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원하는 사람들

산에 오르사

하나님은 산을 당신의 활동 무대로 삼으신다.

처음 아담의 거주지를 산에 만드셔서 에덴이라고 하셨다. 노아에게 산꼭대기에 배를 만들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지시하는 산으로 가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 시내산을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모세를 거기서 만나시고, 거기에서 계명을 주셨다. 가나안에 입성하여서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게 하셨다. 시온산을 구별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삼았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자리에 성전을 세웠다. 엘리야는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거룩한 산에 이르러서 하나님을 만났다.

산에서는 특별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특별한 일을 하실 때에 종종 산을 그 무대로 삼으셨다. 왜 산이 중요한 무대로 등장할까?

성경에서만 산이 신의 활동무대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토속신앙들이 산을 무대로 활동한다. 백두산은 영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히말라야 지역의 사람들은 산을 신으로 여기기도 한다. 도를 닦는 사람들도 산으로 들어간다.

산이 하늘에 가까운 곳이라는 인식이 한 몫 한 것일까? 혹시, 성경도 그런 생각과 같은 의미에서 산이 등장한 것일까? 세상의 종교에서 나타나는 산의 의미와, 성경에 나타나는 산의 역할은 어떻게 다를까?

성경의 산과 세상의 산이 같은 점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같은 점은, 거기가 사람의 물결과 문명을 떠난 고요하고 외로운 곳이라는 점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성찰하고, 욕심을 극복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중요하다. 세상에서 산은 세상의 복잡함을 벗어나서 자기를 만나는 곳이지만 성경에서의 산은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곳이다.

물론,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실 수도 있고, 골방에서도 말씀하실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은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을 당신의 산에서 행하셨다.

여기서 산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려고 하는 그 지점을 의미한다.

꼭 산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곳이 광야여도 괜찮고, 골짜기여도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면 거기가 거룩한 곳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곳은 사람이 모여 복잡한 곳이 아닌 오히려 한적한 곳이었다. 하나님은 산에서 그의 사람들을 만나왔고, 하나님의 사람들도 의례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기대하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모세의 경우에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모세가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문명을 구가하던 이집트의 수도에서가 아니, 시내 광야의 한적한 산에서 만나셨다. 왕자의 지위로서 사람들의 중심에 있을 때가 아니라, 양치기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곳에 홀로 있을 때에 만나셨다. 젊고 힘이 넘쳐 스스로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아닌, 팔십의 나이로 장인의 양이나 치고 있던 실패한 인생의 모습일 때에 만나주셨다. 모세의 경우에 호렙산은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고, 그곳으로 이끌려 온 것이었다.

당신에게 엘리야처럼 달려가 피할 산이 있는가? 모세처럼 올라가 하나님을 만날 산이 있는가? 바울처럼 주님과 교제할 거룩한 산이 있는가?

오늘 본문에 주님은 산에 오르셨다.

신약의 주님도 산을 당신의 활동의 주 무대로 삼으셨다. 산에서 가르치신 말씀은 성경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설교라 할 수 있다.

혼자 산에 가신 경우는 대개는 기도하러 가셨다.

마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십자가를 앞두고도 산에 오르셨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 산의 이름을 변화산이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는 성전에 출입하기도 하셨지만, 성전 건너편 감람산에 자주 가셨다.

막13:3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예수의 부활 이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곳도 갈리리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산이었다. 하늘로의 승천도 갈릴리 바다도 아니고, 광야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라, 당신이 기도하시던 감람산에서 일어났다.

오늘 산에 오르신 것은 제자들을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이 일을 위해 산에 오르신 것은 의외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예수에게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에서 제자를 선택하시는 일이다.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온 유대가 주목하고 있는 예언자 예수의 제자로 발탁되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런 일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큰 환호성과 떠들썩한 잔치가 되기 마련이다. 그건 가문의 영광이요, 개인의 출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을 지명하는 것을 화려한 행사로 치르지 않으셨다. 도시와 마을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에 올라 조촐하게 열두 명을 제자로 임명하셨다. 아무도 박수를 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열둘을 지목하셨다. 이 조용한 선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기가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시니

예수께서 제자를 선택하신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 네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로되어 있다. 이들 외에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을텐데, 수많은 사람들 중에 열 두 제자를 선택한 기준은 무엇일까?

