비방하여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똑똑한 척 하는 위선적인 일이다. 철 좀 들어야 한다. 괜히 나라 탓하고, 정부 비난하고, 억울해하고, 푸념하는 징징대는 꼬마 같은 아이를 내쫓아버리라.

정의가 세워지는 것에 당신의 돈이 들어가야 한다. 독립지사나 민주화 항쟁의 인물들에게만 기대지 말고, 당신이 정의의 편에 서라. 당신 안에 의에 대한 열망을 품으라. 의를 위해서 고난이나 핍박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경제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경제는 단위가 커졌고 매우 복잡해졌다. 이제 개인의 경제활동마저 전 세계 경제의 영향을 받는다. 미국 은행의 금리가 변하면, 얼마 뒤에는 우리 교회가 은행에 내는 이자 금액이 달라지는 세상이다. 부동산 가격은 나라도 제어하기 힘들며,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는 젊은이들마저 결혼과 집 마련과 아이 양육을 부담스러워한다.

시대적 흐름을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온 국민이 부동산 전문가가 되는 세상이 되는가 싶다. 경제는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류를 잘 읽고, 기회를 잘 잡고, 영끌해서 부동산에 도전해보거나, 혹은 그냥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 밖에 없는가?

심지어 한국의 교회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동산에 대한 입장이 없다. 교회가 먼저 부동산 재태크를 꿈꾸며, 교회마저 건물의 크기와 사람의 숫자로 평가하고 비교한다. 우리 교회 카페를 열어놓았을 때에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왔었다. ‘제가 강남에 있는 큰 교회를 다니다가 이 근처로 이사왔는데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왜 교회마저 예수의 말씀을 무시하는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한다고 전도서는 이미 경고하였다. 사람의 행복이 그 가진 물질에 있지 않다는 말씀을 왜 무시하는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돈과 행복에 관한 예수의 생각만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불의가 세상을 삼키고, 돈이 교회를 삼키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회복되어야 할 것, 진짜 시급한 것, 환경보다 지구보다 더 부패한 것이 있다. 사람이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회복해야 할 가장 우선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요, 사람 사는 세상이다. 사람이 이룩한 문화와 문명에 하나님이 빠져있다. 진화론 이후로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과학과 삶에서 하나님을 배제시켰다. 존 뉴턴과 찰스 다윈의 예에서 보듯,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도 생명과 지구와 우주의 비밀을 밝히는 데 공헌한 기독교 과학자들이 많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론을 신앙으로 포장한 사이비 과학자들도 있지만, 성경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방향을 제시하고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과학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이다. 그런데 예수가 진짜 필요하고, 성경이 진짜 필요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있는 왕들과 귀족들과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갈릴리 인근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그 시대의 평범한 무리들이었다. 그 소박한 사람들에게 삶의 진실이 알려질 필요가 있었고, 예루살렘의 권모술수에 뛰어든 인생이 아니라, 갈릴리 인근의 논밭을 일구며 고기 잡아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비전,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했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이요, 갈릴리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탁이다.

현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자기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기를 회피한다. 시대의 흐름, 개인의 취향에 심취되어서, 진실을 바라보아야 할 영혼의 눈을 감았다. 인생은 나 보기에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쉽게, 때로는 비장하게 말한다. 아마 다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이 부탁하신 사람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을 관리하는 일 말이다. 지구와 환경 문제는 조금 말씀드렸거니와, 특별히 인간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관리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창세기 1장의 문화명령은 땅과 생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을 뿐, 민족과 사람들과 사람들의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당시에 세상에는 사람들이 없었으니 당연했거니와, 이제 지구의 관리에 가장 문제거리로 등장한 인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서는 환경이든 지구든 보존하고 다스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부탁하셨을 때에, 인간 세상도 포함한 것일까?
종교개혁자 칼빈은 시민정부와 문화활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파악했다. 그래서 그가 살던 스위스 제네바 시 전체를 기독교 정부, 기독교 사회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칼빈은 제네바를 성경적 원리에 따라 개혁하고,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기 원했다. 많은 술집이 폐쇄되었고, 간음과 도박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실제 칼빈이 시도한 정책들에는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도 있었고 반발도 컸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도시와 시민들과 정책들과 법률들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를 제시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나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행하였던 일이 세상을 아름답게 관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방향에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의 문화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악마와라도 손을 잡을 이 시대의 추한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 산다는 것이 전쟁이요 싸움이요 경쟁이 아니라, 산다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것이 기독교 문화의 정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 함께 살아가며, 서로 축복하는 것이 기독교 문화다. 악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불의에 눈감지 아니하며, 개인의 책임을 다함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꿈꾸고 이뤄야 한다.

하나님의 문화가 세상에 편만하기 원한다. 하나님 자녀의 세상에 대한 관리자로서의 책임의식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기 원한다. 이들로 인하여 지구는 아름다움을 되찾고, 인간들은 서로 사랑하며, 그늘진 곳과 소외된 사람들이 에게도 빛이 비쳐지길 원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다스리는 자, 세상을 책임지는 자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다스린다고 말하니, 우리에게 무슨 권력과 무슨 돈이 있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경에서 다스림의 개념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명령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낮아지는 것, 섬기는 것이 다스림의 진면목이다.

하나님의 방식을 오해하던 사람이 예수께 부탁하였다. ‘내 아들들이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게 심지어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 중에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이 드러난다.
마20:25-28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문화명령의 본질은 섬김이다. 자연과 세상에 대하여, 나아가 인간 세상에 대하여,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낮아짐으로, 희생함으로,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사람들이다.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주셨는지 탄식하는 사람은 없겠지. 당신에게 지구를 구하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해야 할 너의 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에서 신들이 사람을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 지음 받았는지 창세기를 통해서 안다. 사람의 존재는 인생의 여정에서든, 지구에서의 삶이든, 노예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자다. 환경의 보존, 생물 종의 다양성, 사람들의 진실되고 소박한 삶,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내가 섬기고 낮아지며 희생하는 것이 세상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인의 방식이다.

공원에 떨어진 나뭇잎을 청소하면서, 하나님의 정원을 관리하는 기쁨을 누리던 청소부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젊은이들은 환경단체에 참여하거나 후원자가 되라. 웹 브라우저 즐겨찾기에 자연과 환경에 대한 사이트를 추가하라. 나이 드신 분들은 괜히 인생이나 정치 이야기에 아는척 끼어들기보다, 이제라도 주변과 자신을 돌아보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지럽혀 놓은 세상을 수습하라. 어떤 삶의 자리든지,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세상의 관리자가 되라. 그것이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며,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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