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1일 주일설교
제목: 인간- 하나님의 형상
성경: 창세기 1장 26-28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6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하나님이 누구와 말씀하시는가? 초대교회 시대부터 이 구절은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의 창조 사역을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사역에 동역하셨다는 기록은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2절에 기록된 구절은 창조 사역에 성령님의 자리를 보여준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구절의 ‘하나님의 영’은 성령 하나님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은 성자 예수께서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음을 말해준다.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장에 등장하는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성경은 성자 예수께서 창조 사역에 동참하였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인간을 만드시면서 ‘우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
진화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우고, 교회에서 창조론을 배운다. 그것이 모순되다고 여기지만, 미해결인 채로 신앙과 삶을 지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건 끝나지 않는 싸움처럼 보인다.
2012년 한국 갤럽이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의견을 조사했는데, 진화론을 지지하는 응답 45%, 창조론을 지지하는 응답이 32%가 나왔다. 인구대비 기독교인 비율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을 지지했다. 그러나 과학의 정당성은 설문조사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갈등은 전세계적 현상이며,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가깝게는 촛불혁명 후 새 정부가 출발할 때, 중소벤처부장관으로 지명된 포항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가 창조과학자라는 논쟁 끝에 사의를 표명한 일이 있었다. 20년 쯤 전에는 기독교 과학자들이 교과서에 실린 진화론 주장 중에 시조새 내용의 삭제를 요청한 일이 있다. 시조새는 명확하게 증명된 것이 아니라 가설에 불과한데, 교과서에는 사실처럼 실렸다고 주장하였다. 처음 시조새 화석이 발견되었을 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진화학자들도 시조새가 진화론의 명백한 증거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학계의 반발에 의해서 교과서에서 빠지지는 않았다.
진화론의 학문적 성과나 내용과는 별개로, 국내 교과서에 실린 진화론 내용들에는 부정확한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생명의 탄생을 증명했다는 유명세를 가진 밀러의 실험이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원시대기에 포함되어 있던 원소들이 번개에 의해 합성물을 생성했고, 아미노산과 생명체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1953년에 미국 대학원생 밀러와 지도교수 유레이가 실험을 했다. 가상의 원시공기를 만들고, 전기스파크를 가하자, 몇 가지 아미노산이 생성되었다.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전세계 고등학와 대학교 교과서에 생명의 기원의 첫 단계를 설명하는 실험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일단 이 이론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밀러가 가상으로 만든 원시공기는 생명이 합성되기 알맞은 강환원성 대기라는 것인데, 이건 증명된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실험은 자연계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는, 매우 정교하게 제어된 조건 아래 수행된 화학반응일 뿐이다. 또 그때 만들어진 아미노산이 생명체의 핵산으로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지도교수인 유레이도 수긍했다. 무엇보다 1993년 스페인에서 열린 생명의 기원에 관한 학술대회에서 밀러의 실험은 전제와 결과가 잘못된 학설이라는 것을 공식 제안했고, 밀러 자신도 인정했다고 한다. 그것이 타임지에 실렸다길래 같은해 10월 발행된 타임지를 찾아 보았는데, 타임지 표지기사에 그 학회에서 다룬 생명의 탄생 논쟁들을 소개하면서, 밀러의 실험은 그 전제가 과학계에서 부정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었다. 이렇게 밀러의 실험은 그 근거를 잃었지만, 우리 교과서에는 아직도 밀러의 실험이 생명의 기원을 규명한 실험으로 실려있다.
진화론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공립학교 교과 과정을 두고 법적 다툼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많은 갈등이 있었고 지금도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가 활동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화론의 몇 이론들이 잘못되었다고 밝히면, 진화론은 가짜 학문이 될까? 그건 아니다. 과학이란 것은 관측하고, 가설을 세우고, 증명해나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는 동안, 그때까지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닌 것을 밝혀지는 과정을 통해서 점점 진실에 다가간다.
아인시타인은 보어의 양자역학을 부정했지만 결국 나중에 보니 아인시타인이 틀렸고 보어가 맞았다. 스티븐 호킹 박사도 백조자리 X-1이 블랙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킵손 박사와 내기를 걸었는데, 졌다. 아인시타인이 양자역학에서 틀렸다 해도 상대성 이론은 여전히 유효하고, 호킹 박사가 백조자리가 블랙홀이 아니라고 잘못 생각했어도, 그가 말한 빅뱅이론은 우주 생성에 있어서 현재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다. 이렇게 과학은 자꾸 틀리면서도, 계속 수정해 가면서 진실을 규명해가는 것이다. 그러니 진화론, 진화생물학이라는 과학은 그렇게 자기의 사명을 다하면 된다. 내 생각에는 오류로 밝혀진 것들보다는 훨씬 더 많은 진실들을 밝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라는 개념 자체는 부정하기 힘들다.
