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주일예배 설교
제목: 믿음을 잃어버리는 법
창세기 12장 5~20절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삶에 의미가 있는가? 고귀한 목적을 위해, 타인은 향한 선한 의도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공로로 먹고 살면서, 나는 나 자신 외의 삶에는 관심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인간은 평생을 중력과 싸운다.
아이가 중력에 거슬러 일어서려 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걷고 뛰게 되지만, 나이가 들면 점점 땅과 가까워지고 결국 죽음의 순간에는 눕게 된다. 그러고보니 사는 것은 일어서는 것이고, 중력에 저항할 수 있는 시간들만이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은 죽을 때까지 중력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넘어지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인데, 일어서지 않는 자는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예 일어나 걸을 생각이 없다면 넘어질 염려도 없다.
이건 중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가는 것도 그렇다. 모든 살아가려 하는 자는 인간의 삶을 파괴하려는 힘과 싸워야 한다. 배우려 하는 자는 핑계를 극복해야 하고, 성공하려 하는 자는 게으름과 싸워 이겨야 하며, 높이 날고자 하는 자는 떨어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빨리 달리려는 자는 속도 제곱에 달하는 힘의 위험을 품고 달리며, 남을 집어삼키려 하는 자는 도리어 집어 삼져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의 이런 위험요소들과 땀흘리는 것들이 힘들어서, 도전하는 것 하나도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불 밖은 다 위험하다고 말한다. 다만 그건 인간으로서의 삶이 될 수 없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일어서는 것이 삶이다. 하다못해 자전거 하나를 타려 해도 넘어져 가면서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넘어짐, 실망, 거절, 좌절, 실패, 왕따를 옷처럼 입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이 왜 힘드냐고 말하지 말라. 그런 위험을 감수했기에 살아가면서 기쁨을 맛보고, 사랑, 성공, 성취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씨앗으로 심겨진 그 순간부터 마치 생명처럼 자라나려는 속성이 있다. 믿음은 자라나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까지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은 수많은 도전에 노출된다. 사탄은 마치 중력이 물체를 끌어당기듯 지속적으로 믿음의 성장 방해하고 넘어뜨리려 한다. 모든 사람의 믿음은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사탄의 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믿음은 그 믿음의 용도가 다하는 순간까지 유혹과 싸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무슨 자격증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운전면허증을 따면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을 가졌으니 하나님은 보호하시며 축복하시고,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천국에 자리를 확보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이라는 용어에는 훨씬 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백과사전의 설명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믿음을 고백한 다음에도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면 인생을 시작한 것이지만, 인생이란 것을 알기에는 어린 것처럼, 어린아이 시기와 청소년의 시기를 지나야 비로소 인생을 말할 수 있듯, 우리가 믿음을 제대로 말할 때까지도 시간이 제법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단순히 시계바늘의 회전이 아니라, 그 믿음을 배워 갈 인생의 사건들을 말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우리는 흔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 이전에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 있었고, 노아처럼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이 있었지만,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한 민족을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께 복을 받을 민족이 되게 하는 계획을 세우셨다. 아브라함은 기꺼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자기의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시작되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이사계획, 주택계획, 자손계획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믿음 훈련 계획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은 모던 믿음의 선배들의 공통적인 과정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을 떠난 것은 마치 사관학교에 들어간 것과도 같다. 사관학교에 들어가면 이미 군인 신분이지만, 그때 해야 하는 것은 몇 년간의 고달픈 훈련인 것과도 같다. 이 일이 아브라함에게는 어떻게 나타났느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자.
하나님이 이끄시어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곳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지역에서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더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도착한 가나안 지역은 그렇게 좋은 땅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곳이라고 지명한 세겜 지역은 이미 그곳을 차지한 사람들이 터주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가나안 생활을 시작했지만, 점점 남쪽으로 옮겨갔다.
8-9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여기서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점점 벧엘을 거쳐 점점 남방으로 옮겨간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는지, 아브라함의 개인적 사정 때문인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가나안 지역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급격히 척박해져서 농사지을 수 없는 땅이 된다.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 일부러 광야를 찾아갈 리 없는데, 왜 아브라함은 세겜을 떠나 남쪽으로 올라갔을까? 세겜과 벧엘 지역만 해도 가나안땅의 중부지역으로 상대적으로 물이 부족하지 않고 풍요로운 곳이지만, 남방 브엘세바는 가뭄에 취약한 광야지역인데 왜 옮겨갔을까? 세겜 사람들의 텃세가 심했었을까?
