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깨닫기 돌이키기
마가복음 4장 1-20절(2019년 4월7일)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
오늘 본문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마가복음에서 처음 등장하는 비유이다. 예수의 가장 특징적인 교육방법인 비유가, 비교적 생애 순서적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에서 이제야 등장하는 것은 조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쭉 살펴봐 온 마가복음의 3장까지에 나타난 예수의 행적은 주로 사건과 대화였지, 순전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예수께서 제자를 세우시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이 시점에서, 비유로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다고 본다면, 비유로 가르치는 것 자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비유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말씀들도 소중하지만, 비유로 가르치신 것들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중에 어떤 것들은 비유로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셨다.
마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막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네 가지 밭 이야기의 이해’가 오늘 설교의 주제는 아니다. 물론 네 밭 이야기는 예수의 교훈이요, 들어야 할 말씀이다. 그러나 종종 예수께서 말씀하신 순수한 말씀 외에, 사건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때론 말씀이 없이, 사건만으로도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하와의 선악과는 설교가 아닌 사건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이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전쟁의 이야기이지만, 그 전쟁 자체가 한 편의 훌륭한 설교다. 유대 백성이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의 손에 붙였고,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 그리고는 70년 뒤에 돌아온 사건은, 나라와 민족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전한다.
히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오늘 본문말씀에 나타난 예수의 교훈은 씨와 밭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 끼어있는 문답에 초점을 맞춰본다. 어쩌면 오늘 이야기는 여기가, 중간에 있는, 제자들과 예수의 이야기가 핵심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가 뭔가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밤중에 예수를 찾아왔다. 낮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즉, 낮에 예수는 씨 뿌리는 이야기만 전하셨을 뿐, 그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과 옥토의 의미를 설명해주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친절하신 예수께서 왜 그러셨을까? 모든 사람이 잘 알아들을 만큼 쉽게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장기이지 않던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설명하실 만큼 탁월한 언변을 지니셨지 않던가?
왜 비유인가?
비유라는 말의 어원은 파라볼레(παραβολης)인데, 문자 그대로는 다른 물건 옆에 던져진 물건이라는 뜻이다. 비유는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 본래의 것을 더 잘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천명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질서를 기대할 순 없다. 주님의 말씀은 권위 있는 말씀인 동시에 흥미로운 말씀이었음에 틀림없다. 비유가 그랬다. 비유는 청중들이 익숙히 아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자연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의 말씀은 더욱 빛났다. 그들이 아는 것으로 가르쳤다. 자연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데, 그 하나님은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자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경외의 마음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제 봄이 되어 꽃이 피어나고 있다. 자연은 아름답되,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아름다은 것이다. 예수는 인생이 괴로운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으셨다. 비록 욥기는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말하지만, 예수는 삶을 비관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긴, 21세기 콘크리트 건물이 드리운 그늘 사이로, 흔들리는 버스와 땅 속 기차에서 시간을 보내고, 치열한 경쟁의 세상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백합화와 공중의 새가 실감이 나겠는가. 인간이 만들어놓은 기술과 문명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길이 있겠는가.
예수께서 산과 들에서 가르치신 것은, 거기밖에 없어서가 아니다. 예수는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집에서도 가르치셨다. 그러나 산과 들에서 비로소 잘 들리는 말씀이 있다. 주님의 말씀의 소재도 산과 들과 물에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도 종종 인간이 지은 온갖 어두운 그늘에서 떠나, 산과 들, 하나님이 지으신 곳으로 물러가야 한다.
비유는 진리를 구체적으로 만들어준다. 진리는 인간이 추구해 온 절대 선의 상징이며, 누구라도 가져야 할 생명의 빛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보여지지 않기에 진리는 여러 추상적인 표현들로 설명된다. 진리 뿐 아니라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여러 아름다운 것들도 추상적이어서 설명하기 힘들다. 사랑, 아름다움, 고상함, 선함과 악함 등이 그렇다.
그런데 비유는 이 보이지 않던 것들은 현실 속에서 끄집어낸다. 비유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관념을 현실로 드러나게 한다. 설명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을, 현재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그 일부분을 설명한다.
‘카람볼라’라는 과일은 우리에게 낯설고, 그 맛과 모양을 말로 설명하려면 힘들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것을 설명하려면 익숙히 아는 것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쉽다. 카람볼라를 스타 프루트(star fruit)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자르면 자연스럽게 별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크기는 바나나보다 작지만 부피는 크고, 잘 익으면 레몬 색깔이 나고, 세로로 골이 다섯 줄 들어가고 나와서, 깎지도 않고 그냥 칼로 뚝뚝 잘라놓으면 그 자체로 별 모양의 과일인데, 맛은 연한 사과맛이다. 설명이 잘 되었을까? 카람볼라를 설명하는 데에 바나나와 사과, 별이 동원되었다. 별이 하는 역할이 비유다.
천국을 설명하시려고 일곱 가지나 비유를 들었다. 진주와 같고,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고, 여자가 가루 서말에 넣은 누룩과 같고, 밭에 심은 겨자 씨와 같다. 진주도 보석도 누룩도 천국은 아니지만, 천국을 설명하는 휼륭한 재료가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설명하는 것이 비유다.
그 비유의 절정 중 하나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 주님은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사람들은 이웃이 누구인지 쉽게 알게 되었다. 이웃에 대한 어떤 철학적 해석이나, 깊은 의미의 고찰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찾아주셨다.