다만, 진화의 개념을 인정한다는 것이 곧 진화론을 인정하고, 창조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영역이 다르다. 진화론은 과정을 추론하는 과학이고, 창조론은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는 신학이다. 본래부터 지향점이 다르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신앙생활하려면, 종종, 아니 자주 진화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진화론과 창조론
이 말씀 시간에 진화론과 창조론을 말씀드려야 하는지 좀 갈등이 되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생각도 들고, 이런 이론들을 다 스스로 찾아볼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정리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큰 흐름을 대략 말씀드리려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관점에서, 현대의 진화론을 크게 셋으로 구분한다면 전통적 진화론, 유전자적 진화론, 창조적 진화론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 진화론
알다시피 찰스 다윈의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1,000km 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에 여러 섬이 있다. 다윈은 섬마다 돌면서 부리가 긴 새와 넓적한 새를 잡아왔는데, 새 전문가가 보더니 같은 핀치새라고 밝혀주었다. 각 섬의 환경에 따라 부리가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었던 것이다. 같은 종의 거북이 살고 있는데, 건조한 섬에 사는 거북과 습지 섬에 사는 거북의 등껍질 모양이 달랐다. 그 유명한 갈라파고스 이구아나도 마찬가지다. 이걸 연구해서 진화론이 탄생했다.
그런데, 거북이에게 날개라도 달렸다면 또 모를까, 등딱지 모양이 달라진 것을 꼭 진화라고 불러야만 할까? 그냥 환경 적응이라고 부르면 뭐 또 어떤가?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거기에는 백인과 흑인과 황인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인종적 특성이 뚜렷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아프리카지역에 살다보니, 검은 피부가 더 유리해서 적응한 것이며, 북쪽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흰 피부가 생존에 더 유리해서 그렇게 적응된 것이라고 한다. 한국사람을 비롯한 몽골계통 사람들은 왜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광대뼈가 더 튀어나왔을까? 어떤 학자는, 곡물을 주식으로 삼는 이 지역의 사람들은 고기나 생선 등 연한 음식들을 먹는 지역의 사람들에 비해서 음식물을 더 많이 씹고, 딱딱한 것을 더 많이 먹어야만 했는데, 그런 음식을 먹기 위해서 자연히 턱은 넓적해지고, 턱을 움직이는 근육이 연결되어 있는 광대뼈는 튼튼해질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런데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 갈라파고스의 섬들에서 새의 부리가 길어지거나 짧아진것과 뭐가 다른가? 튀어나온 광대뼈는 적응인가, 진화인가?
다윈은 거북이가 달라진 것을 보고 수억년 전에는 아메바에서부터 점점 종이 갈라졌을 거라고 추정했을 뿐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의 한 종 내에서는 유효한 설명이 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종에 대한 설명을 아직도 제시하지 못 한다.
종에서 종으로의 진화는 어떤 진화학자도 증거를 들어 제시한 바 없고, 증명된 적 없다. 시조새가 그 역할을 하는 줄 알았더니, 이건 오히려 지금 크게 논쟁 중이다.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증명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진화론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다루는 학문의 특성상 완전한 증명은 아마도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진화라는 것이 학문적 결과가 아니라, 어떤 신념처럼 작동하는 것으로 보일 만큼, 오히려 일종의 종교처럼 보일 정도로 활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전자적 진화론
유전자적 진화론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으로부터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DNA라는 생명의 기본단위를 발견하면서 생존이라는 이기적 목적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하는 진화론이다. 젊은이들에는 익숙한 ‘밈’이라는 용어도 이 책에서 나왔다. 유전자적 진화론은 아예 무신론적 진화론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이론에도 아직 해명해야 할 것이 많다. 유전자적 진화론은 생존에 유리한 것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인데, 고등생명체가 하등생명체보다 생존에 유리한지, 이를테면 사람이 박테리아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생존에 더 유리한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도 없다. 특별히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사는 개별 유전자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기적 유전자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은 태어나서는 안될 존재가 된다.
창조적 진화론
진화론의 나머지 하나는 창조적 진화론이다. 다른 말로는 유신 진화론이라고도 한다. 진화의 전 과정에 보이지 않는 의식, 혹은 계획이 작용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학문인데 베르그송과 샤르뎅 등이 주장하였고, 전통적 진화론과 유전자적 진화론의 한계를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론이기도 하며, 많은 기독교 과학자들이 동참하고 있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C.S. 루이스도 이 이론을 지지자로 분류된다.