나는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옮겨간 것과 그 옮겨간 곳에서 기근이 만난 것을 연관 있는 사건으로 본다.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목한 땅을 떠나 남쪽으로 옮겨간 것부터 있어야 할 땅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거기서는 기근까지 만났다고 본다. 오늘 본문의 애굽에서의 소동 후에 돌아올때는 남방이 아니라 다시 벧엘로 복귀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점을 보아도 아브라함이 일차적으로 거해야 할 곳은 가나안 땅 중부지역이지, 남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이 기근은 자신이 초래한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본래부터 계획한 아브라함의 연단을 위한 순서이기도 하다. 척박한 땅, 급작스럽게 닥쳐온 기근 속에서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은 항상 풍요롭고, 하나님이 지목한 땅에는 기근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시작한 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떠나온 길에서 어려움을 만난 사람이, ‘이게 아닌가보다’라고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자기 마음대로 경로를 바꾸고 목적지를 바꾸면서,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그럴듯하게 믿음의 생각과 언어로 포장한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엄청난 시련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믿음에 대한 착각에서 온다. 지금 처한 상황이 힘들거나 어렵거나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가는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지금의 목적이 정당한가를 하나님께 물어야지 눈에 보이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 뒤에 슬쩍 숨어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면 안 된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러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정은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도 잃어버린 것이 되었다. 이제 아브라함은 온갖 육체적, 영적 공격에 노출되었다. 먼저 쇠락하여진 것은 저의 마음과 영혼이었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확장된다. 가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아브라함에게 가뭄보다 심각한 걱정거리가 생겼다.
11-12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하나님의 땅을 떠나 세상으로 간 사람은 결국 쉽게 세상의 위협에 노출된다. 이전에 할 필요 없었던 염려가 그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애굽 사람들이 아내를 빼앗고 나를 죽이겠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위험에 처하면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땅을 떠나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그 위험이 기도해야 할 제목인 것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기껏 생각해 낸 것이 더 어리석은 생각,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이었다.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떠난 자가 겪는 가장 일반적인 경로를 아브라함이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땅을 떠났기에, 자기가 선택한 삶의 길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이 노출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기껏 생각해 낸 것도 상황을 더욱 나빠지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누이라고 속이면 자기를 죽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빼앗아가서 아내로 삼으리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불신이 불길한 상상을 하게 하고, 상상력은 불안을 낳고, 불안이 거짓말을 낳았는데, 그 거짓말은 가정의 파괴를 가져왔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빼앗기는 과정 중에 희미하게 나타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마저 포착하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도착했을 때에 애굽은 이미 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수많은 피라미드가 지어진 대 제국이었다. 이방에서 가뭄을 피해서 온 떠돌이가 왕을 직접 만나는 일을 벌어지지 않는다. 그저 사라의 미모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을 뿐이다.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이런 소문이 날 때에 아브라함은 일이 잘못되고 있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작은 거짓말이 소문처럼 퍼져갈 때에, 나서서 사실을 밝혔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브라함의 염려와는 달리 보호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한 나라가 천년을 지속되려면 그럴만한 규모와 법도와 질서를 갖추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땅을 떠난 자, 하나님의 지혜가 함께하지 않는 자에게는 오히려 내가 죽지는 않겠다는 좋은 신호로 오해되었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소문은 더욱 퍼져서 애굽 왕국의 고관들이 소문을 보고 찾아와 정말 미인이라고 감탄하고 돌아갔을 뿐 아니라, 왕 앞에서 여인의 미모를 칭찬까지 하게 되었고, 왕은 별 볼일 없는 피난민의 아내를 손쉽게 빼앗아버리게 된 것이다.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세상에 잡아먹히는 방식이다. 이게 세상의 작동 방식이다. 하나님의 방식을 신뢰하는 믿음, 단지 그것 하나만 빠졌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더구나 이런 일은 그 상황 속에 빠져서는 전모가 파악되지 않는다. 혼란하게 만드는 상황이 중첩된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아 간 왕은,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선물하였다. 갑자기 아브라함은 부자가 되었다. 아내는 빼앗겼는데, 갑자기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내를 빼앗긴 것은 내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의 손익계산서는 어떻게 뽑아야 하는가?
이게 세상이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속이는 방식이 아닐까? 빼앗기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다. 사람을 빼앗기는 중에 돈은 쌓인다. 믿음을 빼앗기고 계산만 남았다. 영원한 것은 빼앗기고, 영원히 가지고 가지 못할 돈은 남았다. 장사 잘한 것 같다. 돌이킬 방법도 없으니 이게 운명이려니 시침 떼거나, 세상은 본래 이런 것이라고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일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 부르기를 포기했다. 처음 세겜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사할 때마다 제단을 쌓던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하나님의 이름마저 부른 적이 없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아주 간단히 시작할 수 있다. 가뭄을 피해서, 현실이 어쩔 수 없으니, 양과 가축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으니,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닐테니, 잠시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는 아주 쉬운 시작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이 도착한 여기 애굽에서, 세상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길은 없고 문은 이미 닫혔다.
