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1 송구영신예배 말씀
물과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말씀: 이사야 43장 1-7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설교영상: https://youtu.be/Huq-qIs8EkA
지금 우리는 20년도와 21년도를 잇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간다. 이 다리는 일방통행이고, 되돌오는 길은 없다.
그 너머의 땅, 2021년도의 삶을 억지로 예상해보지만, 항상 그렇듯 미래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작년 송구영신 예배 때에, 2020년의 코로나 상황을 상상이나 해 볼 수 있었던가?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는 코로나 시국의 삶, 백신은 안전하며, 치료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거기는 어떤 땅이며,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역사는 방향을 가지는가? 아니면 우연과 필연이 겹쳐지면서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일까?
시간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 가장 확실하고 유용한 하나님의 도구인 것 같다. 성경은 시간과 역사가 어느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고, 그렇게 확언한다. 우리가 또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그 방향성에 어떤 힘을 더하시는지, 어떻게 섭리하시는지의 이야기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으로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세월 속으로 끌려들어간 적이 있다.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거기서 집을 짓고, 자녀를 낳으며 유민으로 살아갔다.
저들은 약속의 땅에서의 생활, 찬란했던 유다 왕국의 영화에 대한 기억이 있다.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예루살렘은 파괴되었고 땅은 황무해졌다. 그 땅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동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소식조차 희미하다. 저들의 눈물을 하나님께서 돌아보고, 저들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인가? 과연 저들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고, 다시 예루살렘의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러나 포로의 기한이 차고,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올 때에, 백성들을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된 회복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선언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내 것이라”
아버지 것을 손 대는 것 아니다. 왕의 물건에 함부로 손 댈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세상이, 사탄이 손 댈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은 ‘구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에게 닥칠 고난은 현실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할 길은 여전히 물 가운데, 불 가운데 있는 위태롭고 험한 길이다. 하나님은 그 혼란하고 위태로운 상황 자체를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다. 물은 우리를 쓸어갈 듯 넘칠 것이며, 불은 우리를 태울 듯 맹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물이 우리를 침몰시키지 못하도록, 그러한 불이 우리를 태워버리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을 약속해주신다.
이건 우리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물이 넘치듯, 불이 타오르듯, 코로나 시국, 경제적 어려움의 상황들이 우리를 엄몰한다. 우리들의 모임은 금지됐으며, 성도가 함께 모여 떡을 떼지 못한다. 웃으며 샬롬으로 인사하지 못하고, 축복으로 붙잡던 손도 멀리 떨어진다. 이러한 일이 얼마나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 때문에 추락하지 않도록, 나의 작은 나의 게으름에 파묻히지 않도록, 함께 하지 못한다 해도 더 간절함으로 서로 기도할 수 있도록, 넘어진 사람도 다시 일어서도록, 주님은 우리를 지금 도우실 것이다.
언젠가 코로나가 물러가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국에,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기 원하신다. 우리의 찬송을 지금 소리높이기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를 지금 부르짖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돕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누가 이 약속의 수혜자인가?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자들에게는 어떤 자격이나 특징이 있는가? 오늘 말씀은 주님이 도우신다는 약속의 말씀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누가 그 도우심을 힘입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이 가득하다.
하나님께서 ‘내것이라’고 선언하는 그는 누구인가?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유대민족을 부르시면서 그 이름을 야곱으로, 이스라엘로 부르시고 있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삭의 둘째 아들이며 약속의 계승자다. 이스라엘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새롭게 붙여주신 이름이다. 얍복 나루에서 밤 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한 끝에 이 이름을 얻었다. 야곱에게서 열 두명의 아들이 태어났고, 이들이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으며, 열두 지파의 무리를 훗날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름을 한번에 부르시는가?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셨으면, 그냥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셔도 될 것 아닌가? 과거 야곱, 그 뜻은 발뒤꿈치, 속이는 자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으로서, 한 인간, 한 민족의 정체성의 커다란 변화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이 두 이름 속에 민족의 현주소가 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과거를 씻어버리지 못했다. 거룩한 이름을 가졌지만, 몸과 생각은 아직도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기도는 거룩하지만 행실은 세속적이다. 겉모습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속은 세상 욕망으로 가득하다. 이름으로는 약속의 백성이지만, 현실로는 포로로 잡혀간 신세다.
그러한 이중성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지만, 회복의 꿈을 꾸는 저들을 하나님은 품으셨다. 세상에서 벌어먹고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기도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기억하셨다. 바벨론의 지도자들이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히브리 노래를 한 곡 불러보라고 해도, 차라리 그 손이 비파 타는 것을 잃어버릴지언정 어찌 하나님의 노래를 이방 사람 앞에서 부를 수 있겠나고 슬피 울던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은 저들의 노래를 회복시켜 주시려 하신다.
그들은 흩어진 자, 사로잡힌 자들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이룰 수도, 구원을 이룰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자들이다. 그의 구원, 메시야의 통치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지나다 보면 쨍 하고 해뜰 날이 올 것을 기다리는가? 아니면, 장차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그분을 기다리는가? 2021년도에 어떻게든 살아갈거나고 말하는가, 현실 속에서 주님이 나타나 도우실 것을 기대하는가?
어느 시인은 현대를 ‘불안의 시대’ 혹은 ‘염려의 시대’라고 하였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더 빠르게 달리게 하고, 더 높게 오르게 하고, 더 많이 소유하게 하였지만, 그 빠르기와 그 높이와 그 소유는 한 번 넘어지면, 한 번 떨어지면,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힐 만큼 커졌다. 인류는 누리는 것만큼 더 두려워할 것들을 만들어왔다.
인류는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수십년 전에는 핵무기 하나로도 지구 멸망 오분전을 말했지만,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는 이제 핵무기보다 더 다급한 숙제가 되었고 그 두려움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인간의 오만함과 악함이다. 물론 인류 가운데 아직 빼앗기지 아니한 선함과 순전함이 존재하지만, 악의 강력함과 설득력과 재물과 향락을 통한 강력한 유혹을 인류 문명을 극복하여 이길 수 있을까? 이번에 코로나와 같은 사태는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던 재앙이며, 인간이 그동안 이룩한 문명 자체를 위협할 정도인데, 또 다른 제2의 코로나 사태가 없다는 보장이 있는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이건 우리의 마음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용기를 내라든지, 걱정하지 말라든지,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괜찮아 잘 될거야’라는 말, 그런 노래도 있다. 그런 노래가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는 것도 안다.
미래는 알 수 없기에, 좋은 생각으로 기다린다는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르다. 잘 될거라는 희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선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 될거라는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시되, 지구의 재앙과 인류의 파멸을 막아주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재앙과 파멸의 날이 필시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 재앙을 막아주거나 파멸을 유예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앙과 파멸의 상황에서도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은, 훗날 포로에서 돌아오던 무리들이 그 예언의 성취를 보았고, 그 감격을 시편 126편에 노래하였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가 꿈 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그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당시 바벨론에 포로되어 있던 백성들에게, 함께하며 돌아오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불타 없어진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였다.
이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의 교회는 제2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이 세상과 성공의 기준을 공유하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꿈꾸시던 나라보다 내가 원하는 삶에 더 관심이 많다. 확실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과 이 시대의 교회는 세상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을 꿈꾸라. 새로운 삶에 대한 환상을 가져라. 새로운 신앙생활에 대한 꿈을 기도하라. 주님은 그를 자신의 소유, 당신이 불러서 야곱과 이스라엘로 삼으신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신다.
그의 걸음을 지키사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엄몰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며,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사르지 못하도록 보호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