이런 창조적 진화론에 동조하는 기독교인들은 비교적 진보적 의식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창조적 진화론보다는 더 완고한 창조설을 지지한다.
말씀드린 것은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의 종류이며, 크리스챤 과학자들이 창조에 대해서 제시하는 의견들, 이른바 창조과학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젊은 지구론– 지구의 나이가 성경의 연대대로 6000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과학적 근거는 비교적 빈약하며,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지지한다. 국내의 많은 이른바 창조과학자가 이 이론을 지지한다. 아까 말씀드린 포항대학교 교수가 젊은 지구론을 지지한다고 발언했던 것을 언론이 파고들어서 문제화시킨 것이었는데, 청문회에서 직무와 관련 없는 종교적 신념을 따질 수 있느냐에 대한 우려를 남기기도 했다.
오래된 지구론– 과학계에서 말하는 지구와 우주의 년대는 인정하고 우주의 나이는 138억년 지구는 45억년인 것도 인정하는데, 하나님의 창조가 그만큼의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믿는 창조론이다. 창조의 6일의 날자는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질연대에 비교할 수 있다는 이론 등을 포함하고 있다.
지적설계론– 비교적 최신 이론으로는 지적설계론이 있다. 매우 복잡한 생명 시스템과 지구의 환경이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것은 과학적이나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며,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틈새는 초월적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이론은 기독교 외부에도 존재하는데, 지적설계자가 외계인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종교도 있다.
진화적 창조론– 아까 진화론의 종류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건 창조적 진화론이고,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진화적 창조론이다. 말의 순서가 바뀌어서, 의미가 약간 달라졌다. 창조적 진화론은 진화론의 이론을 완성하려면 절대자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라면, 진화적 창조론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를 기본으로 선언하고, 하나님이 자연세계에 개입해서 진화의 방법을 통해 세상을 만들었다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진화론이나 창조론이든 대략 분류한 것이고, 이 외에도 수많은 주장들과 이론들이 있다. 기독교 입장에서 창조와 진화에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서 오늘 설교말씀을 찾아보면, 링크를 남겨놓도록 하겠다. 교회 홈페이지는 지금 보고계시는 유튜브 영상의 아래쪽 설명란을 펼치면, 홈페이지로 넘어가는 링크가 있다. 창조과학회(http://www.creation.kr/), 지적설계연구회(www.intelligentdesign.or.kr), 과학과 신학의 대화(www.scitheo.org)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www.str.or.kr/main/main.html)등등의 사이트다.
여러 이론들을 말씀드려서 혼란을 일으킬까 염려되는데, 그래서 정답이 뭐라는 말이냐고 물을 분이 또 있을까 염려된다. 성경과 신앙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다. 정확히 이것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일수록 대개 비이성적이며, 대화 자체가 힘들다. 다만, 의혹만 가지게 될까봐 내가 지지하는 분의 글을 인용한다.
C.S.루이스 [고통의 문제]-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인간성의 매체가 될 동물의 형태를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는 엄지 손가락이 각 손가락에 닿을 수 있는 손과 언어를 발음할 수 있는 턱, 치아, 목, 그리고 이성적인 사고를 구체화하는 물리적 동작을 전부 수행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한 뇌를 그 형태에 부여하셨습니다. 그 피조물은 인간이 되기 전 오랫동안 이런 상태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 피조물은 현대의 고고학자가 인간성의 증거로 받아들일 만한 물건들을 만들 만큼 똑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피조물이 여전히 동물에 불과했던 이유는 그의 모든 육체적, 심리적 작용이 순전히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은 이 유기체의 심리적, 생리적 기능에 새로운 종류의 의식, 즉 ‘나’라고 말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알고 진선미를 판단할 뿐 아니라, 시간 너머에서 시간이 흘러 지나가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의식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한경직 (1947)- ‘그런데 근래(近來)에 하가 간에 창조적 진화론(創造的進化論)을 주장하는 이가 많다. 이에 의하여 하나님/하느님께서 각색 종류의 생물을 친히 만드시고, 그 종류 안에서 진화와 변이(變異)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자료로는 제일 합리적인 결론이며, 이야말로 성서적이다. ‘태초에 하나님/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이 신앙은 미동(微動)도 안 하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대로
창세기 1장을 따르면 인간 이외의 피조물과 인간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동식물은 그 종류대로 만드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오래 전에는 형상은 외형, 모양은 그 기능이라고 해석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해석하면 두 개의 단어가 모두 우리 말의 ‘닮았다’는 의미로 해석해서 무리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 중에 사람의 창조는 특별하다. 첫째,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에 특별하다. 둘째, 인간은 지으신 목적이 밝혀져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다른 어떤 피조물에도 그것을 만든 실제적인 이유를 언급한 적은 없다. 셋째, 인간에게는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힘을 주셨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감탄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시139:14)
세익스피어도 이렇게 감탄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훌륭한 예술작품인가! 이성에 있어서 얼마나 고상하며, 능력에 있어서 얼마나 무한한가, 형체와 운동에 있어서 얼마나 유연하고 인식에 있어서 얼마나 신적인가?”
