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타내지 말라
마가복음 3:7-12절(2019.3.17)
특별하지 않은, 인기 없는 이야기의 가치
마태복음은 왕으로서의 예수를 나타내기에 충분한 설교말씀이, 산에서 가르치신 말씀이 들어있다. 예수의 외치시는 말씀이 듣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마태복음을 읽으면 유익할 것이다. 왕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이라고도 한다.
누가복음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인간을 사랑하신 친구와 같은 예수를 묘사하였다. 예수의 친척 세례요한의 출생 이야기도, 예수의 어릴 때의 이야기도 여기에 들어 있다. 우리의 친구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가복음을 권한다.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 누가복음을 인자복음이라고도 부른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적 광채로 가득 차 있다. 요한복음의 첫 단어와 창세기의 첫 단어가 같은 말이다.
‘태초에’
예수의 신적 기원과 그의 영적 세계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신비한 관계가 궁금하다면 요한복음을 추천한다. 하늘의 신비를 쳐다보는 영적 높이를 가진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이라고도 부른다.
거기에 비춰 마가복음은 황소복음이라고 부른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황소처럼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이시다.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일하시는 예수님은 종으로서 낮아지신 분이시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간단한 보고들로 이어진다. 우리가 1장부터 매주 한 단락씩 읽어왔거니와, 매 이야기가 하나의 사건이었다.
지난주 성경말씀에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있던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헤롯당과 모의하였다.
그 전주 성경말씀은 안식일 예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을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항의하던 내용이었다.
그 전주의 성경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의 제자들을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들던 논쟁이었다. 그 전주에는 세관에 앉은 마태를 제자 삼으시고, 그 집에 들어가서 잡수시는 것은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하여 항의하던 내용이었다.
또 그 전주에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예수께 내렸고, 예수께서 말씀으로 그 병자를 고친 일이었다. 이처럼 마가복음은 항상 굵직한 사건들의 간단한 보고가 계속 이어지는 책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에 비하면 어딘가 허전하다.
예수께서 특별히 무엇인가를 하신 이야기가 아니다. 무슨 말씀을 가르치신 것도 아니다. 언뜻 보기에 굉장히 바빴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정신없었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환호할만한 기적도 없고, 씨뿌리는 비유같이 저녁때 쯤 다시 와서 그 뜻이 무엇이냐고 되물을만한 말씀도 없는 이 구절은 왜 여기 들어있는가? 어느 한 구절 의미 없이 주의 책에 들어간 이야기가 없을 터인데, 이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일까?
마가복음 1장 1절부터 지난주까지, 마가의 기록과 예수의 거침없는 행보를 따라 어쩌면 정신없이 따라서 여기까지 왔다. 특히 안식일 논쟁에 이르러서는 유대인들과의 정면충돌까지 이어지면서 이러다가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 말씀은 우리를 잠깐 멈추게 한다. 예수께서 멈추셨으니까.
성경을 읽다가 의미를 잘 알지 못하겠거나, 혹은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되거나, 지루해서 빨리 읽어버리고 싶은 곳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일차로 추천하는 쉽고도 강력한 방법은, 그 본문을 열 번 쯤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진숙은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동안 방학만 되면 이 미술관에 찾아가 이 그림 앞에 앉아 있곤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저 그림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일까? 문학을 전공했던 미술평론가 답게 그의 설명은 고상한 표현의 연속이다.
“조용한 침묵 속에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 말이 아닌 침묵을 선택한 듯 하다. 이 그림은 알려진 바 없는 평범한 여인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획기적이다. 당시로서는 그림의 주인공이 여성인 경우는 신화나 성경의 주인공이라야 가능했다.
현실의 여인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려면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에만 가능했는데, 어떤 행위를 해도 용서될 정도로 눈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비너스 같은 유형이거나, 여성에게 부과된 미덕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당한 경우였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그린 이 여인은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내세울만한 큰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간을 견뎠지만, 대단히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의 삶이 의미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때로 행복했고, 때로 슬펐으리라.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의 삶의 평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저 내면으로 깊게 침잠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잔잔한 기쁨, 회한과 두려움 같은 여러 감정들 속에서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잘게 부서져 쌓여 있다. 누가 가서 휘젓는다면 그 작은 이야기들은 비로소 피어오르리라.