열둘이라는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열둘이라는 숫자는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숫자가 종종 상징으로 표현되는데, 3은 하나님의 완전수요 4는 세상의 수로서, 그 곱인 12는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 권위를 의미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열두 지파다. 마태복음에는 열두 보좌에 대한 이야기, 욥기에는 열두 별에 대한 이야기, 민수기에는 12 샘물에 대한 이야기, 계시록에는 12가지 실과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계시록의 십사만 사천의 숫자도 일만이천 명씩 열둘을 곱한 숫자로서 열두 지파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예수 곁에 열두 명의 제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칠십 명을 세워서 둘씩 짝 지워 전도를 보내신 적도 있었다.

눅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예수의 죽음 이후, 시체를 달라고 로마 관청에 당당히 요구했던 바리새인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의 제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렇게 제자라는 명칭이 많이 등장하지만 이 열둘이 특별한 것은 이른바 정식 임명된 제자라는 점이다. 그래서 12명은 사도(Apostle)라고 부르고, 그 외의 제자들은 Disciple이라고 표기한다.

열 두 명이 제자가 된 경위는 다양하다.

예수 찾아가 지목한 사람- 마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친구 소개로 온 사람- 나다나엘
스스로 찾아온 사람- 가룟 유다

열두 명 각각의 면모는 몇 몇 사람 외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시몬 베드로- 시몬은 ‘듣는 자’ 또는 ‘복종’을 뜻하며,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이다. 가버나움 사람으로 갈릴리 어부였고, 아버지는 요나, 동생은 안드레다. 최초 제자이며, 제자 중 맏형이고, ‘천국 열쇠’를 가진 자다.

안드레- ‘남자답다’라는 의미.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아가야 지방의 파트레에서 십자가에 달렸는데, 주님과 같은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하여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다고 한다.

야고보- ‘대신 들어앉다’는 뜻, 부친은 세베대, 동생 요한과 함께 제자가 되었다. 어부였다. 큰 야고보라고 불린다. 제자들 중 최초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체를 제자들이 옮겼는데,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스페인의 산티아고에 안장되었고, 그 무덤 위에 산티아고 예배당이 지어졌고, 유럽 각 곳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이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요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으로 야고보의 형제, 갈릴리의 어부였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였고,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그 모친을 모셨다. 제일 오래까지 생존하였고,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전했다.

빌립- ‘투쟁적’이라는 뜻이고 역시 벳세다의 어부였다.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다.

바돌로매- ‘탈레미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나다나엘과 동일인으로 본다. 아라비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전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도마- ‘쌍둥이’ 또는 ‘소리’를 뜻하며 의심 많은 제자로 알려져 있다.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알려졌고 요한복음에만 그의 행적이 나타난다. 페르시아에서 전도하고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도마가 인도까지 갔다고 한다.

마태-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인데, ‘레위’라고도 불렸다. 가버나움의 세리였다. 마태복음의 저자다.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알려진 내용이 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트려진 후 곤봉으로 맞아 순교했다고 한다.

유다(야고보의 아들)- 다대오와 동일인이다. 특별한 기록이 없다.

시몬(가나안 사람)- ‘셀롯인’이라고도 불리는데 그가 ‘Zealots’ 당원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모세의 의식을 맹신적으로 지킨 사람들이다.

유다(가룟 사람)- ‘찬양하다’는 의미인데 제자 중 회계의 일을 담당했다. 이 사람도 젤롯당이라고 본다. 제자들 중 유일하게 갈릴리 사람이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자의 구성이 범상치 않다.

제자들의 구성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유다 사람은 한 명, 갈릴리 사람이 열한 명이다. 주님이 지방색을 띤 것일까?

