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러 있기 원치 않으면서
요즘 어릴 적 단잠을 설치게 만들던 꿈들 중 하나에 공중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던 내가 갑자기 방향과 속도가 통제되지 않아서 끙끙거리던 것이 있었는데, 요즘 가상현실을 통해서 제법 복수를 하고 있다. 얼마 전 떨기나무라는 책을 통해서 출애굽 경로에 대한 새로운 제시를 접하고는 구글 어스에서 경로를 입력하여 실제 지면을 위성촬영한 지도상에서 공중을 날아 출애굽하는 멋진 유영을 연출하고 있는 중이니, 참 대단한 세상이다.
어느 여행가의 티벳 깊숙한 곳의 트래킹 기사를 빠트리지 않고 읽고 있는데, 해발 4-5000미터를 훌쩍 넘어 식물조차 자라지 않는 메마르고 척박한 땅을, 흰 눈을 머리에 인 준산고봉들을 배경으로 한걸음씩 옮겨가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여건이 된다면 왕오천축국전의 경로를 타라가고픈, 크게 실현 가능성이 없는 상상도 해본다. 그에 비하면 관동별곡의 발자취를 따라 김영동씨의 ‘산행’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섬강과 치악을 지나 금강과 관동팔경을 두루 돌아 내려오고 싶었던 생각은 통일만 되면 이뤄질 가까운 꿈일지 싶다.
내 속에, 아니 사람 속에 떠남이라는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에덴 동편으로 길을 재촉하다가 시날 평지에서 탑을 쌓던 무리들을 조종했던, 호기심이라고 해도 좋고 죄의 영향력이라고 해도 좋고 도전의지라고 해도 좋을 그 힘은 어쩌면 본능이라기보다는 목적일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그 사람들을 떠난 것은 떠남으로서만 도착 가능한 영역을 향한 걸음이었으니 말이다.
언제 떠나느냐의 문제이지, 신앙은 예수를 대면하여 만나는 자리에서 결국은 떠남을 결론으로 하고 있다.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부르심은 그의 가족과 직업과 고향과 친구들을 떠날 것을 요청함과 다름이 없으며, 바울 역시 야망과 권력과 신념의 정점을 향해 달리던 마상에서 내동댕이쳐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도록 하신 분이 예수다.
그래서 함께 한 제자들과의 3년 동안에도 하나 되지 못했던 생각의 차이를 십자가와 부활로 극복해 이제는 떠나와 목적한 자리에 섰다고 생각할 바닷가의 그 만남의 자리에서도 몇 마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뒤로는 아예 그분 자신이 그들을 떠나버리는 장면을 연출해버리신 그분 역시 떠나는 분이었으며, 그렇게 하면서 제자들을 세상 끝까지 흩어버리셨으니, 이 땅이라는 곳 자체가 육체로든 사상으로든 신앙으로든 떠남이라는 과정을 위해 존재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것이 신앙적이거나 철학적적 결론이 아니어도 좋으니, 한번쯤은 떠났다는 느낌이 확실한 길 위에 서고 싶기도 하다. 한 번도 제대로 떠날 것 같지 않다는 두려움을 가진 채 시간이 지날수록 풀어야 할 보따리가 더 커져감을 느낀다. 떠남에 대한 욕망이 사그러드는 날이 내 인생이 내리막길에 들어섰다고 느끼게 될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을 애써 무마시키려 구지 변명하듯이 지금을 말한다면, 떠나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는 자유로움을 꿈꾼다고나 해 볼까. 꼭 그래야 하는 이유를 말하라면 정말 할 말이 없지만. 청년부 회지에 실릴 글에 이런 생각들을 써대는 이유도 마찬가지지만.
(오~래 전 청년부 회지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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