이렇듯 렘브란트가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은 영웅들의 대단한 스토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낮은 소리의 이야기다. 이 낮은 소리를 보여주는 마법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렘브란트의 놀라운 빛이다.
여인 옆에 창문이나 촛불이 없으니, 그림 속 빛의 기원은 찾을 수 없다. 아마 빛은 인물에게서 조용히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어두울 때에만 비로소 보이는 약한 빛. 그런 존재들의 나직한 언어들이 그림 속에서 조용히 울려 퍼진다.”
어줍잖케 그림 감상이나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학교 다니면서 받은 시험 점수 중에서 미술이 제일 낮았다. 난 미술에 젬병이다. 그래서 오히려 도전의 마음이 생겨서 기회가 생기면 그림을 좀 들여다보려고 한다. 물론 잘 안된다.
명작은 스쳐보아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이건 그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린다. 가끔은 내가 음악을 좋아하기보다 그림을 좋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음악은 신의 소리를 듣기에 유용하고 그림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적합하다는 생각도 해 본다.
가장 위대한 작품은 성경이다.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볼 가치가 있다. 그 속에 인간과 자연과 세계와,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의 이야기가 있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들렸던 하나님의 소리가, 광야에서 다윗이 불렀던 유랑의 노래가, 바벨론 강가에서 포도들이 불렀던 슬픈 노래가 그 속에 있다. 예수의 말씀이, 그의 구원이 그 속에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처럼 스쳐 지나가는 구절, 예수님의 옆모습만 슬쩍 보이는 것 같은 외진 말씀에도, 이미 발견했던 것과 같은 말씀이, 또는 발견되기 기다리는 예수님의 의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읽는 최고의 방법은, 그 속에 무엇인가기 있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열 번쯤 읽는 것이다. 읽고 또 읽어도 발견되는 것이 없다면, 그건 거기 없어서가 아니라 감춰진 것이리라. 때가 아닐 수도 있고, 내가 부족할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오늘 발견한 다른 의미가 내년에 업그레이드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말씀이 재미있고 오묘하다.
큰 무리가 따르며
수많은 무리가 몰려왔다. 이 말로 이 엄청난 규모의 인원에 대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유대, 예루살렘, 이두매는 갈릴리 남쪽의 모든 유대땅을 말한다. 이두메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이스라엘의 남방 거주 한계선인 브엘세바의 중간 정도의 지역인데, 가버나움에서 대략 200Km정도 떨어진 거리로서, 하루 열시간씩 걸어도 닷새 정도의 거리가 된다.
요단강 건너편- 암몬지역으로 오늘날의 요르단이다.
두로와 시돈- 지중해변 도시로서 오늘날의 레바논에 속한다.
유대, 예루살렘, 이두메에서 몰려왔다는 말을 단 한 마디로 바꾸면 ‘전국에서 몰려왔다’가 된다. 요단강 건녀편은 오늘날의 요르단이고, 두로와 시돈도 이방 땅이다. ‘외국에서도 몰려왔다’고 표현해도 된다.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나중에 벳세다 언덕에서 오병이어로 먹은 사람이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었던 것이 참고가 된다.
사람이 많이 몰려왔다면 좋은 거 아닌가? 가르치시려는 분이, 세상을 살리시려는 분이라면, 사람 많이 몰려들면 좋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예수는 이 상황을 반갑게 여기지 않으셨다. 이 많은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두 가지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행동은 몇 가지 의문을 낳는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배를 준비시키는 것이 옳은가. 그런 사정으로 나와서 만지기라도 원하는 사람들 피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의 성품에 맞는가의 문제다.
다른 의문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다. 병 나은 사람이 예수께서 낫게 하셨다고 선전하는 것을 금하셨다. 막 1장에는 귀신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보자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오늘 본문의 경우에도 귀신들이 예수를 보면 어느 때나 엎드려 부르짖어 예수의 정체를 고백하자 그것을 금하신 것이다. 7장에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에바다’ 외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가 열리고 혀가 풀어져 듣고 말하게 되었다.