또 제자들 중 학자나 지식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대부분 무식한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전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선택되었다. 제자들 중 마태는 세리였는데, 그는 모든 민족으로부터 매국노요 배신자로 취급 받던 사람이었다. 반면 가나안 사람 시몬은 누가복음에 열심당으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열심당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살인과 암살까지도 맹세한, 극단적인 민족주의 단체였다. 민족의 배신자와 극단적이고 광신적인 민족주의자가 함께 제자가 되었다. 겉에서 보기에 콩가루 집안처럼 보였을 것이고, 내부에서도 서로 반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선택마저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였기에, 거룩한 모임, 예수 안에서의 모임이 어떠한 것이지 배우게 된다.

예수께서 이들을 부르신 목적을 성경은 분명히 전하고 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예수는 이 사람 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다. 그들로 공동체를 이루신 것이다.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예수와 함께 있기에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왔다가 떠날 것이다. 누군가는 구경만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로마 군인이 두려워 머뭇거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핑계 할 것이다. 그러나 함께하는 자는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이다.

함께 생활하여 예수의 숨소리를 듣고, 함께 음식을 먹으며 예수의 소박함을 배우고, 함께 대화하며 예수의 온유함을 깨우치도록, 함께하려고 부르셨다.

또 예수께서 부르신 자들의 공통점 하나가 보인다.

예수께서 부르신 사람들은 길과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특별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요,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도 아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도 아니요, 깊은 영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다.

그러나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소외된 자들이었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고, 스스로 잘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조건보다 오늘 본문에 드러나는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용기’다.

아무리 인기 있는 예수라 하여도, 벌써 이 시점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에 위험한 때였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통해서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사이가 점점 험악해져가는 것을 보았고, 마가복음 3장의 첫 부분에서는 예수를 죽이려고 헤롯당과 함께 모의하는 모습도 보았다.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가 먹여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먹으면서, 그의 베푸시는 이적과 치유에 환호하면서 예수 주변을 맴도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당국자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 사람의 제자가 되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예수는 당시 종교인들의 전통과 규칙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며, 그것을 부수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충돌, 이미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예수가 그들을 불렀을 때에,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나아온지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은 나아갈 수 있는 용기였다. 물론 이 사람들이 예수의 모든 진면목과 십자가의 길을 알고 따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생업을 내던지고, 불 보듯 일어나는 모든 핍박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용기와 겸손한 순종의 마음으로, 예수께서 부르시자 그에게 나아갔던 것이다.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 구절이 너무 사랑스럽다. 핑계와 변명을 가득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씀이다.

보내려고 부르셨다.

예수는 그들을 보내려고 부르셨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그 열둘은 박수를 받을 일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 열둘이 가는 길은 가시밭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가 세상에서 길게 이어지지 않을 것을 아셨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서만 밝혀질 이 진리의 목격자를 확보해 두셔야 했다. 그리고 당신이 전하신 말씀을 보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사람으로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것을 위해 능력도 함께 주시려 하신다.

주의 능력이 자기 자신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있지만, 주님은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자에게 당신의 능력을 선물로 주신다.

만일 우리가 주께 무엇인가를 배우려 한다면, 무엇인가를 얻으려 한다면, 처음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이 광경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열두 명을 선택하신 것은 주님이신 것이다.

사도직은 일회적인 직분이다.

이 일 이후로 교회에 수많은 일꾼, 직분자들이 세워졌다. 목사도, 전도자도, 장로도, 집사도 세워지지만, 사도는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자들, 또는 예수께 직접 가르침 받은 자들로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룟 유다 대신에 세워진 맛디아와, 후에 따로 세우신 바울까지만 사도의 칭호로 불린다. 이 사도를 세우신 기준과 오늘날 우리들이 직분을 이해하는 기준은 똑같지는 않다.

직분에 대한 주님의 기준과 오늘 우리의 기준은 여러 변에서 다르다.