모든 원인은 가뭄에 있는가?
물론 원래 척박한 가나안 땅이고, 그 남방지역이어서 가뭄은 더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가뭄은 자연재해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을 시험하였고, 연단하였다.
믿음의 시험, 믿음의 연단이 교회에서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가한 사람들이다. 물론 교회 내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제대로 되지 못한 믿음이라면 교회 안이거나 밖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임과 동시에 세상 속에 속한 땅이요, 가뭄과 대적들의 위협을 받는 세상 속의 한 지역이다. 어디 외딴 섬을 만들고 거기 격리시켜버리고 믿음을 보존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여 믿음을 키워갈 때에, 세상 속에서 연단시키며 성숙시키는 방식이다.
가뭄은, 우리가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모든 상황의 상징이다. 갑작스런 홍수일 수도 있고, 지진일 수도 있다. 코로나로 인한 봉쇄일 수도 있고,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다. 친구의 배신일 수도 있고, 가족의 갈등일 수도 있고, 사람 문제일 수도, 돈 문제일 수도 있다.
예기치 못하는 사이에 당도한 그 상황 앞에서, 내가 결정할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결정을 할 것인지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싸움은 고독해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믿음을 붙드는 결정은 외로운 것이어서, 절친이라도, 부부 사이라도 건널 수 없는 틈새가 있다. 그 믿음은 온전히 그 자신만의 것이요,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세상을 핑계대지 말라.
부동산 폭등이나, 취업 절벽이나, 정의의 부재까지고 사실이지만, 그것은 당신의 핑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가뭄이나 지진처럼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지금 나타난 것들이 사라지면 또 다른 핑계거리들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해결해야 할 것은 흔들리는, 정해지지 않은, 드러내지 않은 내 속에 있는 것들이다. 내가 흔들리면서는 과녁이 정지해 있어도 맞출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멈추면 흔들리는 과녁이라도 맞출 수 있다. 흔들리는 세상을 탓하기에 앞서, 흔들리는 영혼, 흔들리는 믿음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이긴다.
시인 윤동주가 나무라는 시를 썼다.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바람이 부니까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시인은 무엇을 보았기에 나무가 춤추니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니 바람도 잔다고 하는 것일까?
시인은 나무가 주체가 되는 풍경을 보고 있다. 이 시에서 세상의 중심은 바람이 아니라 나무다. 모든 문제와 바람과 아픔을 겪고 있는 나무가 바로 사람이요, 흔들리는 사람이다. 바람은 대한민국이며 시대의 바람이며 세상이며 우주이고, 나무는 주체이며 실존이며 그리스도인이다.
세상에서는 개인이 세상에 굴복하여 합류하는 것을 윤리라고 부르며 삶의 방향이라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의 합리를 버리고 오히려 비현실적인 부조리를 내 안에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이끄신 땅에 가뭄이 들었는데도 그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믿음은 부조리다. 그러나 그러한 부조리는 바람을 맞는 시점, 결단을 내리는 현실에 국한된 것일 뿐, 믿음은 현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지혜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한 나침반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의 원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장면에서 더 잘 드러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이건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에도 맞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으로서도 결코 따르고 싶지 않은 명령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얼마만큼의 고민과 상심이 있었는지 성경은 전하지 않지만, 모든 부모라면 짐작할만큼의 갈등 끝에 내린 순종, 그 모순된 길에 해답이 있었다. 결국 이삭은 죽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의 파괴자가 아니며, 아브라함은 신앙의 부조리와 마음의 갈등 속에서 답을 찾게 된 것이다.
가뭄 때문에 애굽으로 피난간 이야기와 이삭을 번제로 바친 이야기 사이에는 수십년의 간격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떻게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고, 두 번째 이야기는 믿음이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내는 가의 이야기다. 그 시간들이 훈련의 시간이었다. 그 훈련은 세상에서 시행되었다. 가뭄, 이웃, 아들, 양떼들, 소돔의 전쟁 등등 아브라함의 주변 상황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키워가시는 도구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 곁을 스쳐가는 수많은 바람과도 같은 사건들, 일상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다. 그 수많은 작은 사건들에 대한 우리들의 수많은 작은 반응들이 곧 믿음의 길을 결정한다. 오늘 설교말씀 제목을 일반적으로는 금기시하는 부정적 구절로 정하는 것에 부담이 좀 있었지만, 그만큼이나 절실했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들이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것만 같은 작은 일들,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일상적인 일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태도가 결정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
얼마 전에 아주 인상적인 영화를 봤다. 다크 워터스(dark waters)라는 영화인데, 미국에서 몇 년 전에 법원 판결이 난 환경오염 사태를 다루고, 그 주인공 변호사 롭의 분투를 묘사한 영화이다.