막7: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예수의 동생들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하실 때에,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않으려는 예수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한 적도 있다. 이 이율배반적인 예수의 행동의 이유는, 그 의미는 무엇일까? 저기 예수께 도움을 받으려고 몰려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아파서 주님을 찾을 때에, 주님이 배를 준비하셨다가 떠나버리신다면 어떤 의미인가?
치유가 본질이 아니다.
계속 존중해 주면 나중에는 특권으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 장사하시는 분들이 서비스 정신으로 ‘손님은 왕이다’라고 선언하고 극진히 대접했다. 요즘은 손님 중에 자기들이 왕인 줄 알고, 점원 뺨을 때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사람은 고마움은 쉬 잊고, 자기 아쉬운 것만 뚜렷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시골의사가 섭섭함을 토로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병원 찾는 노인들 많은데, 재진이면 1,500원이 청구된다. 몇 백 원 더 나올 때도 있는데, 얼굴을 붉히고 비싸게 받는다고 화내는 사람들도 많는 것이다.
주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안타까움 때문이다. 저들을 사랑하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함을 불쌍히 여기셨기에 저들을 고치시고 먹이셨다. 고침 받은 사람은 예수께 감사를 표하고, 목격자들은 하나님께 경배를 돌린다.
문제는 모여든 사람들이다. 한 사람과 사람들은 전혀 다른 존재다. 한 사람이면 조심하는데, 그런 사람 열이 모이면 방만해진다. 선한 목적으로 집단을 움직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집단이 커질수록 철저히 이익을 중심으로 행동하고 뭉친다. 예외가 없다.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치유와 이적은 말씀을 전하기 위한 보조도구다. 중풍병자가 지붕을 뚫고 침상 채 예수 앞에 도착했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주시기 전에 말씀하셨다.
막2:5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이 이 말씀으로 인하여 소동할 때에 그제서야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 병을 고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치유로 인하여 예수가 누구신지를, 당신이 무엇을 하시려는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기 원하신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목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들에게 물으셨다.
막3:4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의 반응을 보시고, 그 완악한 태도의 정면에서 병을 고쳐주셨다. 예수께는 그 사람의 병을 고칠 이유가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하셨다. 그것이 천국을 이뤄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여기 몰려든 사람들은 그저 자기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원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원근 각처에서 소문을 듣고 그동안 돈 없어 못 고치고, 약 없어 손보지 못한 자기들의 모든 질병을 한방에 고치기 원하여, 기회를 잡기 원하여, 몰려들어서 예수를 만지기라고 하려고 밀어붙이고 있다.
이은성씨의 소설 동의보감에 보면 주인공 허균이 죽을 고생을 하여 배운 의술을 펼쳐보려고 한양의 내의원 취재, 즉 의원고시에 응하려고 산청에서 떠나 올라가던 길에 충청도 진전 근처의 주막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때에 동네 사람이 와서 급한 환자 좀 봐달라는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좀 봐줬다.
그런데 그동안에 공짜로 봐주는 의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들어서 어떤 사람은 종기를 어떤 사람은 치질을 다른 사람들은 온갖 질병들을 다 토로하였다. 같이 시험을 보러가던 사람들도 나서서 도왔지만, 인근 고을에서 돈 없는 사람은 다 몰려와서 문전성시를 이뤘고, 이틀을 그렇게 시간을 보낸 다른 의원들은 서둘러 한양으로 떠나면서, 그래도 인정상 머뭇거리는 허준에게 지금 떠나지 않으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고 재촉하자, 동네 사람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마을사람들 속에 “저눔 자식이 웬 방해여! 가려면 당신이나 빨리 가란 말여!” 등 욕이 터져나왔다. 우공보가 그 얼굴에 삿대질을 놓으며 “나도 밤새 한숨도 눈 못 부치고 당신들 병 봐준 사람인데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하고 붉으락푸르락 목에 핏대를 세웠으나 돌아온 것은 마을 사람들의 흰 눈자위뿐이었다.
그러니까, 가버나움에 모여든 사람들 각자에게는 다들 사연이 있었겠지만, 이미 세력으로 모여진 군중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괴물이 된다.
예수는 그런 식으로 만날 수는 없다.