그런데 우리들에게 감탄의 순간이 지나가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대개 궁금증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대체 얼마나 노력했으면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이런 궁금증, 대체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이 뭐지?
그동안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수많은 이해와 해석이 있었다.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가장 기본적이며 오래된 해석으로는 우리의 외형이 하나님과 닮은 점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영적 존재라는 점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중세에는 의지, 자유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혹은 지적 존재라는 점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다.
개혁자들은 영적 특징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았다. 지, 정, 의와 같은 것들로서 중세시대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그 순수함을 상실하여 타락한 상태인 것을 주목했다.
20세기 들어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이나 본질에서 찾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존재, 부르시면 들을 수 있고, 대답할 수 있는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라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대부분 동의하는 한 가지는, 에덴 동산에서 쫒겨날 때의 인간은 그 형상을 잃어버린 상태였다는 점이다. 얼마만큼 잃어버렸는지에 대해서 개혁자들은 전적 타락으로 인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만큼이라고 말하되, 또 다른 신학작들은 부분적 타락으로서 아직도 남아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대체 하나님의 형상이 뭐냐. 이것이든 저것이든 분명한 지목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갓난아이가 부모를 닮았다고 말할 때도, 처음에는 눈이 누굴 닮았다, 코가 누구를 닮았다고 말하다가, 아이가 조금 크면 입맛이 누굴 닮았다고 말하게 되고, 조금 더 크면, 성격이 누굴 닮았다고 말한다. 사실은 그렇게 닮은 점이 점점 나타나고, 발견되고, 그 모든 것을 합하여 부모를 닮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서로 각각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깊어져 온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합한 이해, 통째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가시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우리 인간들이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만큼 가시적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분이다.
고후4: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시며 또 하나님이시다.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계신다. 예수의 정체뿐 아니라 예수의 삶, 말씀, 행적 등등은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다스리시던 그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보인다.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보인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한다. 예루살렘의 귀인들의 집에 초청받기보다, 국경도시 여리고에서 세리와 죄인들의 집에서 편안해 하시던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보인다.
현대에 이르러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하는 점 한 가지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은 회복되고, 또 온전하게 만들어져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모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의 삶, 그분의 행동, 그분의 언어, 그분의 기도를 본받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형상은 단순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본래 우리가 그렇게 지음 받았는제 현재 잃어버리고 있는 형상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형상이다. 우리가 목적해야 할 형상이다. 그 모델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를 닮아감으로써 우리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그렇게 예수를 닮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노력의 방향을 지혜롭게 모색하라. 치열하게 싸워 이기라. 이것을 분명히 삶 속에 끌어오라.
겉으로만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종종 말씀드렸거니와, 조조가 관우에게 비단 옷을 하사했고 잘 입고다니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 비단옷 아래에 유비와 도원결의 때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겉만 중요한게 아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제대로 그리스도로 옷입기 위해서는 먼저 벗어버려야 할 것이 있다. 벗어버려야 할 것을 아는 것이 지혜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어떤 큰 대리석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더니 마치 미친 사람처럼 흥분하며 웃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놀라서 무슨 일인지 묻자 대답하였다. ‘봐라. 저기 다윗이 있다. 저 바위 속에서 다윗이 걸어나온다.’ 미켈란젤로는 커다란 바위 속에서 다윗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가 한 일은, 바윗덩어리에서 다윗의 모습만 빼고, 나머지 돌들을 떼어내는 것 뿐이었다. 정으로 쪼고, 망치로 때리면서 한점 한점 돌을 떼어내었고, 마침내 그 유명한 다윗상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처럼 세상에 익숙한 인생, 딱딱한 생각과 습관들로 자기를 보호하는 바위보다 완고한 인생들에게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아낼 수 있을까? 내 속에 있는 예수의 모습만 남기고 나머지를 쪼개내면 된다. 그것이 내가 회복할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의 가장 위대한 피조물인 우리 안에 지금도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