사건은 미국의 거대 기업 듀폰이 2차대전 중에 전쟁물자의 코팅을 위해 개발한 테프론이라는 물질을 가정물품에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현대의 거의 모든 가정마다 하나씩은 있는 테프론 코팅 프라이팬의 코팅 재료인 테프론이 맞다. 이것을 만드는 과정과, 사용하는 과정에서 독성물질을 뿜어내는데, 듀폰의 공장 근로자들과, 인근 마을에서 수많은 질병과 돌연변이, 각종 암이 발생한 근원이 되었다. 처음에 프라이팬에 테프론을 코팅하니까 눌어붙지 않는다는 놀라운 발견으로 테프론을 알루미늄에 코팅한 상품으로 순식간에 대기업이 된 테팔의 이름도 테팔 + 알루미늄에서 온 것이었다.
이 소송은 1998년에 제기되어 거의 20년이나 걸린 2016년에 끝났다. 테프론이 발암물질로 규명된 것은 소송 8년째인 2006년이고, 그해에 이것이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어 우리나라 9시 뉴스에도 방영되고, 그 뉴스 화면이 영화에 끼워져있기도 하다.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300명의 임산부를 조사한 결과 297명의 태아 탯줄 혈액에서 테프론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전 인류의 99%가 중독되어 있다고 본다. 테프론 수입이 많은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한국인의 체내에 축적된 테프론이 가장 수치가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어떤 영웅이 밝혀냈는가? 주인공 롭은 내세울 것 없는 시골 출신 변호사이며, 무슨 정의를 위해서 찾아다니는 슈퍼 영웅도 아니며, 다른 사람들도 그런 모습을 기대하지 않는,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등록금이 부담되는 평범한 시민에 불과하다. 어느날 우연히 할머니의 소개로 찾아온 농부의 뜬금없는 의뢰로 인해서 이 사건을 맡게 되었을 뿐이다.
상대 회사는 거대기업으로서 능력이 막강하고, 가진 증거는 부족하고, 심지어 주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염려하고, 시간이 길어지자 자신에게 소송을 맡긴 주민들마저 등을 돌리는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도 롭은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동료 변호사조차 당신은 거대기업을 상대로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벌리는데, 당신이 튀기 위해서 이 싸움을 하는거라는 비난까지 받는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은 고독하다. 정의를 위하기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주먹을 내뻗는 것은 통쾌하지만, 주먹이 상대편에게 가하는 것과 똑같은 힘으로 내게도 힘을 가한다.
한 사람이 가진 품성, 의로움은 평소에 줄줄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타나는 과정이 있다. 평범할 수도 있는 삶의 한 지점에서, 문득 마주친 작은 부정, 작은 모순, 작은 부탁, 작은 열정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 어떤 태도로 응답하는지를 통해서 그의 의로움이 발현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엄청난 정의의 화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정의로워지게 된다. 내면의 작은 씨앗으로만 존재하던 정의감이, 비로소 세상에 정으로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물러서지 않는 것. 되돌아서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 첫 걸음은 용기를 영끌하면 떼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되돌아서는 사람이 많다. 선두를 질주하는 사람도 시선을 끌지만, 정말 아름다운 사람은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 되돌아서지 않는 사람이다.
변호사 롭의 법정공방이 시작된 시점에서 판사가 소송을 확인하면서 변호사를 보더니 한 마디 한다. 당신 아직도 거기에 있군요. 변호사 롭은 간단하게 대답한다. 15년을 버텨온 사람답지 않게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직도 여기 있습니다.” (“steel here”)
믿음을 위해 싸우는 사람
믿음의 시험은 ‘이건 하나님이 내 믿음을 연단하는 것이다’라고 쉽게 알 수 있도록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상식과 현실 속에 섞여서 일어난다. 일일이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그냥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엄청난 범죄가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한꺼번에 탈취하지 않는다. 그건 누구라도 눈치를 채기 때문이다. 조금씩, 조금씩만 덜어내고 훔쳐간다.
그 작은 구멍은 우리의 작은 핑계들, 작은 습관들이다. 작은 일들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자리를 잡는다.복잡한 버스 속에서 내 발을 밟은 사람, 음식점에서 서빙하던 사람이 내 무릎에 흘린 음식물, 친구의 어이없는 배신, 행정기관의 말도 안 되는 법규, 하필 내게도 닥친 인터넷 중고거래 사기꾼,
작은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가듯, 작은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세워져 간다. 그 모든 순간 속에서, 그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라. 멈추지 말고, 되돌아서지 말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