주님은 우리의 질병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다만 주님은 사람을 모아놓고 한꺼번에 고치신 적이 없다. 주님이라면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항상 일대일의 상황에서만 고치시되,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고치는 것의 의미를 밝히셨다. 우리의 약함으로 인하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주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할 것이다. 주님과 나의 눈을 맞추고, 주님의 손을 맞잡을 때에 주님의 치유가 일어날 것이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치유이던, 구제든, 봉사든 전도든 거기서 드러나는 것이 나의 이름, 나의 만족, 우리와 우리 교회의 명성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드러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영광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나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첫 번째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드러나지 않는 봉사, 드러나지 않는 헌신이 쉬운 것은 아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교회의 구제와 사회사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자 칼빈은 가장 위대한 스승 중의 하나요, 개신교회의 가장 찬란한 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든 개신교 신학도들의 선망의 대상이요, 그가 남긴 기독교 강요는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성경 외의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도 할 수 있는 책이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는 야전사령관이고 칼빈은 전략가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 종교개혁자 칼빈이 시무했던 생 피에르 교회가 있다. 대개 유럽의 예배당들이 외관이나 내부가 온갖 장식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나타내는데 비해서, 생 피에르 교회당의 내부는 오히려 검소하고 소박하다. 다른 위인들이 도시의 상징이 되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과 달리, 제네바에는 칼빈의 흔적이 많지 않다. 그 예배당 내부에도 칼빈이 앉았던 소박한 의자 하나 달랑 있고, 그가 올라가 설교했던 설교단이 기둥에 붙어있는데, 꽃으로 잘 장식해 놓은 것 외에 칼빈의 흔적이 없다. 제네바 시민들이 칼빈을 자랑스러워한다지만, 칼빈의 묘지도 없다.
칼빈은 철저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남긴 업적으로 인하여 영광이 자신에게 돌려질까봐 염려했던 사람이었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세가지 모토중의 하나이며 그 자신의 삶의 좌우명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이 필생의 역작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구절도 비슷하다. Laus Deo!(하나님을 찬양하라!)
치유든, 봉사든, 헌신이든, 하나님만 드러나게 하라.
주께 부탁할 일이 있어도, 주께 간구할 일이 있어도, 주님을 무조건 밀어부쳐 만지려하기보다 그에게 조용히 나가서, 그와 눈 맞추고, 그의 말을 기다리라. 내가 말하기 이전에, 그가 말씀하시게 하라. 내가 중풍병 들어 누운 것도, 내 오른손이 마른 것을 그가 아신다. 때론 소리 높여 ‘나의 눈 먼 것을 고쳐주소서’라고 외칠 때도 있다. 때론 그냥 실로암 못 옆에 누워있는데, 그가 다가오실 수도 있다.
초점은, 예수가 일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는가? 이 말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해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는 철학적, 또는 신학적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다. 고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특수한 칭호가 아니었다. 애굽의 왕들은 태양신 라의 아들로 불리웠다. 어거스틴 이후 많은 로마의 황제들은 그들의 비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새겼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네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1.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고, 욥기 1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좌 앞에 선 모습을 묘사한다. 이 경우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를 상징할 수 있다.
2.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호11:1).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였다.
3.백성의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삼하7:14의 왕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된다’는 것이었다.
4.외경들 속에서는 ‘선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시락서 4장에는 아버지 없는 아이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주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 때문에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특별히 하나님과 가깝고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베드로도 마가를 아들이라고 불렀다.
즉, 당시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철학적, 신학적, 또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입각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문제는 지금 이 고백이 귀신들린 자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사람들이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에 귀신들린 자들은 먼저 예수를 알아보고 두려워하였다. 귀신들린 자들은 당시의 일반적인 용어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1장에서도 보았듯이, 영적 세계까지 관할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자, 즉 메시야시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지금 귀신들린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하는 중이다. 유대인들의 메시야에 대한 개념은 강력한 힘과 병력으로 로마인들을 쳐부수고, 유대인들이 현세적 권력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메시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피할 수 없는 모반과 폭동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특히 갈릴리 지역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더 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야에 대한 관념은 일반적인 생각과 정 반대였다. 예수는 메시야 속에서 봉사와 희생, 그리고 최후에는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였다. 일반 대중들은 메시야를 민족주의자로 보았지만, 예수는 메시야의 길을 십자가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선언을 내리기 전에, 메시야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사람들에게 교육시켜야만 했다. 현 단계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는 선언은 혼란과 비극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지금 오히려 귀신들린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라는 개념이 하나로 이어지려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저들에게 ‘나를 나타내지 말라’고 명하신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점인데, 아직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려지기 이르다는 점이다.