직분에 대해서 한국 교회가 가지는 전통적인 기준이 있다.나이가 많은 사람이 먼저 직분자가 되는 것을 선호하는 장유유서의 전통이다. 새로운 사람보다, 개척멤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도 한다. 리더십이 있거나, 사회적 영향력이 있거나, 재력 있는 사람이 일꾼이 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이건 교회 뿐 아니라 세상의 다른 단체들에서도 적용되는 기준일 수 있다. 이런 기준이 세상의 전통적인 기준과 비슷하다고 꼭 나쁘다고 볼 것은 아닌 것이, 세상의 일꾼 선출 기준도 그 공동체의 유지를 위하여 나름 적절한 방식으로 진화해 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교회는 교회만의 더 나은 기준을 제시한다. 한국교회 초기의 덕목을 따라 음주흡연 하지 않는 자라야 한다는 기준이 오래동안 이어져왔다. 주일 성수하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기준은 가장 기초적인 기준이 된다.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도 제시된다. 새벽기도는 드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세울 수도 있다.

예수께서 제자를 세우신 일 외에, 초대교회가 직분자들을 세운 것이 중요한 지침이 된다.

사도행전과 초대교회는 직분자의 자격을 명시 하고 있다. 일곱 집사를 세울 때의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말하여 직분자가 지녀야 할 두 측면의 자격을 말한다. 먼저 신앙적 기준으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다. 둘째는 인격적 기준인데 ‘칭찬 받는 사람’이다.

디모데서와 디도서는 장로와 집사의 자격을 말한다. 술취하지 않고, 일구이언하지 않고 등등

참 어렵다. 직분자가 되는 것이 어떤 유익이나 은혜가 있기에 이런 기준을 제시하고 요구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은 속된 말로 엮이기 싫어한다. 이익이 있는 곳에서는 핵인싸가 되기 원하지만, 교회에서는 의외로 익명으로 지내기 원하는 사람이 많다. 가치의 양극화가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직분을 향한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 세대가 꼭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예전에는 직분을 사모하는 것이 신앙의 일부였다. 요즘은 교회의 직분에 대해서도 욕심 부리지 않거나, 쿨한 태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데, 직분에 따라 사람을 달리 보거나 직분이 벼슬인양 위세 부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직분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오만한 태도가 아닌가?

직분이 무엇인지, 내게 필요한지에 대한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를 각각의 사람에게 맡기시는 주님의 기준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요점은, 직분에 대한 내 생각보다 직분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에 주님은 누군가를 필요로 하신다.

당신은 주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인가? 당신은 주님이 부르실만한 사람인가?

이 직분의 의미 한 가지를 더 이야기 해야겠다.

제자라는 직분은, 그동안의 노고와 업적에 대한 상급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자격과 열정을 보시긴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직분의 목적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대한 상급이 아니라, 앞으로 이러한 일을 하라는 사명으로서 준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1월에 2019년도 신임제직 교육기간을 거쳐서,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린 바 있다. 직분은 나이가 차서 주는 것도 아니요, 당신이라면 이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임명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을 해 주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당신에게 주는 기회’라고 말씀드렸다.

직분은 어떤 과정의 종착점이 아니라, 어떤 과정의 시작점이다. 높은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다. 귀한 이름을 얻는 일도 아니다. 지금까지 잘 했다고 상 주는 일도 아니다.

내 목적을 이루는 일도 아니다. 단 한 가지, 예수의 목적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목적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열 두 제자들도 각자의 야심과 이유가 있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도 있었다. 저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당시의 로마의 압제를 극복하고 현실에 이뤄지기를 꿈꿨다.

다만, 주님은 그러한 욕망을 아셨지만, 거절하셨고, 꾸짖으셨다. 가지고 온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 자신의 목적으로 바꾸도록 하셨다.

사도(Apostle)를 어원적으로 분석하면 ‘(어떤 곳으로부터 파송 받아) 나가는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세상으로 파송 받아,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며,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았다. 그럴 때에,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영원한 것을 받았다.

이 목적의 우선순위에 대한 교훈이 산상수훈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러한 말에 사람들이 다 놀라고 의아해했다. 제자 되는 일이 쉬운 게 아니구나. 예수의 제자가 어쩌면 열 세명이 될 수도 있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한 사람이 있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무릎을 꿇고 영생의 길을 물었다.

막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