비유에 대해서 조심할 것이 있다. 비유를 ‘비유’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예수의 말씀을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이지만, 비유에 숨은 뜻 찾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이웃이 누군지에 대한 비유일 뿐인데, 그 속에 숨은 뜻에 대하여 과도하게 집착하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웃만 알면 충분하다. 그런데 거기에 점점 해석이 더해졌다. 어거스틴의 경우, 이 비유는 교훈의 집합이 되어버렸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은 교회에서 세상으로 간 것으로, 강도 만난 것을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나 타락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로, 기름과 포도주를 성령과 기쁨으로, 주막집을 교회로, 다시 오리라는 말을 재림의 약속으로 해석하였다. 자못 흥미롭지만, 비유가 은유로 변해버렸다. 드러나는 장치 하나하나가 뜻을 지녔기에, 해석과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은유다. 이단들은 성경을 감춰진 것으로만, 그 감춰진 것들을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고 유혹하는 지점이 여기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비유의 가장 큰 특징은 현장성이다. 그러나 비유는 갑자기 던져진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고 듣는 현장에서는 그 구절이 무엇인지, 그 배경이 무엇인지 철저히 연구하고 조사할 겨를이 없다. 비유는 요것 조것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뜻을 파악하기 위해 주는 교훈이 아니다. 비유는 독립선언문도 아니고, 헌법 전문도 아니다. 그것은 읽고 연구하고 시험하고 논문을 쓸 이야기가 아니다.
비유는 단 한 번 들려줄 이야기다. 예수의 비유는 현장성이 강했고, 즉석에서 던져진 것이다. 예수의 비유는 그 안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그 말씀이 지향하는 바를 향해, 섬광 같이 튀어나가는 빛을 따라서 우리의 눈과 발을 움직여 쫓아야 한다. 처음 들을 때에 무슨 생각이 번쩍였는지가 비유 이해의 핵심이다.
문제는 아무 번쩍임도 없을 때다. 실은 그것을 목적으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님은 그들이 깨닫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11-12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정말 어렵다. 주님은 숨기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알아 들을 힘과 능력이 없다. 그것이 주님의 답답함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면 그만이고, 그러면 벌 받아 죽을 것이라고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신 것이다.
사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사랑으로 전하건만, 조금의 노력도 없이, 이해해 보려는 수고도 없이, 듣기만 하고, 감격만 하고, 그 다음 행동이 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연민의 눈으로 보시며, 안타까운 가운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이 말에 가득 들어있다.
보아도 알지 못하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두 이야기는 하나에 대한 두 개의 표현이기도 하고, 진리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엇이 우리를 보아도 알지 못하게 ,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는가? 그건 우리의 무지와 편견이다.
비유는 현 시간과 관점에서 다른 차원의 시간과 관점으로 우리의 눈을 안내한다. 비유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재료들로 시작한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한다. 비유는 현재의 시점에서 듣는 사람의 눈을 열어주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게 한다.
비유는 듣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고는 율법학자에게 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학자가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눅10:37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비유는 단순히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비유는 그것을 듣고 재미있으라는 개그도 아니고 대통령의 연설도 아니고 아침마당의 생활정보도 아니고 ‘어쩌다 어른’의 특강도 아니다. 그것은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한 것이다.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비유다.
그러므로 비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돕고, 추구하도록 촉구한다. 어떤 진리도 남의 것이어서는 유익이 없다. 비유는 진리를 제시하면서 “너는 어떤 입장이냐?”고 채근하는 것이다. 비유는 우리를 물가로 데려다 줄 뿐이다. 물을 마시는 것은 우리여야 한다.
비유는 스스로 생각하여 결론을 짖게 하므로 진리가 실감이 있고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지는 것이다. 비유는 너무 게을러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나 편견 때문에 너무 눈이 멀어버린 자들로부터 진리를 숨기는 역할을 한다. 비유는 공정하고 정정당당하게 이해하는 책임을 개인에게 지운다. 비유는 진리를 갈구하는 자에게는 계시하고, 진리를 알고자 원치 않는 자에게는 숨겨버린다. 그러므로 비유를 들은 사람은 더 이상 핑계할 수 없게 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9)
나는 이 말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다. 기독교조차 양극화에 협조하는가? 있는 자에게서 조금 빼앗아 없는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 공평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똑같은 말씀의 기회가 주었을 때에 돌이켜 따르는 자는 복을 받고, 외면하고 따르지 않은 자는 저주를 받는 것이 공평이다.
왜곡된 생각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자들은 성경을 좋은 이야기로만, 도덕적 교훈으로만 받을 것이다. 그 정도의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품은 자들에게는 절대 예수의 진면목과 그 가르침의 비밀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비유는 말로 선포되어진 것이지 글로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서재에 앉아서 심사숙고하여 기록한 장문의 호소문이 아니며 연설문이 아니다. 예수가 말씀하시려는 핵심은 비유라는 이야기 속에 담겨 현장에서 선포된다. 그것은 글로 기록어서 집으로 가지고 가서 연구할 대상이 아니라, 귀에 들려져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언어 속에 담겨있다.
이처럼 주님의 비유에는 독특한 특징과 함께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마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비유로 선포된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이 쉬운 것이기에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비유를 듣는 우리에게도 어떤 책임이 생긴다. 진리 자체야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거기에 있다. 다만 내가 그에게 해야 할 몸짓이 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가? 말씀과 진리를 요청하기 전에는,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다. 그것을 향해 손을 내밀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비록 찬란히 빛나지만 나와 손잡지 못한 채 그냥 거기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그것을 안다고 내 것이 아니며, 그것을 이해한다고 소유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비유와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그 책임이다. 비유는 우리를 초청하고, 우리는 비유의 손을 잡아 그 체온을 느끼고, 그 의미를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저녁 때에 예수를 찾아간 사람들
이 안타까움 속에 한 가지 희망이 보인다. 제자들이 저녁때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찾아온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가능성이 있다. 그를 찾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