예수의 일에 순서가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순서대로 기록한 책이 아니다. 첫 부분에 탄생의 기록이 있고, 마지막에 십자가와 승천이 위치해 있지만, 그 속의 내용은 신학자 마태의 입장에 따라 설교는 주제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사역도 다섯 부분으로 교차 편집해 놓았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읽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시간순으로 따라갈 수는 없다. 누가복음도 요한복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비교적 예수님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을 강해 시작하면서 첫 시간에 마가복음의 가장 큰 특징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마가복음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곧’이라는 단어가 마흔 번 쓰였다. ‘그리고’가 제일 많이 쓰였는데, 그때 마가복음에 나오는 ‘그리고’가 1119번이라고 말씀드렸다. 하도 많이 나와서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오늘 7절에서 12절까지의 우리말 성경 말씀 속에 그리고는 등장하지 않지만 원문으로 읽으면 중간 중간에 ‘그리고’, 헬라어로 ‘카이’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그리고)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그리고)유대와 예루살렘과 (그리고)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그리고)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그리고)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그리고)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그리고)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마가복음 3장 전체 35절중에 ‘그리고’가 63번 사용되고 있다. 이건 마가의 특별한 말투이기도 하지만, 마가복음에 기록된 사건들의 시간적 연속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주님은 물러가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 논쟁이 치열하게 치닫고 있는 지점이었다. 지난 주 성경본문의 마지막 절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모여서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병을 고쳐달라고 떼로 몰려드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자칫 대형사고가 날 지경이었기에 바다로 빠져나갈 방도까지 준비해야 했다. 자칫 이런 상황에서 피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니다.
예수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고, 최후의 충돌이 오기 전에 해야 할 많은 일이 남아있었다. 아직 제자들도 선택하지 않으셨다. 이 시간순서에 따르면, 예수를 주변에 따르며 함께하는 자가 있었으나, 아직 12명의 제자를 정식으로 임명하지 않으셨다. 다음 주에 보게 될 13절에 비로소 제자를 세우시는 기사가 나온다.
제자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다. 물론 병을 고치려고 몰려든 사람에게는 자기의 일이 제일 급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일에는 질서와 순서가 있다. 그 질서와 순서가 실은 우리를 진짜로 살리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성의 등급이기도 하다. 천명의 병자를 고치는 것보다,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열두 명의 제자는 예수의 훈련을 받아, 예수 이후에 같은 이적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이건 마치 유대인의 속담 중에, 물고기를 잡아 줄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과도 같다.
왜 성도의 긴급한 기도가 종종 거절되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위에서 보시는 이의 눈에 더 정확한 순서가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병이 나아도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라고 하여도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기쁨이야 말로 할 수 없었겠지만, 반면에 그는 죽음의 고통을 두 번 겪은 사람이 되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주의 손에 있으니, 주님이 시간표를 바꾸시면 그게 옳은 길이다. 지금 당장 내 병이 낫는 것보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유익이다. 오해하지는 않겠지만, 병이 낫기를 기도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말도 아니고,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질병이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단순히 병에서 낫는 것이 전부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 내 사업이 흥하고, 내 자녀가 성공하는 것보다, 그가 하나님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유익이다. 교회가 외적으로 부흥하고, 사람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예수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유익이요, 우선이다.
교회 부흥을 위한 기도가 왜 필요치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주를 더 사랑하고, 주를 더 기뻐하는 것이 부흥보다 중요하고 시급하다. 교회의 부흥을 위한 기도, 그 진심은 이해하지만, 실제 지금 필요한 것은 내가 전도할 한 사람의 이름을 주앞에 아뢰고, 그를 구원을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 그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기도도 노력도 없이, 교회 부흥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예수님 부려먹겠다는 기도와 같다. 먼저 할 일이 있다.
사순절 둘째주일을 지나가고 있다. 무엇이 우선인지 항상 물으라. 주님과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라.